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권자의 자기부정

입력
2023.03.31 04:30
26면

대한축구협회 이사회. 대한축구협회 제공

대한축구협회 이사회. 대한축구협회 제공

2011년 5월, 국가대표 공격수 최성국이 100여 명의 기자 앞에 섰다. 당시 파다했던 승부조작 가담 의혹을 해명하는 자리였다. 그는 "부끄럼 없이 살았다. 부끄러웠다면 이 자리에 서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펄쩍 뛰었다. 그러나 한 달도 안 돼 자진신고를 했다. 말이 자진신고지 검찰 수사망이 조여 오자 죄를 덜 받기 위해 꼼수를 부린 것이었다. 수사 결과 최성국은 단순 가담이 아니라 브로커 역할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한축구협회의 '날치기 사면'에 축구계가 시끌시끌하다. 사면 대상자 100명 중 48명이 승부조작에 가담했다 영구제명 처분을 받은 이들이라고 한다. 최성국도 포함됐다. 협회의 명분은 축구계 대통합과 카타르 월드컵 16강 자축이다. 사면 발표는 지난 28일 한국-우루과이의 국가대표 평가전을 1시간 앞두고 기습적으로 이뤄졌다. 축구 팬들 사이에선 '3·28 16강 특사'란 비아냥이 나온다.

이례적으로 사면권을 발동한 정몽규 협회장에 대해서도 '자기부정'이란 비판이 거세다.

정 회장은 2011년 프로축구가 승부조작으로 쑥대밭 됐을 때 프로축구연맹 총재였다. "제 살을 깎는 아픔이 있더라도 암적 존재는 도려낼 것"이라며 근절을 약속했다. 그는 2013년 초 협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같은 해 7월, 친정이었던 프로연맹이 이사회를 열어 승부조작범의 징계 감경을 슬그머니 의결했다. 범죄를 저지른 지 2년이 지났으니 재기의 기회를 주자는 이유였다. 그러나 상급단체인 협회 이사회가 거부했다. 당시 이사회 의장이 정 회장이었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태도를 180도 바꿨다. 면죄부를 주기에 2년은 부족하지만 12년은 충분하다는 생각일까. 상식적이지 않은 결정이라 여러 의혹이 제기된다. 특정인을 구제하기 위해 나머지 99명을 사면한 것 아니냔 말까지 나온다. 협회는 사면 대상자 명단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반대 여론이 거세지고 상급단체인 대한체육회도 제동을 걸자 결국 협회는 31일 이사회를 열어 재심의하기로 했다. 이번엔 협회와 반대 입장에 섰지만 체육회라고 마냥 떳떳한 건 아니다.

체육회에도 '(구)대한체육회와 (구)국민생활체육회의 통합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은 체육인에 한해 사면·복권할 수 있다'는 한시 규정이 있었다. 2016년 두 단체가 지금의 체육회로 통합될 때 알력 다툼이 극심했는데 정치적으로 불이익을 본 인사들을 화합 차원에서 구제하자며 만든 조항이었다. 실제 2017년 사면이 단행됐는데 과거 심판위원장에게 특정 선수 점수를 올려달라고 청탁한 혐의로 자격정지 징계를 받은 고위 인사가 포함돼 논란이 된 적이 있다.

사면권을 도깨비방망이처럼 쓰는 건 체육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신년 특별사면·복권 소식에 세밑이 떠들썩했던 게 불과 몇 개월 전이다. 윤 대통령이 수사를 주도해 처벌했던 국정농단 사태와 국정원 댓글조작 사건 관련 인물들이 대거 사면 대상에 이름을 올렸다. 검사 시절의 수사 결과를 스스로 부정한 꼴이라는 뒷말이 나왔다. 이때도 명분은 '범국민적 통합'이었다.

사면 제도의 취지는 생계형 범죄자 등이 징계로 정상 생활에 제약을 받지 않도록 배려하자는 데 있다. 그러나 긍정적 기능보단 남용 논란만 반복되니 법조문에서 '사면'이란 용어를 빼자는 주장까지 나온다. 사면권자들이 어떻게 대답할지 궁금하다.

윤태석 사건이슈팀장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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