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전 이주 설화로 돌아보는 우리...'백년 여행기'

백년 전 이주 설화로 돌아보는 우리...'백년 여행기'

입력
2023.11.27 04:3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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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CA 현대차 시리즈 작가 정연두
멕시코 이주부터 한국 이민자 뿌리 조망
12m 벽으로 디아스포라 근원 표현

전시에 등장한 정연두 작가의 '날의 벽'(2023).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전시에 등장한 정연두 작가의 '날의 벽'(2023).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MMCA) 서울관에는 유독 관람객들의 발길이 오래 머무는 곳이 있었다. 무려 12m 높이의 설치작 '날의 벽' 앞이다. 색깔이 갈색인 점만 빼면, 마치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벽에 다가선 관람객은 어린 시절 놀이 '뽑기'를 떠올리게 하는 설탕 조각을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실제 설탕을 녹이고 실리콘 틀에 부어 하루 1~2개씩 만들어냈다는 설탕 오브제에는 호미, 낫, 가래를 닮은 세계 각국의 농기구 모양이 새겨져있다.

현대자동차와 국립현대미술관이 후원하는 올해 'MMCA 현대차 시리즈' 선정작가인 정연두(54)의 대규모 개인전 '백년 여행기'의 한 장면이다. 그간 국내외에서 전쟁, 재난, 이주, 국가 등 거시사를 개인적 서사나 신화, 설화 등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해온 정 작가는 이번에는 1905년 영국 상선을 타고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40일의 항해 끝에 멕시코 유카탄주 수도 메리다에 도착한 천여 명의 한인과 그 후손들의 대서사를 조망했다. '디아스포라(diaspora)'와 농업의 역사가 설탕의 정치학 측면에서 표현한 달콤한 설탕 벽에 녹아있는 것도 실은 쓰디쓴 이산(離散)의 삶이다.

전시에는 '날의 벽'을 포함해 '백년 여행기', '상상곡', '세대 초상', '프롤로그' 등 다섯 작품이 등장한다. 예술적 상상력의 모티브는 백 년에 한 번씩 꽃이 핀다고 해 이름 붙여진 '백년초'. 작가에 따르면 200년 전 멕시코의 노팔 선인장이 난류를 타고 바다를 건너 제주에 뿌리를 내렸고, 그것이 조선에 백년초로 알려졌다는 것이 백년초의 설화다. 작가는 이 구전 설화에서 착안해 구로시오 해류를 타고 제주에 자리 잡은 멕시코의 노팔 선인장을 탐색하다, 멕시코에서 뿌리내렸던 한인 이주민의 척박한 삶을 끌어와 백년초와의 공통점을 찾는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정연두 작가의 '백년 여행기'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정연두 작가의 '백년 여행기' 전시 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시작점인 '세대 초상'은 작가가 2년 동안 세 번에 걸쳐 취재한 10대부터 90대까지, 6쌍의 한인 가족이 서로 마주 보는 형식의 영상이 이어지며 개인의 인생을 보여준다. 연결되는 '백년 여행기'는 전시의 주제작으로, 선인장 등 열대 식물 오브제가 있는 널찍한 공간에 앉아 거대한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재미 사학자 이자경의 '한국인 멕시코 여행사'(1998)와 황성신문 이민자 모집광고, 멕시코의 독립운동가 황보영주의 시 '나의 길'에 현재 멕시코 선인장 공장 모습을 덧붙여 다큐멘터리 한 편을 만들었다. 미술관 속 열린 공간인 서울박스의 스피커에서는 헝가리어, 아랍어, 스페인어 등 낯선 언어가 흘러나오는데 6개 국가에서 한국으로 온 외국인들이 읊조리는 모국어다. 이질적인 다종 다성의 목소리에서 백 년 전 멕시코에 도착한 한인 이주민이 겪었을 낯선 감각이 느껴지는 듯하다. 한 공간에 공명하는 혼성의 문화와 역사를 보여줌으로써 낯선 땅의 감각을 생생하게 각인시키는 작가의 특기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작품 수는 적지만 하나하나가 주는 몰입도가 작지 않다. 한없이 무거운 주제지만 각 서사의 흐름이 설치 미술, 조각과 사운드 등 복합 매체를 통해 어둡지 않게 묶이는 것이 무엇보다 매력적이다. 한국 판소리와 멕시코 전통공연 마리아치, 일본의 기다유(분라쿠) 공연이 서로 주고받듯 번갈아 이어지는 영상 작품은 그 백미라 할 수 있겠다. 전 세계에 흩어진 민족들의 희비극이 묘하게 중첩되며 하나의 즐거운 운율로 느껴지는데 "역사의 무게가 느껴지면서도 흥미로운 작품들을 만들고자 했다"는 작가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MMCA 현대차 시리즈'는 2014년부터 매년 국내 중진 작가 1인(팀)을 지원하는 연례전이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업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중진 작가를 선정해 작품활동과 전시를 지원한다. 전시는 내년 2월 25일까지.

정연두 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정연두 작가.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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