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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공존

튤립의 여행과 탄소발자국

이 좋은 봄날이 쏜살같이 흘러갑니다. 온 나라를 뒤덮을 듯, 거리마다 벚꽃이 피어나고 이내 꽃비가 되어 흩날리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그 자리엔 연두빛 잎새가 되어 신록이 싱그럽습니다. 정원이며 공원이며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엔 막바지 튤립이 형형색색 지면을 수놓습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가지가지 철쭉들이 봄꽃 잔치의 마지막을 장식하겠지요. 튤립은 이 봄, 누구에게나 세계 어느 곳에서나 우리의 눈길을 가장 강렬하게 붙잡으며 봄을 맞이하게 하는 꽃입니다. 오늘 내가 만난 튤립은 언제 어디에서부터 출발하여 이곳에서 도착한 것일까! 세계적으로 야생의 튤립 집안 원종들은 70여종에 이르는데 주로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폭넓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다양한 색깔과 모양을 가지기 위해 교배를 비롯한 끝임없는 육종을 통하여 수천종류의 품종이 만들어져 있지요. 야생의 튤립이 키워지기 시작한 것은 10세기 페르시아를 거쳐 오스만 투르크인들이 이를 가져다가 재배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16세기에 비로소 북유럽의 큰 관심을 모아 튤립매니아 시대를 맞이하였고 17세기 네덜란드에는 말 그대로 튤립 광풍이 불어 고가의 더 특별한 새 품종의 튤립을 투기로 사고 파느라 많은 이들이 가산을 탕진했던 유명한 이야기를 남기고 있습니다. 수 백년전 유럽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아름다운 튤립은 이제 전 세계의 꽃이 되었습니다. 네덜란드는 튤립의 나라가 되어 전 세계로 구근을 수출합니다. 우리가 이 꽃을 즐기기 위해서는 튤립이 일단 탄소발자국을 남기며 바다를 건넌 여행을 하게 되지요. 어려운 점은 우리나라의 여름 기온이 높아 정원에 심어둔 튤립의 구근은 대부분 다음 해 꽃을 보기 어려우니 소모품처럼 쓰여지고 수입은 반복됩니다. 어떻게 하면 탄소발자국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까요! 꽃이 지고 난 후, 구근이 튼실해지면 캐어 보관해두었다가 가을에 심습니다. 요즈음 시도되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는 개량되기 이전의 야생의 원종을 심는 일입니다. 우리 눈에 익숙해진 화려함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나름의 매력으로 매년 그 자리에서 피고 지고를 거듭하여 포기를 늘리며 정원의 식구가 됩니다. 물론 더욱 좋은 일은 배를 타고 여행하지 않아도 되는 우리나라의 자생식물을 발굴하고 연구하여 보급하는 일입니다. 한번 심으면 절로 피고 지고, 벌과 나비도 부르며 생물다양성을 풍성하게 하고, 씨앗을 맺어 새로운 세대로 이어지는 진정한 자연을 담는 정원을 만드는 일이지요. 튤립에 마음을 빼앗기며 조금 위안이 되는 것은, 그래도 튤립은 나사가 선정한 공기화원식물 48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이 봄이 진짜 자연의 모습에 눈과 마음이 가는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기고

북한 'NLL 도발' 가능성에 대비해야 할 이유

김정은의 대남 강경 행보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김정은은 올해 초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80년간의 남북관계사에 종지부를 찍고 대한민국을 제1의 주적으로 규정하겠다"며 막말 수준의 비방을 쏟아냈다. 대남 분야 총 3,250글자 분량의 짧은 문장에서 '전쟁' 용어를 15번이나 사용할 만큼 호전적 내용이었다. 이러한 김정은의 언행으로 볼 때 앞으로 다양한 형태의 도발이 현실화될 것으로 보이며 우리는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 그 가운데 '한반도의 화약고'라고 할 수 있는 서해 북방한계선(NLL) 도발 가능성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첫째, 김정은이 시정연설에서 NLL 문제를 콕 집어서 거론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대남관계를 '교전·적대관계'로 규정하고 이를 교육과 법제 등 사회 전반에 반영할 것을 독려하였다. 특히, 우리 헌법 조항과 외국 사례를 들어 '국가주권 령역(領域)'을 헌법에 명기할 것을 지시하면서 "불법무법의 '북방한계선'을 비롯한 그 어떤 경계선도 허용될 수 없고 대한민국이 령토·령공·령해를 0.001㎜라도 침범한다면 전쟁 도발로 간주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현 해상분계선인 NLL을 '불법무법'으로 단정하고 이를 기정사실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나갈 것임을 예고한 것이다. NLL 문제는 남북관계 역사에서 오랫동안 끌어 온 쟁점 이슈이다.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에 육상분계선 관련 조항은 있으나 해상분계선에 대해서는 명확한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협정 체결 당시 유엔군사령관은 쌍방 충돌을 막기 위해 정전협정과 국제법에 기초하여 NLL을 설정하고 북측에 통고하였다. 이에 대해 북한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으며 '조선중앙연감'(1959)에도 이를 경계선으로 표시하였다. 1991년 체결된 '기본합의서'에서도 남북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을 인정'키로 합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기회 있을 때마다 기존 NLL이 무효라고 억지를 부렸고 1999년 제1차 연평해전과 2007년 남북정상회담 등을 계기로는 일방적으로 설정한 '경비계선'이라는 것을 들고 나와 해상경계 재설정을 주장하였다. 이와 함께 제2차 연평해전(2002)과 대청해전(2009), 천안함 폭침(2010) 등 대규모 도발을 자행하는 등 NLL 무력화를 집요하게 시도해 왔다. 북한의 NLL 도발 가능성을 높게 보는 또 다른 이유는 이 문제가 가지고 있는 정치 갈등적 요소 때문에 북한의 공작대상이 될 소지가 많다는 점이다. 과거 사례로 볼 때 북한은 국내 정치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다양한 공작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 우리로서는 안보 분야에서는 정파 간 갈등을 최소화하고 의연한 자세를 견지하되, 예리한 정보력과 확고한 안보태세로 도발 의지를 무력화시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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