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0년 전 페르시아 공주’ 미라, 5년 전 살인사건 피해자였다

입력
2023.03.03 04:30
16면

<52> 페르시아 왕족 미라 위조사건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파키스탄 경찰이 밀수꾼으로부터 압수한 '페르시아 공주' 미라가 파키스탄 카라치 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AFP 연합뉴스

파키스탄 경찰이 밀수꾼으로부터 압수한 '페르시아 공주' 미라가 파키스탄 카라치 국립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AFP 연합뉴스

황금가면을 쓴 채 화려하게 조각된 관에 누운 미라가 파키스탄 암시장에서 발견됐다. 당국이 압수한 미라를 살핀 고고학자들은 ‘고대 페르시아 왕조의 공주’라고 판단했다. 학계는 “고대사의 새 지평”이라며 들떴고, 인접국들 간에는 문화재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외교 분쟁까지 불붙었다.

그러나 깜짝 놀랄 반전이 있었다. 미라는 가짜였다. 주인공은 수천 년 전이 아니라, 5년 전 둔기에 맞아 사망한 여성이었다. 세기의 발견이 희대의 사기이자, 잔혹한 살인 사건으로 그 실체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암시장서 발견된 고대 왕국의 공주

2000년 10월 파키스탄 암시장에 수상한 매물이 들어왔다. ‘상품’은 육중한 나무 관에 담긴 한 여성의 미라. 판매가는 자그마치 1,100만 달러(약 143억2,300만 원)였다. ‘고대 미라를 판다’는 동영상을 제보받은 파키스탄 경찰은 도굴이 유력하다고 판단, 즉각 추적에 나섰다.

얼마 안 가 경찰은 동영상 속 남자인 알리 아크바르를 남부 도시 카라치에서 체포했다. 심문 끝에 아크바르는 “‘지진 때문에 갈라진 땅에서 석관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이란인 샤 바키로에게 미라를 받았고, 미라가 팔리면 수익을 반씩 나누기로 했다”고 털어놓았다. 아크바르의 증언을 토대로 경찰은 이란·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접한 파키스탄 남서부 발로키스탄주의 은신처에서 미라를 찾아 압수했다. 그리고 유해가 든 관을 통째로 카라치 국립박물관으로 옮겼다.

'페르시아 공주' 미라를 가까이서 찍은 사진. 황금으로 만든 가면과 왕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 미라는 5년 전 숨진 여성 시신으로 만든 가짜 미라로 드러났다. 위키피디아 캡처

'페르시아 공주' 미라를 가까이서 찍은 사진. 황금으로 만든 가면과 왕관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 미라는 5년 전 숨진 여성 시신으로 만든 가짜 미라로 드러났다. 위키피디아 캡처

그냥 미라가 아니다.” 간이 감정을 마친 박물관 관계자의 이 한마디에 고고학계의 시선이 쏠렸다.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 해당 미라는 고대 이집트 스타일로 방부 처리된 채 금박이 입혀졌다. 황금으로 만든 데스마스크와 왕관도 착용했다. 미라가 누워 있던 관은 조로아스터교의 창조신인 ’아후라 마즈다‘가 조각된 ’사르코파구스(sarcophagus·죽은 자의 집 역할을 하는 세공된 관)‘였다. 왕족이나 대귀족만 받을 수 있는 최고급 예우였다. 무엇보다 관에 새겨진 고대 페르시아 설형문자가 결정적이었다. “나는 위대한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 크세르크세스 1세의 딸, 로드구네다. 고대의 신이 나를 보호한다.”

고대 페르시아에서 미라를 만들었다는 건 유례에 없던 일이다. 역사가들은 고문에 기록되지 않은 새로운 공주의 존재에 흥미를 가졌다. 이제 전 세계가 이 미라를 ’페르시아 공주‘라고 부르며 주목하기 시작했다.

소유권 분쟁 중 떠오른 의혹…’페르시아 공주‘가 수상하다

미라는 곧바로 외교가에서 ‘폭풍의 눈’이 됐다. 카라치 국립미술관 기자회견 직후 이란 문화유산기구는 파키스탄 학자인 아흐메드 하산 다니 교수를 인용해 “페르시아 왕족의 미라인 만큼, 이란에 소유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유네스코를 통해 반환을 위한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파키스탄도 물러서지 않았다. 살림-울-하크 파키스탄 고고학부 본부장은 “미라는 파키스탄 영토인 발로키스탄에서 발견됐으니 파키스탄의 소유”라며 맞섰다. 이란 정부가 인터폴까지 동원하자 파키스탄 외무장관이 “이 문제를 정치화하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나서며 양국 관계가 험악해졌다. 여기에 제3국인 아프가니스탄마저 끼어들었다. 탈레반은 “밀수업자들을 체포했더니 미라를 아프가니스탄 남서부 님로스에서 찾았다고 자백했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했다.

‘미라 외교 분쟁’이 한창일 때, 고고학계는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 파키스탄 카라치를 찾은 이란 문화유산기구 대표단은 관에 적힌 글을 확인하곤 “고대 페르시아 문자와 언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적은 것”이라고 진단했다. 문법적 오류가 있었던 건 물론, 쐐기문자로 적힌 공주의 이름 ‘로드구네’가 고대 페르시아가 아니라 그리스식 표기였기 때문이다.

이집트인들이 미라를 만드는 과정이 기록된 벽화. 이집트에서는 심장을 모든 생각의 근원으로 여겨 사후 재판을 위해 미라를 만들 때 심장을 남겨 뒀고, 여의치 않을 경우 모조 심장이라도 넣어두는 전통이 있었다. 위키피디아 캡처

이집트인들이 미라를 만드는 과정이 기록된 벽화. 이집트에서는 심장을 모든 생각의 근원으로 여겨 사후 재판을 위해 미라를 만들 때 심장을 남겨 뒀고, 여의치 않을 경우 모조 심장이라도 넣어두는 전통이 있었다. 위키피디아 캡처

겉과 속도 달랐다. 이집트 식으로 꾸몄지만, 단층 촬영으로 확인해 보니 미라 안쪽의 모든 내장이 제거돼 있었다. 심장만은 남겨두는 이집트 제작법을 따르지 않은 셈이다. 2,600년 전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미라의 힘줄이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점도 이상했다.

여러 의문점이 잇따르자, 파키스탄 당국은 컴퓨터단층촬영(CT) 등 정밀 검사에 착수했다. 상황은 180도 뒤집혔다. 미라는 기원전 페르시아의 공주가 아니었다. 5년 전 둔기에 의한 외상으로 사망했다고 추정되는 여성의 시신이었다. 세기의 발견이 일순간 강력사건으로 변한 것이다.

‘세기의 발견’의 재료가 된 16세 소녀 시신

파키스탄에서 발견된 '페르시아 공주' 미라를 정밀분석하기 위해 고고학자, 법의병리학자로 구성된 감식팀이 들어 올리고 있다. 위키피디아 캡처

파키스탄에서 발견된 '페르시아 공주' 미라를 정밀분석하기 위해 고고학자, 법의병리학자로 구성된 감식팀이 들어 올리고 있다. 위키피디아 캡처

CT 스캔 결과에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미라의 주인공은 약 140㎝ 신장의 파키스탄인 또는 이란인 소녀로,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이 아니라 ‘서기 1996년 전후’에 숨진 것으로 추정됐다. 사망 당시 나이는 16세쯤으로 보였으며, 사인은 둔기로 인한 요추 골절이었다. 몽둥이 등 대형 둔기에 등쪽 척추가 산산조각이 나 사망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현지 언론들은 “살인사건 피해자가 가짜 미라의 재료가 된 것”이라고 보도했다.

최대 쟁점은 누군가가 ‘미라를 만들려는 의도’로 희생자를 살해했느냐의 문제였다. 파키스탄 수사당국은 정확한 사망 시점과 살해 동기 등을 밝히기 위해 법의학·병리학계 권위자인 크리스 밀로이 영국 셰필드대 교수를 초청했다. 부검을 위해선 시신 외피를 깎아내야 해 이슬람 율법에 어긋날 소지가 있었지만, 이 사건만큼은 예외가 인정됐다.

파키스탄의 고고학자이자 박물관학자인 아스마 이브라힘 박사가 2021년 언론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그는 고고학적 지식을 활용해 '페르시아 공주' 미라가 가짜임을 밝혀냈고, 크리스 밀로이 영국 셰필드대 교수와 함께 살인사건 피해자의 정밀 감식에 참여했다. 파키스탄 잡지 '오로라(Aurora)' 홈페이지 캡처

파키스탄의 고고학자이자 박물관학자인 아스마 이브라힘 박사가 2021년 언론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그는 고고학적 지식을 활용해 '페르시아 공주' 미라가 가짜임을 밝혀냈고, 크리스 밀로이 영국 셰필드대 교수와 함께 살인사건 피해자의 정밀 감식에 참여했다. 파키스탄 잡지 '오로라(Aurora)' 홈페이지 캡처

살인 사건의 실체를 명확히 밝혀내진 못했으나, 가짜 미라를 만든 범인이 5년 전 사망한 여성을 기원전 ‘페르시아 공주’로 위장하려 한 흔적은 나왔다. 계획적인 시신 손상 정황을 포착한 것이다. 단단한 붕대를 3시간 동안 잘라낸 끝에 여성의 머리카락이 나왔다. 끝이 밝은 금발이었다. 밀로이 교수는 영국 BBC방송에 “화학 분석 결과, (범인은) 시신의 몸과 머리카락이 하얗게 색이 바래도록 표백시켰다”고 말했다.

장기가 전부 제거된 복부는 염화나트륨 등 현대의 건조제로 채워져 방부처리됐다. 밀로이 교수는 “(피해자가) 미라가 되기 직전에 살해됐는지, 범인이 갓 묻힌 시신을 파낸 것인지는 불확실해도, 누군가가 부도덕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짚었다.

단일범의 소행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파키스탄의 고고학전문가 아스마 이브라힘 박사는 “특정 연대의 고대 미라처럼 보이도록, 시신을 노화시키는 기술은 분명 전문적인 영역”이라며 “해부학적 지식을 가진 전문가가 몇 달간 공을 들였을 것”이라고 점쳤다. 해부학자까지 동원된, 전문적인 위조 범죄였다는 것이다.

'2600년보다 길었던 13년'... 사건은 미제로

파키스탄 경찰이 대대적인 수사를 펼쳤고, 2001년 영국 BBC방송에서 관련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했지만 '페르시아 공주' 가짜 미라 사건의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페르시아 미라의 미스터리(The Mystery of the Persian Mummy)' 화면 캡처

파키스탄 경찰이 대대적인 수사를 펼쳤고, 2001년 영국 BBC방송에서 관련 다큐멘터리까지 제작했지만 '페르시아 공주' 가짜 미라 사건의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페르시아 미라의 미스터리(The Mystery of the Persian Mummy)' 화면 캡처

파키스탄 경찰은 살인 사건 수사에 본격 착수했다. 문화재 밀매 혐의로 이미 징역 10년 형을 구형받은 밀수꾼 아크바르와 샤 바키로는 살인 혐의로 다시 조사를 받았다. 다른 한편으론 희생자가 누구인지도 추적했다. 해당 시신은 사후에 모든 치아가 제거돼 신원 파악이 불가능했다. 경찰은 두개골 치수와 얼굴 특징을 반영해 가상의 몽타주를 만들고, 사망 추정 시기인 1996년 전후에 실종된 여성들 목록을 뒤졌다.

수사과정에서 또 다른 가짜 미라 거래가 드러나 파키스탄이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다. 부검 이후 시점에 ‘페르시아 미라’ 2구가 국제 미술 암시장에서 600만 달러(약 79억3,200만 원)에 판매된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경찰은 “수거된 시신 모두 ‘페르시아 공주’와 동일한 방식으로 장식돼 미라처럼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도굴꾼들이 ‘신선한 시신’을 빼돌려 가짜 미라를 만드는 공장에 공급한다는 괴담까지 떠돌았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몇 년이 지나도록 범인은커녕, 피해자 신원도 밝혀지지 않았다. 2005년 수사는 ‘미제 사건’이라는 결론과 함께 사실상 종결됐다. 시신은 파키스탄 최대 자선단체 ’에디 재단‘에 인계됐고, 이슬람 장례 의식이 조용히 치러졌다.

문화재 소유권을 주장하며 외교 분쟁까지 벌였던 나라들도 잠잠해졌다. 모두가 ‘페르시아 공주’ 미라를 잊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8년, ‘향년 16세’의 피해 여성은 공동묘지에 묻혔다. 어쩌면 2,600년보다도 길게 느꼈을 법한 13년을 보낸 이름 모를 소녀는 마침내 안식을 찾았을까.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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