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혼돈·재앙"… 120년 만의 규모 6.8 지진에 시골 흙집 '와르르'

"완전한 혼돈·재앙"… 120년 만의 규모 6.8 지진에 시골 흙집 '와르르'

입력
2023.09.10 21:00
수정
2023.09.11 15:44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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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지진 안전지대'에 이례적 강진 덮친 탓
내진설계 안 된 흙집 도시, 한밤 재앙에 속수무책
"더딘 구조작업에 여진 가능성… 피해 더 커질 듯"

규모 6.8 지진이 휩쓸고 간 모로코 남서부 도시 마라케시 구시가지의 무너진 건물 앞에서 9일 한 여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마라케시=AFP 연합뉴스

"완전한 혼돈, 진정한 재앙, 광기였습니다."

8일 밤 11시 11분(현지시간), 규모 6.8 지진이 아프리카 모로코의 남서부 도시 마라케시를 강타한 순간을 주민 미카엘 비제(43)는 이렇게 표현했다. 잠자리에 들었던 그는 격렬한 진동에 눈을 번쩍 떴다. 비제는 AFP통신에 "침대가 날아가는 줄 알았다. 반쯤 벗은 채 거리로 뛰쳐나갔다"고 했다. 눈앞에는 말 그대로 '재앙'이 펼쳐져 있었다.

"테러 공격인 줄… 눈앞에서 이웃 죽어가"

9일 외신들이 전한 생존자들의 목격담은 혼란과 공포, 그 자체였다. "발치에서 흔들리던 건물이 무너져 내리고, 건물 잔해 사이엔 주검이 널려 있었다"는 증언이 쏟아졌다. 마라케시에서 휴가를 보내던 영국인 아자 레머는 "숙소로 돌아오던 중에 폭발음이 들려 처음엔 테러 공격인 줄 알았다"며 "땅이 흔들리고, 눈앞에서 돌이 떨어져 내리는 걸 보고 지진이 났다는 걸 알았다"고 영국 BBC방송에 말했다. 레머는 "몇 초 전 지나왔던 집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급박했던 상황을 전했다.

가족과 광장으로 무사히 대피한 마라케시의 식료품상 아지즈 타키(40)에게도 악몽 같은 밤이었다. 타키는 "긴 밤을 나기 위해 필요한 담요를 가지러 다시 동네로 돌아갔을 때 엄마와 어린 아들, 건물에서 뛰어내린 남자 등 8명이 죽어 있는 것을 봤다"고 미국 워싱턴포스트에 말했다. 그는 "당신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한때 이웃이자 친구였다고 상상해 보라"며 애통해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30만 명 이상이 지진 피해를 당한 것으로 추산했다. 지진 발생 이틀 만에 사망자는 벌써 2,000명을 넘어섰다. 건물 잔해 더미에 깔린 채 구조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도 셀 수 없을 정도다.

9일 모로코 마라케시 외곽 물라이브라힘 마을 주민들이 무너진 건물 잔해가 쌓여 있는 골목길을 지나고 있다. 물라이브라힘=AP 연합뉴스


120년 만의 '규모 6' 이상 강진… "지진 대비 안 돼"

미국 지질조사국(USGS)에 따르면 이번 지진은 마라케시에서 남서쪽으로 72㎞ 떨어진 하이 아틀라스 산맥에서 발생했다. 이곳으로부터 반경 500㎞ 안에서 발생한 규모 6.0 이상의 지진은 1900년 이후 처음이다. 모로코와 동쪽 국경을 접한 알제리는 물론, 지브롤터해협 건너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도 진동이 감지됐다. 진원 깊이도 26㎞로 얕아 파괴력이 컸다.

120년 만의 강진이 덮친 이 지역은 지진대에서는 비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라센 하다드 모로코 상원의원은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지역이 아니다"라고 아랍권 매체 알자지라방송에 말했다. 크리스 엘더스 호주 커틴대학 지질학자는 "대부분 지진은 훨씬 더 북쪽인 지중해 연안에서 발생해 왔다"고 설명했다. 2004년 최소 628명의 생명을 앗아간 지진도 모로코 동북부 알호세이마에서 발생했다. 이번 지진의 진원과는 약 800㎞ 떨어져 있다. 모로코에서 지진이 났던 곳은 주로 아프리카판과 유라시아판 사이에 위치한 북부 지역이었다.

결국 비교적 지진 안전지대로 여겨졌던 남서부 지역을 이례적 규모의 강진이 덮치면서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진 대비가 소홀했던 터라, '예견된 참사'라는 지적도 나온다. USGS는 "이 지역에서 이 정도 규모의 지진은 흔하지 않다"면서도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9일 모로코 아스니 지역의 한 주택 벽이 지진으로 와르르 무너져 내려 있다. 아스니=로이터 연합뉴스


지진에 취약한 시골 흙집 '와르르'

특히 주민 대다수가 지진에 매우 취약한 오래된 건물에 거주한 탓에 피해가 더 커졌다.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피해는 농촌 지역에 집중됐는데, 대다수는 모로코 전통 방식인 진흙 벽돌로 지은 집에 거주하고 있었다. 모로코 북부 도시 카사블랑카의 건축가 아나스 아마지르는 "이 나라의 건물 상태를 감안할 때 이번 인명 피해는 예상됐던 것"이라고 짚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역사적 도시 마라케시의 구시가지가 직격탄을 맞은 것도 같은 이유다. 내진 설계가 돼 있지 않은 오래된 건물의 돌과 진흙이 단숨에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진원지가 구조대 접근이 어려운 산간 지역인 것도 희생자를 대거 낳은 요인이다. 큰 피해를 본 시골 마을 대부분이 험준한 산악에 위치해 있고, 이곳으로 통하는 소수의 도로마저 무너진 건물 잔해로 막혀 있어 조기 구조 작업이 애를 먹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이들 지역은 통신과 전기도 끊긴 상태다. 많은 사람이 잠든 한밤중에 지진이 일어난 탓에 대피가 늦어진 것도 막대한 피해를 불렀다.

여진 피해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미 첫날 지진 발생 19분 만에 규모 4.9의 여진이, 이틀 뒤인 10일 오전 9시에도 규모 4.5 여진이 각각 일어났다. 빌 맥과이어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지구물리학 명예교수는 "파괴적 지진이 드문 곳에서는 강한 지반 흔들림에 대처할 수 있을 만큼 견고하게 지어지지 않은 많은 건물이 붕괴해 사상자도 많아진다"며 "강진에 따른 여진 발생 가능성이 높아 추가 인명피해는 물론, 수색 및 구조 작업도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권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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