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유치원 버스기사를 소아성애 살인자로 만든 일본 경찰

입력
2022.06.2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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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콜드케이스]
<39> 일본 도치기현 4세 여아 살인사건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초여름에 접어들던 1990년 5월 12일 일본 도치기현 아시카가시 와타라세 강. 아직 해가 지지 않은 강변을 빨간 치마를 입은 네 살 소녀 마쓰다 마미가 호리호리한 체격의 남자와 걷고 있었다. 잡초가 무성한 제방에서 내려가 강 기슭 위에 나란히 선 것이 이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음날 오전 소녀는 인근 갈대밭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소녀가 입고 있던 빨간 치마와 반팔 셔츠는 둘둘 말린 채로 근처 갯버들 가지에서 발견됐다.

일본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 끝에 1991년 12월 1일 전직 유치원 버스기사 스가야 도시카즈(당시 45세)를 유력 용의자로 지목했다. 마쓰다가 입고 있던 반팔 셔츠에서 검출된 정액과 체모, 타액 등으로 확인한 혈액형이 스가야의 혈액형과 일치했다. 일본 경찰은 "소아성애자인 스가야의 범행"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임의동행 형식으로 붙잡아 혹독한 취조를 시작했다.

일본의 주요 조간 신문들은 곧바로 스가야를 유력 용의자로 보도했다. ‘현장에 남겨진 증거와 용의자의 DNA 일치’, ‘전직 운전기사, 오늘 바로 임의동행’, ‘같은 시에 거주하는 전직 운전기사’ 같은 제목의 보도가 쏟아졌다. 형사들의 거듭된 압박에 스가야는 살인 혐의를 인정했다. 법원은 체포 영장을 즉각 발부했다.

아동 살인 3건 자백했지만.... 어설픈 수사 결과

수사에 탄력을 받은 경찰은 아시카가 시에서 발생한 다른 두 건의 아동 납치살해 사건도 스가야의 범행으로 몰아갔다. 1979년 아시카가시에서 일어난 후쿠시마 마나(당시 5세) 살인 사건, 1984년 같은 지역에서 발생한 하세베 유미(당시 5세) 살인사건의 가해 혐의까지 스가야에게 씌웠다. 스가야는 두 살인 사건도 자신의 소행이라고 자백했다. 이른바 ‘북관동 연쇄 아동납치 살인 사건’이 단번에 해결되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후 경찰 수사의 허점은 곳곳에서 드러났다. 스가야의 별건 혐의 두 건은 자백 외에는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사건을 송치 받은 검찰은 1979년과 1984년 사건을 불기소 처분했다.

마쓰다 살인 사건 수사 결과도 어설펐다. 스가야의 강요된 자백을 제외하면 가장 결정적 증거는 일본 과학경찰연구소의 DNA형(形) 감정 결과였다. 당시 일본에 도입된 DNA형 감정은 정확도가 높은 현재의 DNA 감정과는 다르다. 당시 방식은 개인의 DNA를 혈액형처럼 그룹으로 나눠 식별하는 것이었다. 증거물에서 추출한 DNA를 325개 형으로 분류했는데, 혈액형 종류보단 많았지만 DNA형이 일치한다고 동일인이라고 단정하긴 무리였다.

스가야, '온순하고 거절 못하는 성격'이었다

일본 경찰이 스가야를 소아성애자로 결론 내린 또 다른 단서는 비디오 테이프였다. 요미우리 신문은 당시 "스가야의 주말 은신처에 소녀가 나오는 성인 비디오 테이프나 포르노 잡지가 다수 있었으며, 은신처는 스가야의 소아성애 취향을 충족시키기 위한 아지트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탐사보도 전문기자 시미즈 기요시의 취재 결과는 다르다. 시미즈의 저서 ‘살인범은 그 곳에 있었다’에 따르면, 스가야가 세 들어 살던 집에 있던 비디오 테이프 2,000개 가운데 소위 성인물은 133개였고, 아동 포르노는 단 한 개도 없었다. 경찰의 과장된 정보보고를 토대로 언론이 스가야를 소아성애자로 몰아붙였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가족과 지인들은 스가야에 대해 "온순한 성격으로, 주변의 강한 요구가 있으면 그에 맞추려는 성향이 강했다"고 증언했다. 경찰이 수갑을 채운 상태에서 DNA형 감정 결과를 들이밀며 압박하자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허위 자백을 했다고 스가야는 추후에 주장했다. 스가야는 구속된 지 두 달쯤 지나 가족에 보낸 편지에도 심약한 면모가 확인된다. 그는 무죄를 주장하며 “세금 낼 것(2,000엔ㆍ한화 1만9,000원 상당)이 남아있다. 잘 부탁한다. 미안하다”고 썼다.

스가야는 형사들이 재판정에 더이상 나오지 않은 1심 6차 공판에서부터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늦은 뒤였다. 스가야는 1993년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고, 항소·상고했지만 기각됐다.

DNA 재감정 결과 "불일치"... 재심서 '무죄'

2002년 스가야는 재심을 청구했지만 기각됐다. 항고와 언론의 의혹 제기 끝에 DNA 재감정이 이뤄진 건 2009년이었다. 검찰이 마쓰다의 셔츠에서 나온 DNA를 스가야의 DNA와 다시 비교한 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DNA 불일치!'"

1990년 원심에서 일본 최고재판소가 인정한 DNA형 감정 결과의 증거 능력이 사라진 것이었다. 도치기현 우쓰노미야의 지방법원 재심 재판부는 “최고재판소는 판결문에서 ‘DNA 감정이 과학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시행됐다’고 했지만, 그것을 사실로 인정하기엔 의문점이 남는다”고 판단했다.

스가야는 2009년 6월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됐고, 이듬해 3월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재심 재판부는 "경찰의 취조에 스가야가 궁지에 몰려 허위자백을 했다"고 판단했다. 사토 마사노부 재판장은 선고 직후 사법부를 대표해 스가야에게 사과했다. “진실된 목소리에 충분히 귀를 기울이지 않고, 17년 반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자유를 박탈한 것에 진심으로 죄송하다"면서 배석판사 2명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45세 중년에 체포됐던 스가야가 63세의 백발 노인이 된 뒤였다.

스가야에게 자백을 강요한 경찰과 검찰 책임자들은 제대로 사과하지 않았다. 스가야는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법원으로부터 사과를 받아 너무 기쁘다”면서도 "20년 전 내게 자백을 강요하고 살인죄를 덮어씌운 수사관들의 사죄도 받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형사들도 검사들도 입을 닫았다. 모리카와 전 검사는 스가야의 재심 공판에 출석해 “주임 검사로서 스가야가 범인이 틀림 없다고 판단해 기소하고 공판에 임했다. 새 DNA 감정으로 범인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돼 심각하게 생각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진범은 어디에... 공소시효 지나 영구미제로

마쓰다를 살해한 진범은 누구일까. 사건 당일 마쓰다의 마지막 행적을 본 목격자의 말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와타라세 강 제방 근처에 살고 있는 한 자영업자는 살인 사건이 발생한 날 오후 6시쯤 한 남성이 네 살쯤으로 보이는 어린 소녀의 손을 잡고 제방을 내려갔다고 경찰 참고인 조사에서 진술했다. 문제의 남성은 마르고 길쭉한 체형으로 만화 ‘루팡 3세’의 주인공을 닮았다고 그는 회고했다.

목격자는 또 있었다. 사건 현장 인근에 사는 주부도 4살쯤으로 보이는 키 100㎝ 정도의 소녀가 빨간 치마와 밝은 색 상의를 입고 한 남성과 제방 너머 강변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봤다고 경찰 조사에서 진술했다.

사건 당일 마쓰다는 부모님을 따라 강변 인근의 파친코를 찾았다가 행방불명 됐다. 경찰이 스가야를 상대로 강압 수사를 하는 대신 파친코의 폐쇄회로(CC)TV를 정밀분석하고 주변을 탐문했다면 ‘루팡 3세’를 닮았다는 진범을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마쓰다 살인 사건은 스가야가 재심 무죄를 선고 받기 4년여 전인 2005년 5월 이미 공소시효(당시 일본 법률상 15년)가 완성됐다. 2004년 12월 일본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살인을 비롯한 ‘사형에 해당하는 죄’의 공소시효가 25년으로 늘었지만, 개정 이전에 발생한 범죄에 대해 소급 적용할 순 없었다. 이에 마쓰다 살인 사건은 끝내 미제로 남게 됐다.

김청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