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보다 호수... 옛 정취 퇴색해도 '강릉의 힘' 그대로

바다보다 호수... 옛 정취 퇴색해도 '강릉의 힘' 그대로

입력
2023.02.15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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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강릉 죽헌·초당동 경포호 일대

많은 관광객이 경포해변을 찾지만 경포대를 찾는 사람은 드물다. 멋진 풍광을 즐기는 방식도 변했다. 경포대 바로 아래 가시연습지에 설치된 뱃머리 조형물에서 여행객이 호수 정취를 즐기고 있다.

강릉역에 내려 택시를 잡고 경포대에 가자고 하면 어디에 데려다 줄까? 별달리 덧붙이지 않으면 십중팔구 경포해변에 내려준다. 승객에게도 기사에게도 ‘경포대’는 바닷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강릉을 관광도시로 각인시킨 일등공신이지만 경포대를 직접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방을 바라보기 좋도록 만든 전망대라는 사실도 희미해졌다. 바다 이전에 호수가 있다. 행정 중심인 강릉대도호부는 시내 명주동에 위치하는데, 강릉의 사대부는 변두리인 경포호 주변에 주로 살았다고 한다. 죽헌동(북촌), 초당동 일대는 그 빼어난 경치 때문에 오래전부터 강릉의 대표적 반촌이었다.


경포호 주변 여행지도. 그래픽=강준구 기자


호수에서 멀어진 정자, 그윽한 정취도 함께 잃었다

경포호 주변에는 경포대뿐만 아니라 11개의 정자와 누각이 ‘숨어’ 있다. 처음 세웠을 당시에는 당연히 잔잔하게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위치였겠지만, 많은 누정이 호수에서 멀어져 그윽한 정취를 잃고 말았다. 빼어난 경치를 조망하며 글을 짓고, 시를 읊고, 때로는 술잔을 기울이며 풍류를 즐기던 건물이 문화재로 등록돼 겨우 존재를 알릴 뿐이다. 바깥 풍광을 끌어들이는 한국 특유의 조경 문화, 즉 차경(借景)의 멋스러움도 옛일이 되고 말았다.

대표 누정인 경포대가 그나마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건 다행이다. 호수 북측 언덕에 세워진 누대에 오르면 그 옛날처럼 일대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경포대가 처음 지어진 것은 고려 충숙왕 13년(1326)이다. 박숙정이라는 인물이 경포 호수에 들렀다가 아름다운 풍경에 취했는데, 신라 때 신선들의 놀이터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건물을 올린 것이 시작이었다. 새로 부임한 강원도안렴사 안축에게 기문을 부탁해 지은 ‘경포신정기(鏡浦新亭記)’의 기록이다.

경포호 북측 언덕에 위치한 경포대. 김홍도나 정선의 옛 그림을 보면 삼면이 호수로 둘러싸인 잘록한 지형이었다.


경포대에서 내려다본 풍경. 호수는 그대로인데, 고운 모래톱이었던 바다와의 경계엔 현대식 호텔이 들어섰다.

짐작하는 바와 같이 ‘경포(鏡浦)’는 ‘유리같이 맑은 호수’를 의미한다. 그 풍취를 가장 멋들어지게 즐긴 사람도 안축이었다. “… 물안개와 물결 위에 때때로 갈매기 날고 / 모래밭 지나는 노새는 더디게 걸어가네 / 늙은 뱃사공에게 알려 천천히 젓게 하고 / 깊은 밤 외로운 달 떠오르기를 기다리네.” ‘경포에 배 띄우고(鏡浦泛舟)’의 한 대목이다.

지금도 경포대 앞에는 호수가 잔잔하고 11시 방향으로 바다와의 경계가 선명하지만, 옛날의 그 모습은 아니다. 호수와 바다를 갈라놓은 고운 모래밭엔 고급호텔을 비롯한 숙소와 상가가 빼곡하게 들어섰다. 밤이면 은은한 달빛 기둥 대신, 건물과 가로등에서 내뿜는 화려한 불빛이 수면에 아른거린다. 그 옛날 경포대를 대표하는 풍광이 고요하고 평화로운 달빛이었다면, 지금의 불빛은 한층 밝고 세련돼 들뜬 기분을 자아낸다.

주변을 농경지로 개간하면서 호수의 면적은 꾸준히 감소해 왔다. 1920년대만 해도 경포호의 면적은 지금의 1.8배에 달했다. 경포대를 처음 세운 곳도 지금보다 바다 쪽으로 500m 정도 앞이었다고 한다. 조선 중종 3년(1508) 강릉도호부사 한급이 지금의 위치로 옮겼고,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다시 지어 여러 차례 고쳤다.

누각에는 정자와 예서로 ‘경포대’ 편액이 걸려 있고, 들보 가운데에 ‘제일강산(第一江山)’이라 쓴 커다란 현판과 이곳 풍광을 노래한 여러 시판이 걸려 있다. 율곡 이이의 시도 있다. 춘하추동의 풍광을 읊은 다음, 끝머리에 “우리 인생은 바람 앞에 등불이요, 몸은 저 바닷가의 모래알 중의 하나”라고 표현했단다. 인생살이 온갖 풍상을 겪은 후에야 깨달을 듯한 시어라서, 열 살 때 지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옛날 화랑이 수련했다는 절터에 세워진 방해정. 경포호와 바로 붙어있지만 담장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호해정. 호수와 아주 멀어져 경포대에 버금가던 정취는 온데간데없어졌다.


해운정 건물도 단아함은 그대로지만 호수와 상관없는 정자가 되고 말았다.


경포대에서 바다 쪽으로 조금만 가면 방해정(放海亭)이 있다. 신라 화랑이 심신을 단련했던 인월사(印月寺) 터에 철종 10년(1859) 통천군수였던 이봉구가 선교장의 별서 건물로 지었다. 경포대와 함께 그나마 호수와 접한 정자이지만, 담장 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내부 정취는 알기 어렵다. 경포대와 방해정 사이에도 금란정, 상영정, 경호정 3개의 정자가 나란히 붙어 있지만 바로 앞이 논밭이어서 본래의 쓰임새를 잃고 말았다. 호수 상류 쪽에 있는 해운정(海雲亭)은 중종 26년(1531)에 지어 강릉에서 오죽헌 다음으로 오래된 건물이다. 단아한 외관은 그대로지만 역시 호수와는 상관이 없는 건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정취가 경포대와 자웅을 겨루던 호해정(湖海亭)의 처지는 더 안쓰럽다. 말 그대로 ‘호수와 바다를 바라보는 정자’였지만, 현재 바로 앞이 농경지로 변했고 주변에는 숙박업소와 카페, 식당 등이 어지러이 들어섰다. 은은한 정취와는 아주 거리가 멀어졌다.

경포호 상류에는 가시연습지가 조성돼 있다. 호수와 습지 주변은 여러 산책로로 연결돼 있다.


경포호 둘레 산책길의 쉼터. 바다와 구분되는 가느다란 띠를 중심으로 호수와 하늘이 반분된다.


잔잔한 경포호수에 물새들이 한가로이 헤엄치고 있다.


경포호 뒤로 눈 덮인 대관령 능선이 보인다.


변한 것은 지형만이 아니다. 경포호를 즐기는 방식은 더 많이 변했다. 고즈넉한 정취는 잃었지만 대중성과 접근성은 비교 불가다. 먼발치에서 내려만 보던 호수 주변으로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물가에 바로 붙은 쉼터가 여럿이니 전망대가 아쉽지 않다. 여유롭게 걸어도 좋고, 자전거를 빌려 호수를 한 바퀴 쉽게 돌아볼 수도 있다.

물이 흘러드는 호수 상류에는 ‘가시연습지’와 ‘생태저류지’ 등 2개의 수변공원이 만들어졌다. 가시연습지 초입에선 이따금 낯익은 가곡이 흘러나온다.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간다 / 물 맑은 봄 바다에 배 떠나간다 / 이 배는 달 맞으러 강릉 가는 배 / 어기야 디여라차 노를 저어라.” 뱃머리 모양 조형물에 올라서면 수면 위로 잔잔하게 미끄러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강릉의 두 여장부, 신사임당과 허난설헌

경포호 생태저류지 위쪽에 오죽헌이 있다.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난 유서 깊은 집이다. 사임당은 뛰어난 예술가에 실질적으로 집안을 이끈 여장부이자 군자였다. 현모양처의 본보기로 5만 원권 지폐의 주인공에 선정됐지만, 그를 현모양처로 낮춰 보는 시각은 점점 퇴색하고 있다.

경포호 상류 북촌마을에 자리 잡은 오죽헌. 한복을 빌려 기념사진을 찍는 여행객이 많다.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가 태어난 집 오죽헌.


오죽헌 주변은 온통 검은 대나무 '오죽'이 감싸고 있다.


오죽헌 마당에 오천 원권 구권 지폐가 포토존 역할을 하고 있다. 뒷면 그림을 참고하면 지폐의 그림과 똑같은 위치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실제 오죽헌에 남편 이원수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아들 율곡도 아버지에 대한 언급을 극도로 아꼈다. 사임당은 살아생전 남편에게 재혼하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남편은 부인이 살아 있는데도 스무 살이나 어린 주막집 여성을 첩으로 삼았고, 사임당이 세상을 뜨자 서모로 집에 들였다. 아내에 대한 열등감 때문으로 해석한다.

오죽헌은 조선시대 문신 최치운(1390∼1440)이 지었다. 강릉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검은 대나무를 뜻하는 오죽헌(烏竹軒)은 율곡의 이종사촌 권처균의 아호다. 율곡의 외할머니 용인 이씨는 딸을 다섯 두었는데, 이이에게는 조상의 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서울의 기와집을, 권처균에게는 묘소를 보살피라는 조건으로 오죽헌을 주었다. 집주인의 성씨가 달라지는 점에 의문을 가질 만하다. 장자 상속을 당연시하는 풍습이 근래까지 이어졌지만, 이때만 해도 남녀 상속에 차별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오죽헌 마당에는 오래된 매화와 배롱나무가 한 그루씩 자라고 있다. 둘 다 건립 당시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매화나무는 특별히 율곡매라 불린다. 신사임당은 고매도, 묵매도 등 여러 매화 그림을 남겼고, 맏딸 이름을 매창(梅窓)으로 지을 만큼 매화를 사랑했다고 한다. 매년 3월 20일경 집 안을 화사하게 밝히는 홍매화지만,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지금은 잔가지 몇 가닥에만 겨우 물이 올랐을 뿐이다.

경내는 오죽헌을 중심으로 율곡 사당과 복원한 살림집, 박물관과 인성교육관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건물 안팎이 대나무와 소나무로 둘러싸여 겨울에도 생기가 가득하다. 입장료는 성인 3,000원.

인근에 오죽헌과 비견될 고택으로 선교장이 있다. 효령대군의 11대손 이내번(1703~1781)이 지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 상류 주택이다. 입구에 활래정을 시작으로 안채·사랑채·행랑채·별당·정자 외 여러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10대에 걸쳐 30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후손이 거주하며 관리하고 있다.

얕은 산자락 아래 한 개 마을을 독차지한 듯 들어선 선교장. 강릉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이다.


선교장엔 여러 채의 건물이 담장과 문으로 구분돼 미로처럼 연결돼 있다.


선교장 입구의 활래정. 아담한 연못 귀퉁이에 멋스럽게 올라앉았다.

경포호가 지금처럼 쪼그라들기 전 배를 타고 건너다니던 배다리마을에 위치해 선교장(船橋莊)이라 불렀다고 한다. 모든 건물을 한꺼번에 짓지 않고 생활을 이어가면서 증축해 통일감과 짜임새가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되지만, 낮은 산기슭에 마을을 이룬 듯한 모습이 평온하고 여유롭다. 연못을 낀 활래정에서 넓은 마당을 지나 여러 건물을 둘러보고, 뒤편 솔숲까지 돌아 나오면 영주의 장원(莊園)에 못지않은 규모에 감탄한다. 입장료는 성인 5,000원이다.

경포대에서 호수 건너편 솔숲에는 ‘초당동고택’이 있다. 선조 때 문신 허엽이 살던 집으로 딸이자 조선시대 대표 여성 시인 허난설헌(1563∼1589)이 태어난 곳으로 전해지는 집이다. 솟을대문을 지나 사랑채 마당을 거치면 ㅁ자 본채로 이어지는 겹집이다. 화초와 나무를 조화롭게 배치해 전통 정원의 구조도 엿볼 수 있다.

허난설헌이 태어난 초당동고택.


초당동고택에 허난설헌 초상화가 걸려 있다.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의 솔숲. 규모는 크지 않지만 깊은 숲속에 들어온 듯 고요하다.

고택 주변의 공식 명칭은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이다. 입구 기념관에 210여 수의 시를 수록한 ‘난설헌시집’을 비롯한 허난설헌의 서화작품과 동생 허균의 ‘홍길동전’ 목판 등을 전시하고 있다. 고택 앞에는 두 남매를 비롯해 아버지 허엽과 형제 허성, 허봉 등 ‘초당오문장(楚堂五文章)’이라 불리는 허씨 집안 문장가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허균 허난설헌 기념공원의 솔숲 뒤로 나가면 경포호 산책로와 연결된다. 노란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경포해변은 어느새 경포대의 대명사가 됐다. 계절에 상관없이 여행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고택 뒤로는 아름드리 솔숲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면적이 넓지 않지만 깊은 숲속에 들어온 듯 고요하다. 솔숲을 통과하면 경포호 산책로로 이어진다. 좌우로 호수와 솔숲을 끼고 걷다 보면 바다로 흐르는 경포천 짧은 물길이 보인다. 이곳에서 도로를 건너면 바로 경포해변이다. 한적한 호수 산책로와 달리 겨울바다 정취를 즐기려는 관광객으로 제법 붐빈다.

강릉=글·사진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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