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계국이 필 무렵 밀려드는 슬픔·분노

입력
2023.06.09 22:00
23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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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이었을까? 그리 머지않은 오래전, 샛노란 금계국이 한창인 산책길에서 천국에도 금계국이 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서 남동생이 운명을 달리했다. 그 때문인지 금계국을 보면 언제나 남동생이 생각난다. 남동생은 뇌종양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고 7년간 투병을 하다가 운명을 달리했다. 병상에서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도 못한 상태로 한참을 있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예정된 순서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남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남동생을 대신할 그 무엇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남동생의 무덤이나 납골당이 없을 것이란 생각을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없다. 순전히 남동생의 아내였던 사람 탓이다. 남동생이 사망하자 올케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수련원에 수목장이 있다며 남동생의 장례를 그곳에서 치르자고 했고, 남동생을 끔찍이 아꼈던 아버지는 남동생을 가장 오랫동안 찾을 이들이 그의 가족일 것이라며 그것을 허락했다. 올케를 비롯한 그 교회의 신도들은 장례가 치러지는 때부터 화장터 그리고 수목장 장소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수목장에 대해 꾸준히 언급했다. 참으로 과도한 친절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화장터에서 버스의 운전기사가 버스에 붙어 있던 장례 표식의 패널을 떼어냈다. 그리고 수목장에 대한 동네의 님비현상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이상했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철저하게 의심했어야 했다. 막상 우리가 도착한 곳은 수목장을 치르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주 커다란 비석에 소망의 동산이라고 글자가 쓰인 곳이 있는데, 그곳에 유골을 버리는(?) 구멍이 있었다. 당황한 나는 장례를 담당한 집안의 장손 오빠에게 이것은 아니지 않냐고 얘기했지만, 오빠는 이곳까지 왔으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했다. 아마 오빠도 경황이 없었을 것이다. 장례가 치러지는 곳에 한 번쯤 가봤어야 했던 것인데, 왜 그 절차를 무시했을까? 이유는 자신의 남편 장례만큼은 함부로 하지 않을 것이란 우리의 정서였을 것이다.

남동생의 장례식은 그렇게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분노스러웠다. 장례식이 끝나고 변호사에게 문의했지만, 남동생의 장례 책임은 전적으로 올케의 몫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불교 신자도 아닌 내가 남동생의 49재와 천도재를 지낸 것은 그 충격이 몹시 컸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동생의 영면을 위한 것인지, 나의 평안을 위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곳은 군청에도 허락받지 않은 불법 시설물이었다. 그래서 사이비 종교가 무섭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종교의 역할이 인간에 대한 위로에 있다고 여겼고, 올케의 종교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무척이나 어리석은 판단이었다. 나는 사이비 종교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거짓말을 숨 쉬듯이 하며 그것을 정당성으로 포장한다는 것을 그렇게 깨닫게 되었다. 올케였던 사람은 남동생의 장례를 치른 후, 부모님의 연락을 일절 받지 않는 것으로 우리 가족과의 연을 끊었다.

다시 금계국이 한창인 계절이다. 다음 주면 남동생 5주기를 맞게 된다. 다시 엄마의 애간장이 끊어지는 울음소리가 온 집 안을 가득 메울 것이다. 그런데 아들을 잃은, 동생을 잃은 남다른 슬픔을 왜 우리 가족이 져야만 하는 것인지, 그 책임을 왜 물을 수 없는 것인지 여전히 의문스럽다.


윤복실 서강대 미디어융합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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