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와 김정은 티셔츠라는 ‘유머’

트럼프와 김정은 티셔츠라는 ‘유머’

입력
2023.09.04 17: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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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머그샷이 들어간 티셔츠와 모자가 지난달 2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한 인쇄소에서 제작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로이터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머그샷이 들어간 티셔츠와 모자가 지난달 26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한 인쇄소에서 제작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로이터 연합뉴스


이틀 만에 ‘사진 한 장’으로 100억 원을 벌었다. 미국 역사상 최초로 머그샷을 찍은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이 수지맞는 장사의 주인공이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입을 꾹 다문 채 카메라를 반항적으로 노려보는 그의 머그샷이 인쇄된 티셔츠와 모자, 머그잔 등은 말 그대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이런 굿즈에는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NEVER SURRENDER)’는 일종의 슬로건도 따라붙었다. 외신에서는 머그샷 촬영 당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넥타이 색에서부터 표정과 시선, 각도 등을 나노 단위로 분석하며 열광했다.

비슷한 시기, 트럼프 전 대통령과 한때 ‘절친’ 사이였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얼굴이 인쇄된 티셔츠가 한국 사회에서도 화제가 됐다. 해당 티셔츠에는 김 위원장의 웃는 얼굴과 함께 “동무 꽃길만 걸으라우”라는 북한 말씨가 적혔다. 지난달 공권력감시센터 등 6개 단체는 김 위원장의 티셔츠가 국가보안법 제7조 제5항에 해당하는 이적 표현물이라면서 판매자와 네이버, 쿠팡을 경찰에 고발했다. 이들 단체는 고발장에서 “이 티셔츠는 김정은에 대한 친밀함 증진을 넘어 반국가단체의 수괴를 찬양, 선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두 절친의 티셔츠에는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책 ‘싸구려의 힘’을 쓴 미국 럿거스대 캠던캠퍼스의 역사학 교수 웬디 A. 월러슨은 뉴욕타임스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머그샷 굿즈에 대해 “이는 (머그샷을) ‘길들여’ 상품으로 제작, 안전하게 만든다”라고 짚었다. 그의 대선 불복이라는 헌법을 흔든 국가적 중범죄로 인한 불안을 ‘유머 상품’으로 소비하면서 억누른다는 설명이다. 이는 김 위원장의 티셔츠도 비슷하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북한 김씨 일가는 한국 사회에서 우스갯거리가 됐지만, 동시에 그들의 독재나 인권유린에 대한 경각심도 흐려졌다.

두 티셔츠 사이에는 미국과 한반도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작지 않은 차이도 존재한다. 적극적으로 굿즈팔이에 나선 트럼프 전 대통령과 달리 김 위원장이 자신의 티셔츠 판매에 어떤 식으로든 역할을 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김정은 티셔츠의 판매 목적 역시 북한 체제에 대한 찬양·선전보다는 조롱이나 풍자에 가까웠다. 실제로 국가정보원이 판매자를 조사한 결과 국가보안법 위반 사항은 적발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서울경찰청 안보수사대는 최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판매자와 쿠팡, 네이버를 입건해 수사하기 시작했다.

온 사회가 갑작스러운 이념 과잉에 몸살을 앓는다. 육군사관학교에 흉상을 설치해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인물이 한순간에 공산당원이라는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고, 유머 티셔츠의 판매자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입건됐다. 분단국가인 한국에서 경계는 늘 해야 마땅하지만, 누가 봐도 ‘예능’인 티셔츠마저 다큐멘터리로 받는 건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방증이다. 또 무언가에 대한 주목이 대상에 화제성과 권위를 준다는 점에 비춰보면, 이 티셔츠를 둘러싼 소란이 더욱 아쉽다. 그간 김정은 티셔츠의 판매량은 200장에 불과했다. 내버려뒀어도 곧 고사할 운명이었다는 얘기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 북한을 유머로 소비하게 된 배경에는 한국이 명백히 앞서나가고 있다는 건강한 자신감이 있다. 더 이상 체제 경쟁의 대상조차 되지 못하는 북한, 또 공산주의라는 유령에 집착하는 행위야말로 ‘시대착오적 투쟁과 사기적 이념’일 테다.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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