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들 교화될지 의문… 사형 집행 없던 26년 동안 대안 만들었어야"

입력
2023.06.07 04:00
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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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두 번의 합헌, 세 번째 결론은
살인 피해 유족들의 피눈물과 허탈함
사형제 존폐 논쟁 26년 간 이어지는 동안
정부는 왜 대안 마련 안 했는지 묻고 싶어
유족들, 출소 공포·트라우마 등 고통 심각
"사형 어렵다면 가해자에 두려움이라도…"

편집자주

26년간 사형이 집행되지 않으면서, 한국은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로 분류됐다. 그러나 사형수 59명은 여전히 수감 생활 중이다. 헌법재판소는 사형제에 대해 두 차례 합헌 결정을 내린 뒤, 이르면 올해 세 번째 판단을 내놓을 예정이다. 한국일보는 헌재 결정을 앞두고 사형제를 둘러싼 양자택일의 소모적 공방을 지양하고 더 나은 길이 무엇인지 고민해봤다.


"대법원 가기 전에 꿈을 꿨어요. '형량이 너무 적다, 다시 따져봐라' 파기환송되는 꿈이요. 사형을 받았어야 동생 볼 면목이라도 있을 텐데..."

'스포츠센터 막대기 살인 사건' 피해자 유족

"선고 요건이 정해져 있어서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아요. 판결문에도 이유는 다 나와 있어요. 그런데 집행이 없던 26년 동안, 왜 입법은 없었나요?"

'김태현 노원 세 모녀 살인 사건' 피해자 유족

사형제가 세 번째 헌법소원 심판대에 올랐지만, 위헌 여부를 가린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형제가 유지되더라도 선고 요건이 매우 엄격해진 만큼, 실제 선고되는 경우는 갈수록 보기 힘들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세상을 경악하게 만든 살인마에게 사형이 아니라 징역형이 내려질 때마다 국민들이 느끼는 괴리감은 상당하다.

특히 사형 선고가 멀어질수록 피해 유족의 아픔은 더욱 커진다. 한국일보가 만난 유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가해자 출소의 공포, 반복되는 트라우마, 수사와 재판 단계에서 경험하는 소외감 등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견뎌야 했다. 사형제 폐지 여부를 떠나 형벌 체계에 대한 신뢰를 높이려면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고 지적되는 이유다.

"무기징역 받고 가석방돼도 유족들은 몰라"

서울 노원구 한 아파트에서 세 모녀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김태현이 지난 2021년 4월 9일 검찰로 송치되기 위해 서울 도봉경찰서에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노원구 한 아파트에서 세 모녀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김태현이 지난 2021년 4월 9일 검찰로 송치되기 위해 서울 도봉경찰서에서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노원 세 모녀 살인사건'의 가해자 김태현은 지난해 4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확정받았다. 앞서 항소심 재판부가 이례적으로 "가석방 없는 집행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지만, 법적 근거가 없어 유족들은 여전히 두려움과 분노 속에 살고 있다. 피해자의 사촌언니 A씨는 지난달 한국일보와 만나 "가석방이 가능한 무기징역은 응보적 차원에서도 만족할 수 없고, 나중에 모범수로 가석방되면 알 방법이 없지 않느냐"며 "조두순처럼 언론에서 관심을 가지면 다행이지만 결국 복불복"이라고 말했다.

가석방 제도는 수형자들의 '교화와 갱생'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운영된다. 유족들은 그러나 가석방 기준에 강한 의문을 품는다. A씨는 "김태현은 재판 과정에서 범행 후 시체 옆에서 맥주를 마셨다는 보도에 '맥주가 아닌 음료를 마셨다'며 억울해했다"며 "이런 사람에서 어떻게 반성을 기대하느냐"고 반문했다. A씨는 "추가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길 바랄 뿐 살인범에 대한 교화가 누굴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가해자에게 징역 25년이 확정된 '스포츠센터 막대기 살인사건' 피해자의 누나 고금선씨도 원통하긴 마찬가지다. 고씨는 "감옥 생활만 보고 교화됐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라며 "가해자에게 자녀가 있는데, 자기 자식 빨리 보기 위해선 무슨 짓인들 못하겠느냐"고 말했다. 지난달 가해자의 형량이 확정되자, 고씨는 20년 가까이 살던 집을 떠나야 할지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 그는 "동생이 가해자 회사에서 일할 때 가족들 이름이 기재된 등본도 제출했기 때문에 정말 무섭다"며 "아이 학교 때문에 동네를 아예 벗어날 수는 없어 고민이 많다"고 털어놨다.

수사·재판 때는 소외감, 선고 후 트라우마는 방치

직원을 막대기로 살해한 스포츠센터 대표 한모씨가 지난 2021년 1월 7일 서울 서대문경찰서에서 검찰로 구속 송치되고 있다. 뉴스1

직원을 막대기로 살해한 스포츠센터 대표 한모씨가 지난 2021년 1월 7일 서울 서대문경찰서에서 검찰로 구속 송치되고 있다. 뉴스1

수사와 재판 단계에서 느낀 소외감도 형사사법 체계에 대한 유족들의 불신을 키우고 있다. A씨는 "유족이 경찰을 만나려고 하면 가족관계 증명 절차가 너무 복잡했다"며 "김태현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하길래 도저히 납득이 안 가서 '병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겠다'고 한 적도 있다"고 전했다. 고씨도 "동생 사망 추정 시각이 궁금해 부검 감정서를 요청했는데,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진행 중이라 발부가 안 된다'면서 미루더니 지금까지도 못 받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누구도 피해자 편이 아니란 생각이 들면, 트라우마는 오롯이 남겨진 사람들의 몫이 된다. A씨는 "비슷한 사건이 보도될 때마다 우리 사건이 연상되는 수준을 넘어 '그때로 돌아가 있는 나'를 발견한다"고 했다. 세 모녀 살인사건 피해자의 친구였던 B씨 역시 "사건 발생 전에 김태현을 직접 본 적도 있어서, 언니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고 털어놨다.

형량에 대한 불만은 '사적 보복' 감정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고씨는 "심신미약으로 징역 25년이면 나도 술 마시고 가해자를 죽일까 생각한 적도 있다"며 "이런 감정으로 남에게 해를 끼칠까 봐 스스로를 믿지 못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친 마음을 다잡는 일도 오롯이 유족들 몫이다. 고씨는 "열심히 정신과 치료를 받으려고 하지만 비용이 문제"라며 "엄마와 우리 아이만 정부 지원으로 20회씩 상담을 받았고, 아이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있으니 1회당 12만 원짜리 미술 치료를 사비로 계속 받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온 가족이 없던 병을 얻어 병원비로만 매달 수백만 원이 든다는 게 고씨의 설명이었다. 법무부 범죄피해자지원센터는 "피해자가 전문가로부터 심리상담 서비스를 이용해 발생한 실비를 지원한다"고 공지하고 있으나, 고씨는 추가적인 치료비 청구와 관련해 안내받은 바가 없다고 했다.

"입법 없던 26년... 나라도 끝까지 싸울 것"

'김태현 노원 세 모녀 살인사건' 피해자의 사촌언니 A씨와 지인 B씨가 지난달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준규 기자

'김태현 노원 세 모녀 살인사건' 피해자의 사촌언니 A씨와 지인 B씨가 지난달 한국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준규 기자

사형 선고는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유족들은 그러나 사형제 존폐 논쟁이 20년 넘게 이어질 동안 정부는 왜 제대로 된 대안을 제시하지 않았는지 묻고 있다. A씨는 "스토킹처벌법도 비슷한 사건이 수차례 터지고 나서야 생겼다"며 "사형을 선고하는 게 그렇게 어렵다면, 대체 형벌과 피해자 보호 입법은 진작 마련됐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고씨는 "가해자가 가석방이 된다면 적어도 유족들에게 그 이유와 복귀 위치라도 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숙모와 사촌동생 2명이 살해된 지 2년이 지났지만 A씨는 여전히 환영에 시달린다. 집에서 종종 식사를 함께 했던 외숙모는 더 이상 없고, 밥이 남을 때마다 외숙모 생각에 A씨와 유족들은 무너져 내렸다. '기억해봤자 힘만 든다'며 말리는 가족도 있지만, A씨는 "몇 년이 지나도 계속 이 사건을 끄집어내서, 가해자에게 '모두가 널 기억하고 있다'는 두려움이라도 심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스스로 투사가 되기로 결심한 건 고씨도 마찬가지다. 고씨는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준비된 유족은 아무도 없다"며 "합당한 벌을 줄 수도 없고 제도도 바꿀 수 없다면 가해자에게 '내가 싸우고 있다'는 사실이라도 알리고 싶다"고 했다.

◆ 다시 쓰는 사형제 리포트

<1> 죄와 벌, 그리고 59명의 사형수
<2> 사형제 폐지? 논쟁의 끝은
<3> 두 번의 합헌, 세 번째 결론은

이정원 기자
박준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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