[단독] 기구한 역정의 국내 스타트업, 최초로 미 에미상 받는다

입력
2023.01.27 15:00
수정
2023.01.27 17:21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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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중인 방송 프로그램 자동 파악하는 획기적 기술 개발
국내 창업했으나 KT가 인수 후 미국에 매각


엔써즈를 공동창업한 김길연 전 엔써즈 대표가 2012년 스마트폰으로 TV화면을 비추면 재생 중인 인터넷 동영상과 동일한 장면을 찾아서 보여주는 영상 검색 기술을 시연하고 있다. 김주영기자

엔써즈를 공동창업한 김길연 전 엔써즈 대표가 2012년 스마트폰으로 TV화면을 비추면 재생 중인 인터넷 동영상과 동일한 장면을 찾아서 보여주는 영상 검색 기술을 시연하고 있다. 김주영기자

사라질 뻔했던 비운의 신생기업(스타트업)이 국내 스타트업 최초로 미국에서 에미상을 받는다. 'TV판 아카데미'로 불리는 에미상은 미국 방송 프로그램과 제작자, 방송 발전에 기여한 기업과 개인 등에게 주는 상이다.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거듭난 기구한 사연의 주인공은 엔써즈다.

2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에미상 시상식을 주관하는 미 텔레비전 예술과학 아카데미는 4월 16일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 예정인 제74회 에미상 시상식 중 기술 부문 수상자로 국내 출신 스타트업 엔써즈를 선정했다. 에미상의 기술 부문상은 혁신 기술로 미국 방송 발전에 기여한 기업 또는 개인, 단체에게 수여한다. 국내에서 창업한 스타트업이 이 상을 받는 것은 처음이다. 엔써즈는 미국 코그니티브 네트웍스, 터너 미디어연구소와 함께 공동 수상한다.

엔써즈는 획기적 영상자동인식(ACR) 기술을 개발한 공로로 이 상을 받는다. ACR이란 시청자가 보고 있는 TV프로그램을 자동으로 파악하는 기술이다. 이 기술은 TV 시청률 조사 및 개인 맞춤형 광고 등에 쓰인다.

과거 시청률 조사는 TV나 방송 셋톱박스에 별도 기기를 부착해 시청 중인 TV 채널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조사해 번거로웠다. 그러나 ACR을 활용하면 별도 기기없이 스마트TV에서 자동으로 방송 프로그램 및 시청시간 등을 파악한다. 따라서 시청자가 TV를 주로 보는 시간과 프로그램에 취향에 맞는 맞춤형 광고 등을 내보낼 수 있다.

영광의 주인공 엔써즈는 세상에서 없어질 뻔했다가 기사회생한 드라마 같은 사연을 갖고 있다. 2007년 김길연 대표와 이준표 부대표 등 카이스트 출신들이 국내에서 창업한 이 업체는 당시 구글도 놀란 혁신적 영상 검색 기술을 개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들이 개발한 영상 검색 기술은 제목에 검색어가 들어있지 않아도 검색어에 해당하는 장면이 포함된 영상을 찾아준다. 예를 들어 '라면'을 검색창에 입력하면 제목에 라면이 없어도 라면이 나오는 영상을 모두 찾아준다. 즉 글자가 아닌 영상을 인지한다.

또 굳이 검색을 하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특정 영상의 한 장면이나 사진을 찍으면 해당 장면이 나오는 영상을 찾아준다. 예를 들어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 어떤 영화의 한 장면을 찍은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비추면 그 영화의 해당 장면이 포함된 유튜브 영상들이 나열된다.

유튜브 등 영상 서비스에 공을 들였던 구글은 엔써즈가 이 기술을 발표하자 큰 관심을 갖고 인수까지 검토했다. 그러나 창업자들은 외국업체에 기술을 팔 수 없다며 버티다가 개발비 확보를 위해 2011년 KT에 경영권을 넘겼다. KT의 인수비용은 지분 확보 및 개발비 지원 등 약 400억 원이었다.

하지만 KT는 이 기술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결국 황창규 전 회장 시절인 2015년 KT는 엔써즈가 돈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접기로 했다.

졸지에 공중 분해될 위기에서 엔써즈 창업자들은 KT 대신 회사를 사줄 대상자를 찾아 나섰다. 각고의 노력 끝에 일간지 '시카고 트리뷴'을 발행한 미국 트리뷴미디어그룹의 계열사인 미국 음성인식업체 그레이스노트에 매각됐다. 당시 KT의 매각 금액은 약 70억 원으로 알려졌다.

다행스럽게 회사는 살아 남았지만 하루 아침에 이들의 기술은 미국으로 넘어가며 미국 스타트업이 됐다. 트리뷴미디어는 그레이스노트의 음성인식기술과 엔써즈의 영상인식기술을 결합해 가치를 높인 뒤 2016년 방송 시청률 조사로 유명한 미국 AC닐슨에 엔써즈를 재매각했다. 현재 AC닐슨 관계사인 엔써즈는 미국과 국내에서 영상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결국 엔써즈는 뛰어난 기술을 개발했으나 경영권을 가진 대기업에서 진가를 알아보지 못해 외국에 매각한 아쉬운 스타트업 사례로 남게 됐다. 엔써즈 창업자였던 김길연 전 대표는 다른 스타트업을 창업했고, 이준표 전 부대표는 소프트뱅크벤처스 아시아 대표를 맡고 있다. 이준표 소프트뱅크벤처스 아시아 대표는 에미상 수상 소감을 묻자 "창업자로서 감회가 남다르다"며 "반갑고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아쉬운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최연진 IT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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