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다, 대한민국!"

"장하다, 대한민국!"

입력
2023.11.30 22:00
26면

탁자 위의 메모. 편성준 작가 제공

가방이나 지갑을 아무 데나 흘리고 다니는 나의 '분실능력'은 유명하다. 오죽하면 "비 오는 날 우산을 택시 안에 두고 내리는 사람은 우리 남편밖에 없을 거야"라며 아내가 한숨을 내쉬었을까. 사실 나도 이해하기 힘들다. 택시 안에 우산을 두고 내린 그날 나는 내리는 비를 손차양으로 가리며 집까지 걸어갔으니까. 그건 그렇고, 그동안 내가 잃어버린 지갑이나 우산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 '그 사회의 행복지수를 알고 싶다면 잃어버린 지갑이 돌아올 확률을 따져보면 된다'라는 명제를 읽은 적이 있다. 그 명제에 따르면 나는 괜찮은 사회에서 살고 있는 셈이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악어가죽 무늬의 카드지갑은 잃어버린 지 2년 만에 기적처럼 우체국을 통해 우리 집으로 돌아왔으니까. 그런데 최근 비슷한 경험을 또 한 번 했다.

몇 주 전 아침에 우연히 일찍 눈을 뜬 나는 동네 성북동 성곽길을 따라 산책을 나갔다. 월요일 아침이라 거리엔 심란한 얼굴로 출근하는 사람들이 보였고 최순우 옛집을 지나 와룡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가요를 크게 틀어놓고 걷는 노인도 있었다. 공원 가는 길옆으로 빠지니 작은 화단과 벤치가 있었는데 거기서 기다랗고 약간 두툼한 종이 한 장을 주운 나는 충동적으로 볼펜을 꺼내 메모를 시작했다. 마침 벤치 옆엔 나무 테이블도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직후 스마트폰으로 은행 계좌를 열었다가 사무실에서 대성통곡을 한 사연이었다. 나는 엄마의 농협 계좌로 한 달에 한 번 용돈을 보내 드리곤 했는데 이제 그럴 수 없구나 하는 마음에 눈물이 터졌던 것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글감을 하나 건진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저녁에 있을 책 쓰기 워크숍 준비를 했다. 이 주일에 한 번씩 자신의 첫 책을 쓰고 싶은 분들이 모여 서로 써 온 초고를 읽고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아내와 나의 강연도 듣는 시간이었다. 저녁도 먹고 간식거리도 사려고 조금 일찍 밖으로 나갔는데 이상하게 가방이 가벼운 느낌이 들었다. 가방 안에 들어 있어야 하는 파우치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크로스백 안에 물건들이 흐트러져 돌아다니는 게 싫어서 파우치를 하나 더 사용한다. 그러니까 그 안에 지갑, 명함집은 물론 핸드크림, 비상용 화장지, 반창고, 볼펜 등을 넣어 들고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통째로 사라졌으니 하늘이 노래질 수밖에. 아침 산책의 그 나무 벤치와 탁자가 떠올랐다. 그러나 그게 아침 7시경이었으니 시간은 이미 열한 시간 가까이 지나 있었다.

돌아온 파우치. 편성준 작가 제공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나는 아내에게 파우치 분실 사실을 고백하고 급하게 성벽길을 향해 뛰어갔다. 산책로는 이미 어두워서 지나가는 행인도 없었다. 아침에 천천히 올라가던 길을 단숨에 뛰어올라가 그 장소를 찾았는데 너무 어두워서 처음엔 보이지 않았지만 벤치 위엔 내 파우치가 그대로 있었다. 지퍼가 열려 있어 불안한 마음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지갑도 그대로였고 그 안에 있는 현금도 똑같은 액수였다. 내가 파우치를 찾았다고 했더니 별 기대 말라고 하던 아내가 '장하다, 대한민국!'이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예전 같으면 '과연 돌아올까?' 했을 텐데 확실히 시민의식이 높아졌다. 이제 정치만 나아지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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