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부가 외교 다할 수 있나

입력
2023.04.14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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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18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한국국제교류재단(KF) 주최로 열린 제5회 공공외교 주간 행사장 모습. 지자체가 공공외교를 할 수 있도록 돼 있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연합뉴스

지난해 11월 18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한국국제교류재단(KF) 주최로 열린 제5회 공공외교 주간 행사장 모습. 지자체가 공공외교를 할 수 있도록 돼 있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연합뉴스

“한국 정부는 객관적 사실을 존중하라!”

지난달 9일 국내 언론이 크게 주목하지 않은 사건이 하나 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책임이 한국 정부에 있다’고 한 서울중앙지법 판결에 국방부가 항소하자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베트남 정부가 ‘버럭’ 수준의 반응을 보인 일이다. 2월 7일 1심 판결 당시 베트남 외교부가 ‘과거를 닫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며 기존의 실용주의적 입장을 재확인했던 것과 비교하면 사뭇 다른 어조다.

즉각적이고도 직설적인 이 반응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베트남 정부가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를 외교적 현안 카드로 손에 쥐고 있다는 이야기다. 대외적으로는 ‘과거를 닫자’고 밝히고 있지만 ‘때’가 오면 한·베 관계가 일본과 한국의 관계처럼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베 정상회담 때면 한국 대통령들이 민간인 학살 문제에 유감을 표했던 것도 그런 불상사를 막아보자는 심산에서였다. 그러나 베트남 주석이 이에 대해 뭐라고 답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 않는다. 베트남은 자신들이 승전국이기 때문에 한국에 사과를 요구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문제를 언제든지 꺼내들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한국 정부도 이런 묘한 분위기를 인지하고 있다. 압도적 비율의 공적개발원조(ODA) 예산이 베트남으로 향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양국 정부가 만들어 놓은 각종 정책의 길을 따라 기업과 관광객도 베트남으로 흘러 들어간다.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축구팀을 맡았을 때 2,000달러대에 머물던 베트남의 1인당 GDP는 5년 만에 2배 가까이 성장했고 지난해엔 일본을 제치고 한국의 3대 교역 대상국이 됐다. 이런 흐름 속에 알 만한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그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고.

이런 과도기적 상황에서 주목받는 게 공공외교(Public Diplomacy)다. 외국 국민(Public)을 대상으로 한 외교활동으로서 소기의 외교적 목적을 부드럽게 달성하기 위해 정교하게 기획된다. 삼성 현대 같은 기업은 물론 블랙핑크, BTS, 박 감독 등 각계각층이 공공외교라는 거대한 무대에서 플레이어로 뛰고 있다. 이들에겐 ‘한·베 관계만큼은 한·중, 한·일 관계처럼 되는 것을 막아보자’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요즘 주목받는 공공외교 플레이어는 지방자치단체다. 약하고 굼떠도 중앙정부보단 외국민 마음속으로 빠르고 깊게 들어간다. 재계나 예체능계의 활약에 비하면 촌스러워 보여도 높은 신뢰성과 지속성이 강점이다. 각국이 지방정부의 외교를 국가외교의 한 축으로 활용하는 것도, ODA 사업을 지방외교와 매칭하려는 것도 지자체가 중앙정부 외교의 빈 틈을 메우고 있어서다.

우리 공공외교법은 공공외교 주체로 민간단체와 함께 지자체를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지방외교를 활성화하는 중앙정부의 제도적 지원은 여전히 열악하다. 지방정부가 외국 도시와의 교류를 통해 자체 발굴한 공공외교 사업을 하려고 하면 예산 문제가 발목을 잡기 일쑤다. 중앙과 지방의 손발이 맞지 않아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외교부가 모든 것을 다할 수 없고, 중앙과 지방이 따로 움직일 여유도 없다. 그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정민승 사회부 차장

정민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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