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상 국대서 애완견 전문가로 '인생 2막' 꿈꿨지만... 전세사기에 무너졌다

입력
2023.04.19 04:00
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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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체고 해머던지기 유망주 출신
운동 그만둔 뒤 애견 자격증 공부
부친 "수도요금도 못 내다니" 오열

18일 오후 인천 중구 인하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전세사기 피해자 박모씨의 빈소 입구 모습. 이환직 기자

18일 오후 인천 중구 인하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전세사기 피해자 박모씨의 빈소 입구 모습. 이환직 기자

"빨리 취업해 돈 벌어 동생 보살피겠다고 상업고를 가겠다는 아이였다.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육상실업팀에 입단할 만큼 가족을 걱정했는데..."

부산체고 육상부 감독을 지낸 부산 동항중 성희복 교감은 18일 한국일보 통화에서 전날 인천 미추홀구 한 아파트에서 숨진 전세사기 피해자 박모(31)씨에 대해 이같이 기억했다.

성 교감 등에 따르면 박씨는 강원 인제의 한 중학교에서 원반던지기 선수로 활동했다. 박씨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2007년 자신과 네 살 아래 동생을 보살피던 외할머니 집을 떠나, 부산 금정구의 고모 집으로 이사 오면서 운동선수의 꿈을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운동을 열심히 하면 장학금을 마련해주겠다"는 당시 성 감독의 설득에 부산체고에 입학했다. 종목도 원반에서 해머던지기로 바꿨다.

종목을 바꿨지만 박씨는 빠르게 성장해 정상에 섰다. 고교 3년간 전국체전 3연패를 비롯해 16개 대회에서 1등을 했다. 세계주니어대회에 출전했고, 2010년 광저우아시안게임에도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다. 고교를 졸업한 박씨를 여러 실업팀이 탐냈다. 박씨는 가족들 조언을 듣고 한 실업팀에 입단했지만 고교 시절만큼 성적을 내지는 못했다. 실업팀을 옮겨다니던 박씨는 결국 지난해 운동을 그만뒀다. 이후 박씨는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원에 다녔다. 애견 관련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인생 2막'을 준비하던 박씨의 꿈은 전세사기라는 덫에 걸려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착실하게 미래를 준비하던 박씨는 지난해 3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접했다. 자신이 살던 아파트가 임의 경매(담보권 실행 경매)에 넘어간다는 통보를 받은 것.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전세사기 피해자가 돼있었다. 2019년 9월 보증금 7,200만 원을 주고 미추홀구의 한 아파트를 전세로 계약한 박씨는 2년 뒤 임대인 요구로 재계약하면서 보증금을 9,000만 원으로 올렸다. 하지만 재계약이 박씨 발목을 잡았다. 최우선변제금 2,700만 원이라도 보장받기 위해선 보증금이 8,000만 원보다 적어야 했기 때문이다.

성 교감은 "얼마 전 선수생활을 마감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또다시 불행한 소식이 들려서 너무 안타깝다"며 "한 수 아래였던 선수들이 여전히 실업팀과 국가대표팀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고 있어 아쉬운 마음이 너무 크다"고 말했다.

18일 인천 중구 인하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박씨의 빈소는 적막감만 돌았다. 박씨의 아버지와 동생, 지인 등이 지킨 빈소에는 오후까지 조문객도 화환도 없었다. 침통한 표정으로 빈소를 지키던 가족들은 굳게 입을 다문 박씨의 영정 사진이 들어오는 등 빈소 준비가 끝나자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2주 전에 건강은 괜찮냐고 묻던 딸의 안부 전화가 마지막 통화가 됐다"며 어렵사리 입을 뗀 박씨 아버지는 "단둘이 일본 여행도 가고 최근에는 강원도도 다녀올 정도로 아비를 챙기던 자식이었다. 수도 요금도 못 내는 상황에서 혼자 견딘 걸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며 눈물을 삼켰다. 실제로 박씨가 거주한 아파트 앞 쓰레기 봉투에는 수도 요금 독촉장이 쌓여 있었다. 이날 빈소에서 만난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 대책위원회 관계자는 "도대체 얼마나 더 사람이 죽어야 하나. 안타까운 희생이 더 이상 없도록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18일 인천 중구 인하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전세사기 피해자 박모씨의 빈소. 유족 제공

18일 인천 중구 인하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전세사기 피해자 박모씨의 빈소. 유족 제공


이환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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