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구멍 뚫린 '보복범죄' 대응... '제2 신당역 비극' 불렀다

입력
2023.05.29 04:30
수정
2023.05.29 11:32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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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폭력' 평가, 피해자 진술 의존 한계
위험 징후 있었지만 경찰 적극 대응 안 해
"스토킹·가정폭력처럼 보호장치 마련돼야"
가해자 구속... 법원 "도주 우려" 영장 발부

데이트폭력 신고로 경찰 조사를 받은 뒤 헤어진 연인을 살해한 피의자 김모씨가 28일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금천경찰서를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뉴시스

데이트폭력 신고로 경찰 조사를 받은 뒤 헤어진 연인을 살해한 피의자 김모씨가 28일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금천경찰서를 나서며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뉴시스

서울 금천구에서 ‘데이트폭력(교제폭력)’을 신고한 여성이 경찰 조사 10분 만에 살해당했다. 지난해 9월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 후 허술한 보복범죄 예방 및 대응 대책을 비판하는 여론이 커지자 국회와 경찰은 부랴부랴 제도적 개선책을 내놨다. 하지만 비극의 반복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가해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예측부터 실패했고 현장 경찰의 판단도 안일했다. 교제폭력 피해자를 보호하는 법적 테두리 역시 단단하지 않았다. 여전히 곳곳에서 구멍이 뚫려 있었던 것이다.

새 '위험성 평가' 매뉴얼도 무용지물

경찰은 교제폭력 신고가 들어오면 먼저 ‘범죄 피해자 위험성’을 평가한다. 피해자가 보복 당할 우려가 있을 때 작성하는 체크리스트, 즉 일종의 매뉴얼이다. 28일 경찰에 따르면, 피해 여성 A(47)씨는 26일 사건 발생 약 1시간 30분 전 피의자 김모(33)씨를 교제폭력으로 112에 신고했다. 닷새 전 A씨가 이별을 통보하자 김씨가 이날 새벽 PC방에 있던 그를 찾아온 것이다. 경찰은 두 사람을 임의동행 형태로 데려가 따로 조사한 뒤 체크리스트를 작성했다. 결과는 ‘낮음’으로 나왔다. ‘매우 높음, 높음, 보통, 낮음, 없음’ 등 5단계 분류에서 사실상 범죄 가능성이 없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금천경찰서는 “피해자 진술로는 폭력이 경미해 위험성이 그리 크지 않다고 판단했다” 고 해명했다.

그러나 폐쇄회로(CC)TV 영상과 신고 내용 등에서는 여러 범죄 징후가 뚜렷이 엿보였다. 김씨는 거리에서 피해자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고, 골목으로 끌고 가려고도 했다. 또 피해자는 112 신고에서 “예전에 맞은 적도 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정이 이런데도 위험 등급은 왜 낮게 매겨졌을까. 체크리스트 자체가 피해자 입에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탓이다. 신당역 살인 때도 경찰은 범인 전주환(32)의 범죄 위험성을 당시 가장 낮은 등급인 ‘없음 또는 낮음’으로 평가했다. 체크리스트 ‘무용론’ 비판이 커지자 경찰청은 연구용역을 거쳐 개선 작업에 착수했다. 질문 수는 16개에서 28개로 늘었고 가정폭력, 스토킹, 교제폭력 등 이른바 ‘관계성 범죄’ 관련 항목도 새로 추가했다. 새 체크리스트는 한 달 간 시범운영을 거쳐 이달 22일부터 시행됐다.

결과적으로 보완된 매뉴얼은 불과 나흘 만에 효용성을 상실했다. 아무리 질문을 세분화하고 평가 항목을 늘려도 기본적으로 친밀한 사이에서 발생하는 교제폭력 사건의 특성을 간과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적극 진술하기 어려워 몇 개의 기준으로는 가해자의 폭력 위험이 과소평가되는 구조적 결함을 안고 있는 셈이다.

소극적 경찰 후속 조치... 보호법도 없어

경찰 위험성 판단체크리스트 개선 전·후 비교. 그래픽=강준구 기자

경찰 위험성 판단체크리스트 개선 전·후 비교. 그래픽=강준구 기자

매뉴얼에서 걸러내지 못해도 가ㆍ피해자를 직접 대면한 현장 경찰관이 위험 징후를 포착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찰은 피해자가 병원 진료 등을 이유로 동행 귀가를 거절하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한 범죄정책 전문가는 “최근엔 피해자의 ‘신고’ 행위 자체가 새로운 트리거(범죄 동기)가 되는 사례가 많다”며 “경찰이 좀 더 피해자 보호에 적극성을 보여야 했다”고 비판했다.

교제폭력 범죄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법도 없다. 가정폭력은 ‘가정폭력처벌법’, 스토킹은 ‘스토킹처벌법’처럼 해당 범죄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법령이 존재한다. 피해자에게 보복 노출 우려가 있을 때 접근금지, 유치장 구금 등의 잠정조치를 할 수 있는 기반이다.

경찰은 이번 사건이 가정폭력이나 스토킹 범죄는 아니라고 봤다. 가정폭력처벌법이 적용되려면 가ㆍ피해자 사이에 법률혼 또는 사실혼 관계가 인정돼야 한다. 두 사람은 1년 가까이 교제하면서 김씨가 A씨 집에 자주 들락거리는 동거 관계였지만 경찰은 사실혼으로 판단하지 않았다. 사실혼은 동거 여부보다 ‘부부관계를 형성하려는 양쪽 의사’를 더 중요하게 여겨서다. “결혼 생각이 없고, 연인 관계일 뿐”이라는 이들의 진술도 근거가 됐다.

스토킹 범죄 역시 가해자가 지속적으로 피해자에게 접근해 공포심을 유발하거나 주거에 침입해 물건을 훼손해야 성립된다. 김씨는 사건 전 피해자에게 “(너희 집) TV를 부쉈고, (만나주지 않으면) 현관문 비밀번호를 바꾸겠다”고 협박 문자를 보냈다. 경찰은 다만 TV가 파손되지 않았고, 이별 통보 후 김씨가 나흘 간 위협을 가한 적도 없는 점을 들어 스토킹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이번 사건은 현행법으로 아우르지 못하는 교제폭력의 맹점을 분명히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스토킹과 가정폭력에 준하는 제도적 보호체계가 마련돼야 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관련 내용을 담은 법안은 여러 번 발의됐지만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법무법인 ‘혜명’의 오선희 변호사는 “수사 기관에만 책임을 물을 게 아니라 관계성 범죄에 수반되는 보복을 방지하기 위한 법 체계부터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소진 서울남부지법 판사는 이날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거쳐 “도주 우려가 있다”며 김씨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그에게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보복살인 혐의가 적용됐다. 김씨는 영장 심사 전 “평생 속죄하며 살겠다”고 말했다.

최다원 기자
김소희 기자
이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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