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를 잃고 '거짓말 전문가'가 된 소녀

입력
2023.06.02 04: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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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의 첫 장편소설 '눈부신 안부'
유년기 상실, 그 후유증 벗어나는 여정
20여 년 만에 재개한 이모의 첫사랑 찾기
파독간호사 이모들로부터 얻은 치유의 힘

1960~70년대 1만여 명의 한국 간호사·간호조무사들이 독일로 파견 가 외화를 벌어들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60~70년대 1만여 명의 한국 간호사·간호조무사들이 독일로 파견 가 외화를 벌어들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당신과 내가 하루 평균 200회 하는 이것. 하얀 것도 빨간 것도 있다. 바로 거짓말 얘기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의 한 연구진에 따르면 사람은 사소하고 의례적인, 그리고 상대를 배려하기 위한 착한 거짓말을 포함해 평균 8분에 한 번은 거짓을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착한 거짓말은 정말 누구에게도 해가 되지 않는 걸까.

백수린(41)의 신간 '눈부신 안부'는 열한 살에 가스폭발 사고로 언니를 잃은 후 자칭 거짓말 전문가가 된 주인공의 이야기다. 소중한 존재를 지키고 싶어 한 거짓말. 하지만 이는 타인 또 나 자신과의 사이에 소통의 장벽을 쌓는 벽돌이 된다. 이 장벽은 주인공을 "가까워지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일정 거리 안으로는 들이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한다. 소설은 주인공이 어른이 된 후 스스로의 힘으로 그 상실의 후유증에서 점차 벗어나는 과정을 차분하게 좇는다. 2011년 데뷔 후 섬세한 문장으로 문단의 호평을 받고 있는 작가의 첫 장편소설이다.

마흔 살의 '이해미'가 대학 동창 '우재'와 우연히 재회하며 소설은 시작한다. 문학 동아리 활동을 했던 때를 돌아보다 해미는 잊었던 일화를 듣는다. 자신이 우재에게 이모 이야기를 쓰고 싶다고 말했다는 것. 어린 시절 2년간 독일에 살면서 만난 엄마의 친언니인 '행자 이모'와 모두 '이모'로 불렀던 파독간호사 친구들이 주인공들이다. 우재의 이야기가 방아쇠가 돼 해미는 이모들과의 기억을 다시 삶의 중심으로 끌어온다. 이모들과 얽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방식으로 서사가 진행된다.

백수린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백수린 작가.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모들은 해미가 스스로를 치유할 힘을 키우게 하는 인물들이다. 그중 행자 이모는 어린 해미의 착한 거짓말을 꿰뚫어 본 유일한 어른. 해미의 거짓말은 언니가 떠난 후 조금씩 늘어 독일에 와서는 더 늘어났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열세 살 해미는 버텨내야 했다. 그래서 엄마에겐 친구를 사귀었다고, 부산에 남은 아빠에게 엄마가 아빠를 그리워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거짓말들은 어린 해미를 다치게 했다. 그 아픔을 읽어 준 사람은 행자 이모였다. 그런 보살핌 덕에 해미는 조금씩 회복한다. 죄책감이 느껴지는 행복감을 느끼며 마음속으로 세상을 떠난 언니에게 이렇게 말을 걸면서.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그런가 하면 '선자 이모'는 현재의 해미를 틀 밖으로 끌어낸 사람이다. 서사의 한 축은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다. 친구 '한수'가 뇌종양 진단을 받은 엄마(선자 이모)를 기쁘게 해 주려 시작한 일에 해미와 레나가 함께 했던 게 20년 전이다. 선자 이모는 떠났지만 그 세월 동안 마음 한편에 빚처럼 남았던 일을 해미는 다시 시작한다. 어려서 알지 못했던 이모의 일기장 속 단서들을 발견하면서 이모의 첫사랑 K.H.에 한 걸음씩 다가간다. 그러는 동안 자기 자신의 삶에도 진솔해진다. "적어도 나는 더 이상 나의 삶을 방치하지는 않"게 하는 힘을 일기장 속 이모에게서 얻는다. 그 힘은 서로 호감이 있었지만 친구 이상 되지 못했던 우재와의 관계를 바꿔나갈 용기로 표현된다.

눈부신 안부·백수린 지음·문학동네 발행·316쪽·1만6,000원

눈부신 안부·백수린 지음·문학동네 발행·316쪽·1만6,000원

소설 속 이모들은 매력적이다. 희생, 애국심, 산업역군. 가난한 조국이 그런 단어로 규정한 전형적인 파독간호사가 아니다. 자유로운 세상을 찾아 간, 간호사란 소명을 갖고 일했던 직업인들, 본국 강제송환에 반대하는 운동을 통해 체류권을 확보하고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앞장서 알린 시민들이다. 그 눈부신 삶의 여정이 작품 곳곳에서 드러난다. 파독간호사 일화에 영감을 얻은 작가의 노력이 엿보인다.

"나는 내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랐으니까.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는 한 내가 겪은 무수한 실패와 좌절마저도 온전한 나의 것이니까." 병상에서 K.H.(어쩌면 해미일 수도 있다)에게 쓴 선자 이모의 편지야말로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일지 모른다. 그러니 완벽하지 못해도 또 걸어가라고. 온전한 나의 삶을 향해서. 선자 이모가 좋아했던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구절처럼. "아무것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될 수 있어."

진달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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