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서 ‘50만 명 참가’ 최대 규모 반정부 시위... 바웬사도 나섰다

입력
2023.06.05 17:30
12면
구독

러시아 영향 공직자 퇴출 법안 등
집권당 '극우 정책'에 반발 거세져
공산정권 붕괴 후 '최대 정치 집회'

4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시민들이 정부를 비판하는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반정부 시위를 하고 있다. 바르샤바=AFP 연합뉴스

4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시민들이 정부를 비판하는 현수막과 피켓을 들고 반정부 시위를 하고 있다. 바르샤바=AFP 연합뉴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50만 명이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1989년 공산주의 정권 붕괴 이후 최대 규모의 정치 집회였다. 이른바 ‘러시아 영향 공직자 퇴출 법안’이 시위의 도화선이 됐는데, 야권에선 러시아의 간섭을 핑계 삼아 정적을 탄압하려는 악법이라며 비판을 쏟아냈다. 특히 폴란드 민주화의 상징적 인물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레흐 바웬사 전 대통령도 참가해 힘을 보탰다.

"반러시아 정서 등에 업고 야권 탄압"

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스와 AP통신 등은 이날 폴란드 야권과 지지 세력 등 50만 명(바르샤바 시청 추산)이 오는 10월 총선을 앞두고 반정부 시위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폴란드 여당인 법과정의당(PiS)은 우파 성향 민족주의 정당으로, 2015년 집권 후 △사법개혁 △임신중지(낙태) 전면 금지 △성소수자 차별 등 극우적 정책에 이어 최근 러시아의 직·간접적 영향을 받은 공직자를 최장 10년간 퇴출하는 법안을 내놨다. 반러시아 정서를 등에 업은 법안이지만, 제1야당 시민강령당(PO) 등 야권에선 PO 대표인 도날트 투스크 전 총리 등 정치적 반대파를 겨냥했다고 본다. 미국과 유럽연합(EU)도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법안’이라며 경고해 왔다.

안팎의 비판이 거세지자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은 지난 2일 법안의 긴급 수정을 제안하며 한발 물러섰으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1989년 6월 4일 부분적으로나마 첫 자유선거가 치러진 것을 기념하며 열린 이날 시위에서 투스크 전 총리는 “공산정권 붕괴 이후 최대 규모 정치 집회”라며 “우리는 이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여기에 모였다”고 말했다.

34년 전 해당 선거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둔 자유노조를 이끌었던 바웬사 전 대통령도 시위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폴란드 민주정권 출범의 일등공신인 그는 1990년대 후반 정계 은퇴 후 정치와 거리를 뒀지만, PiS 집권으로 우경화 움직임이 갈수록 또렷해지자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4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 도중 시민강령당(PO) 대표 도날트 투스크(오른쪽) 전 총리와 레흐 바웬사 전 대통령이 맞잡은 손을 들어 보이며 시위대에 인사하고 있다. 이날 두 사람은 현 정부의 민주주의 훼손을 비판했다. 바르샤바=AP 연합뉴스

4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 도중 시민강령당(PO) 대표 도날트 투스크(오른쪽) 전 총리와 레흐 바웬사 전 대통령이 맞잡은 손을 들어 보이며 시위대에 인사하고 있다. 이날 두 사람은 현 정부의 민주주의 훼손을 비판했다. 바르샤바=AP 연합뉴스


여야 모두 단독정부 힘들어… 반정부 시위에 '촉각'

이날 시위에선 문제의 법안뿐 아니라, 여당의 극우적 정책에 반발하는 구호도 울려 퍼졌다. 영국 BBC방송은 인플레이션에 따른 생활고, 여성·성소수자 권리 침해 등 다양한 사안이 시위 배경이 됐다고 짚었다. 대학생 주잔나(20)는 낙태 수술이 거부돼 숨진 여성을 추모하며 “나는 폴란드를 사랑하지만, 여당이 재집권하면 이 나라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위는 대부분 평화롭게 진행됐으나, 대통령궁을 향해 “투옥하라”고 외치는 분노도 표출됐다.

폴란드 여권은 10월 총선을 앞두고 열린 이번 시위를 잔뜩 경계하는 모습이다. PO가 주축인 야권의 세몰이 시위로 보는 것이다. 여당 PiS는 “증오의 행진”이라고 표현했다.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총리는 “정치권의 늙은 여우들이 반정부 시위를 조직하고 시민 시위라고 한다. 서커스 같다”고 깎아내렸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 여야 모두 단독 정부 구성이 가능한 과반 득표는 힘들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향후 반정부 시위가 표심을 좌우할 중대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날 시위의 ‘참가 인원’을 두고도 양측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폴란드 국영방송 TVP는 “경찰 내부자료에 따르면 참석 인원은 10만~15만 명”이라며 투스크 전 총리가 숫자를 부풀렸다고 비판했다. 시위대가 욕설을 내뱉고 TVP 기자를 공격했다는 내용도 집중 보도했다. 반면 폴란드 최대 일간지 가제타비보르차는 “집권당의 나팔수 언론은 바르샤바에서 ‘폭력 행진’이 일어났다고 선동한다”며 50만 명의 총의를 정부가 받들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혼잎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