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독재 맞서 고문·구금당한 피해자들에 "국가가 31억 배상" 판결

입력
2023.06.08 16:25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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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유신독재 첫 비판 전남대 '함성지 사건'
김남주 시인 등 피해 당사자와 가족 42명 피해
재판부 "영장 없이 강제 연행 자백… 불법 수사"
피해자 이강씨 "다른 희생자 복권 계기 마련되길"

고 김남주 시인. 전남대 제공

고 김남주 시인. 전남대 제공

유신독재를 비판하다 불법 구금·고문당한 '함성지 사건' 당사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승소했다.

광주지법 제14민사부(부장 나경)는 8일 고(故) 김남주 시인 가족 등 42명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경찰이 자행한 불법수사를 인정하고, 정부가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총 31억 원을 지급하라고 주문했다.

재판부는 "이들은 경찰관들에 의해 영장 없이 강제 연행돼 불법 구금된 상태로 고문과 가혹행위를 당해 공소사실 등에 대해 자백한 것으로 보인다"며 "정부 소속 공무원들이 범죄수사와 처벌이란 외관만 갖추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는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이기에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입은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이들은 1972년 10월 비상 계엄령 발령 직후, 전국에서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 유신체제 비판 내용이 담긴 유인물을 배포한 '함성지 사건' 당사자들이다.

1972년 10·17 비상조치가 내려지자 이강씨 등은 같은 해 12월 9일 전남대 개학 시기에 맞춰 "대통령 박정희는 종신집권 야망에 국민의 눈과 귀에 총부리를 겨눴으며, 한국적 민주주의란 가면을 쓰고 국민의 고혈을 강취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함성지' 유인물 250여 장을 전남대 등에 배포했다. 전국 최초의 반유신 유인물이었다.

이들은 이듬해 3월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긴 '고발지'라는 이름의 유인물 500여 장을 배포하려 했지만 수사기관에 의해 체포됐다. 이후 한 달간 고문을 당한 뒤 반국가단체 구성 예비음모죄로 기소됐다. 이들은 짧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길게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2014년 재심을 청구했고, 광주고법은 2021년 5월 정부의 불법 체포·감금, 임의성 없는 자술서 및 증거 수집을 인정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강씨는 "한 시대의 가치관이 다른 가치관으로 전환되기까지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며 "함성지 사건 이후 경찰이 주변 사람들을 못살게 구는 통에 고향마을에서 쫓겨나듯 도망쳐 지금까지 돌아가지 못했고 70세가 넘도록 평생 변변찮은 직장도 가질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도 여순사건 피해자 등 국가권력에 의한 수많은 희생자들이 여전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다"며 "다른 희생자들 역시 복권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광주= 김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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