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평가작 깜짝 강세, 기존 고가작 약세...미술 경매시장도 불경기 반영

저평가작 깜짝 강세, 기존 고가작 약세...미술 경매시장도 불경기 반영

입력
2023.11.29 19:27
수정
2023.11.30 18:46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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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 홍콩 경매, 박서보 팔렸지만 낮은 추정가
정상화, 최고추정가 넘겨... 중화권 인기작가 산유 1위

홍콩컨벤션센터(HKCEC)에서 28일 열린 20·21세기 미술 이브닝 경매 현장에서 경매사가 일본 현대미술 작가인 나라 요시토모의 작품 경매를 진행하고 있다. 완차이(홍콩)=최주연 기자 juicy@hankooilbo.com

“현재 4,200만, 4,200만, A(전화 응찰대리인)에게 4,200만, 4,200만 유지, 온라인! 현장경매! 4,200만 초과 없나요? 팝니다! 4,200만, 마지막 기회, 경매장의 B(응찰대리인)! 온라인! 제 오른쪽 (그림). A, 당신에게 가고 있어요. 4,200, 4,200만 홍콩달러(HKD), 팔렸습니다.”

지난 28일 홍콩 완차이구 홍콩컨벤션센터(HKCEC)에서 열린 경매회사 크리스티의 20·21세기 미술 이브닝 경매 현장. 이날 미술시장의 ‘스테디셀러’인 일본 팝아트 작가 나라 요시토모의 회화 ‘나쁜 이발사(Bad Barber)'가 팔리는 데 약 1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날 상황은 한마디로 퉁명스러워 보이는 ‘나쁜 이발사’의 표정 같았다. 이 작품의 세금을 포함한 실제 판매가는 5,119만5,000HKD(약 84억 원)였지만, 경매 현장 낙찰가는 최대추정가(8,500만 HKD)의 절반도 못 미쳤던 것이다. 경매사는 입찰에 참여한 응찰대리인 2명, 현장 응찰자, 온라인 응찰자를 수차례 부르며 호가를 재촉했지만 별다른 경합이 없자, 결국 낙찰봉을 두드려야 했다.

나라를 비롯해 기존 미술시장에서 고가 거래가 활발한 이른바 블루칩도 대거 약세를 보였다. 고금리, 전쟁 등에 따른 불경기의 영향을 그대로 드러낸 셈이다. 특히 29일 20·21세기 미술 데이 경매까지 포함해 국내에서 '거장'으로 손꼽히는 작가들의 출품작 7개 중 3개(이우환 ‘점으로부터’· ‘조응(Correspondance)’, 고 김창열 ‘물방울’)가 유찰돼 충격을 줬다. 고 박서보 화백의 연작 가운데 하나인 ‘묘법 No. 060503(Ecriture No. 060503)’은 264만6,000HKD에 낙찰됐지만 추정가(200만~400만 HKD) 범위 중 낮은 가격에 팔렸다. 다만 28일 이브닝 경매에서는 정상화 화백의 ‘무제’가 최고추정가(180만 HKD)를 훌쩍 넘는 가격(302만4,000HKD)에 판매돼 한국 미술계의 자존심을 세웠다. 패턴감과 함께 깊이감과 확장성이 느껴지는 추상화다.

로널드 벤투라, 무제, 2014. 크리스티 코리아 제공

반면 잠재력에 비해 작품가가 저평가돼 성장가능성이 큰, 이른바 옐로칩은 기존보다 고가에 거래됐다. 이날 필리핀 출신 현대미술 작가인 로널드 벤투라(50)의 ‘무제’는 응찰대리인 간의 경합 끝에 최저추정가(90만 HKD)의 4배, 최고추정가(180만 HKD)의 2배가 넘는 378만 HKD(약 6억2,700만 원·세금 포함)에 판매됐다. 이번 경매에 흑백 작품으로 출품된 그의 회화는 시공간과 동서양을 넘나드는 여러 이미지를 동시에 표현했다.

순이티안, 세계에서 7센티미터 위(Seven Centimeters above the World), 2019. 크리스티 코리아 제공

포스트 밀레니엄 이브닝 경매에 나온 중국 작가 순이티안(孫一鈿·32)의 굽이 높은 빨간 구두를 신은 여성의 발목을 연상시키는 그림인 ‘세계에서 7센티미터 위(Seven Centimeters above the World)’도 추정가 범위(58만~66만 HKD)를 훌쩍 뛰어넘는 107만1,000HKD(약 1억7,700만 원)에 낙찰자의 손에 넘어갔다.

산유, 태피스트리의 누드(Femme nue sur un tapis), 1929. 크리스티 코리아 제공

중국 현대미술 작가로 중화권에서 특히 인기가 높은 산유(常玉)의 회화 ‘태피스트리의 누드(Femme nue sur un tapis)’도 아시아 미술시장에서 보기 드문 가격인 300억 원대에 팔려 관심을 모았다. 최고추정가(1억5,000만 HKD)를 뛰어넘은 1억8,737만5,000HKD(약 311억 원)에 낙찰돼 이날 이브닝 경매 최고가를 기록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 ‘야수파’ 화가 앙리 마티스(1869~1954)의 영향이 느껴지지만, 동양의 선을 나타내고 있다. ‘십장생’인 학, 거북이 이미지까지 넣어 동서양의 이미지를 절충한 형태다. 이날 그의 작품은 응찰대리인과의 경합 끝에 현장응찰자의 손에 넘어갔다. 스테디셀러인 구사마 야요이의 '꽃(Flower)'이 7,812만5,000HKD(약 129억 원)로 최고가 낙찰의 뒤를 이었다.

이날 홍콩 경매 상황은 시장이 얼어붙자 기존 거래가 활발했던 ‘블루칩’을 사들이기는 부담스럽지만, 저평가된 작품을 사들여 시장상황 개선을 기대하는 수집가의 심리가 나타난 것으로 풀이된다. 미술시장의 다양성이 확대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거래가 활발했던 스테디셀러 상당수가 예전처럼 팔리지는 않았지만, 28일 미술 이브닝 경매는 평균 낙찰률 88%, 판매 총액은 8억1,223만3,800HKD(약 1,344억 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하반기(8억1,783만9,000HKD)와 비슷한 수준을 나타낸 것이다.

다만 시장 규모가 큰 중국시장보다 불황에 취약한 한국 미술시장 특성도 드러났다. 한국에서 현장경매를 열지 않으며, 아시아권에서는 홍콩에서 상·하반기에 연 2회 여는 크리스티 경매의 국내작 낙찰자는 상당수가 한국인인데 이들이 지갑을 닫은 여파로 보인다. 이학준 크리스티 코리아 대표는 “‘큰 배는 거친 파도에도 쉽게 요동치지 않는다’고 한다. 아시아 시장에 아직도 여러 걱정이 많지만 시장 규모가 커 견고한 시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 경매 결과가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다만 시장 규모가 비교적 작은 한국시장은 외부충격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홍콩컨벤션센터(HKCEC)에서 28일 열린 20·21세기 미술 이브닝 경매 현장에서 경매사가 경매를 진행하고 있다. 완차이(홍콩)=최주연 기자 juicy@hankooilbo.com


완차이(홍콩)= 김청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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