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하면 자유, 확률은 도박... '밀항의 세계'

입력
2022.12.13 13:00
김봉현 잠적 사태로 주목받는 밀항
사기범 등 거물 범죄자 도피 종착역
브로커 점조직 통해 은밀하게 진행
최근 신고 강화로 성공 확률은 낮아

편집자주

끝난 것 같지만 끝나지 않은 사건이 있습니다. 한국일보 기자들이 사건의 이면과 뒷얘기를 '사건 플러스'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바지선 한 척이 2019년 4월 12일 경남 거제도를 출발했다. 목적지는 중국 산둥성 룽청시. 하지만 출항 이틀이 됐을 때 한국 해경이 배에 들이닥쳤다. 곧이어 기관실 환기구 옆 천장에 숨어있던 A씨가 붙잡혔다. 그는 400억 원이 넘는 돈을 횡령한 혐의로 전달 구속영장이 발부된 경제사범이었다. 처벌을 피하기 위해 중국 밀항을 시도하다 검거된 것이다.

영화에서 자주 보던 장면이지만, 현실 세계에서도 돈 많은 범죄자들에게 ‘밀항’은 매력적 선택지다. 도피 자금은 충분한 만큼 성공만 하면 얼마든지 감옥살이 대신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범죄자 유혹하는 밀항

최근 종적을 감춘 ‘라임 사태’의 몸통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도 검찰은 밀항을 목적으로 도주한 것으로 보고 있다. 조건부 보석으로 풀려나 있던 그는 지난달 11일 팔당댐 인근에서 전자팔찌를 끊고 잠적했다. 그간 검찰은 김 전 회장을 끊임없이 다시 구속하려고 했다. 중국 밀항 정황을 포착한 탓이다.

성공 전례도 있다. ‘건국 이래 최대 사기범’으로 불린 조희팔은 2008년 12월 충남 태안에서 양식업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공해상에서 중국 배로 갈아타고 달아났다. 해경이 첩보를 입수해 현장에 도착했을 땐 한발 늦은 상황. 조희팔이 버리고 간 여권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희팔을 빼면 대부분 붙잡혔다. 김찬경 전 미래저축은행 회장은 2012년 5월 경기 화성 궁평항에서 어선을 타고 필리핀으로 가려다 해경에 적발됐다. 그는 회삿돈 200억 원을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현재 검찰은 도주한 김 전 회장도 국내 체류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 내리고 주변을 샅샅이 훑고 있다.

거물급 범죄자만 밀항에 목매는 건 아니다. 30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수사를 받던 B씨는 2019년 12월 필리핀을 종착지로 삼고 브로커에게 500만 원을 건넸다 덜미가 잡혔다. 2019년 2월 ‘청담동 주식부자’로 알려진 이희진씨 부모를 살인한 김다운도 범행 후 밀항 브로커에게 4,000만 원을 줬다. 2020년 12월엔 보이스피싱 가담 혐의로 재판을 받던 중국인 C씨가 사법처리가 예상되자 고국으로 밀항을 시도했다. 중국에 있던 C씨 지인이 직접 1톤급 배를 몰고 전남 가거도로 와 그를 태웠지만 해경의 감시망에 걸려들었다.

배에 오르기까지 첩보작전 방불

밀항은 쓸 만한 브로커를 찾는 일에서 시작된다. 계약이 성립하면 행선지나 밀항 가능 여부를 조율하고, 브로커는 선박을 매수한 뒤 밀항 도피자의 위조 여권을 만든다. 이후 잔금까지 치르면 매수한 선박에 숨어 들어 은밀한 항해에 나선다.

밀항 브로커는 점조직으로 움직여 여간해선 적발이 쉽지 않다. 브로커 한 사람이 밀항 전 과정을 총괄하는 게 아니라, 단계별로 담당자가 모두 다르다.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할 요량이지만, 오히려 도피자 검거에는 유리하다고 한다. 어느 한 단계에서 정보가 새도 추적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김찬경 전 회장 역시 알선책과 접촉하다가 내부자 제보를 받은 해경에 의해 체포했다. 브로커가 돈만 받고 잠적하는 소위 ‘먹튀’도 적지 않다.

도피자기 배에 오르기까지 과정도 첩보작전을 방불케 한다. 접선부터 여러 장소를 바꿔가며 한다. A씨는 2019년 4월 7일 경북 김천시에서 브로커를 만나 선금 명목으로 3,000만 원을 줬고, 이튿날 경남 거제시에서 브로커와 다시 접선했다. 같은 달 11일엔 부산에서 현금 2,000만 원을 건넨 후에야 승합차를 타고 이동해 바지선에 탑승할 수 있었다.

감시의 눈 많아져 성공률 '뚝'

최근엔 과거에 비해 밀항 사례가 크게 줄었다. 2000년대만 해도 한 해 10명 내외의 밀항 시도자가 적발됐지만, 2017년부터 5년간 검거 건수는 4건, 7명이 전부다. 해경은 한국의 경제 수준이 높아지면서 해외취업 목적의 밀항이 사라졌고, 해양산업 관련 종사자들에게 밀항 차단 교육을 한 것이 주효했다고 설명한다. 선원이나 어민들이 수상한 사람이나 배를 보면 해경에 신고하는 관행이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C씨는 중국에서 온 배를 타고 가거도 28㎞ 해상까지 달아났지만, 못 보던 배에 처음 보는 구명조끼를 입은 사람이 있어 의심스럽다는 어민의 신고로 금세 붙잡혔다. A씨 역시 그를 발견한 예인선 선장의 신고로 밀항에 실패한 사례다. 해경 관계자는 “항만 보안을 강화하고, 해양 종사자들도 밀항이 의심되면 즉시 신고해 사전차단 효과가 나고 있다”고 말했다.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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