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들이 단체로 따돌리는데도 '직장내괴롭힘금지법' 적용이 안 된다고요?

입력
2023.01.0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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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 3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사각지대
동료, 거래처, 고객 괴롭힘은 인정 어려워
5인미만 사업장 괴롭힘 더 빈번... "법 넓게 해석해야"

편집자주

월급쟁이의 삶은 그저 버티기만이 답일까요? 애환을 털어놓을 곳도,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을 <한국일보>가 함께 위로해 드립니다. '그래도 출근'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담습니다.

지난해 국내 한 중견기업에 입사한 A씨는 요즘 극심한 스트레스로 아침에 눈을 뜨는 것조차 힘들 정도다. 학교 다닐 때도 안 당했던 따돌림을 일하러 간 회사에서 겪을 줄은 몰랐다. 특히 매일 찾아오는 점심시간이 고역이다. 주변 사람들이 하나둘씩 짝지어 나가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건 항상 A씨 혼자다.

최근에는 A씨가 포함되지 않은 단체 채팅방을 만든 눈치다. 동료들이 의도적으로 A씨가 모르는 얘기를 주고받는 걸 모른 체 할 수밖에 없다. A씨 말에는 단답으로만 답한다거나, 의도적으로 못 들은 척 지나가기도 한다.

처음부터 A씨가 이런 고민을 한 건 아니다. 입사 초에는 같은 층에서 근무하는 또래 직원 대여섯 명이 함께 어울려 다녔다. 문제는 그중 한 명의 오해에서 비롯한 사소한 다툼이 벌어진 뒤부터였다. A씨는 "둘 사이에서 벌어진 문제인 만큼 잘 해결됐다고 생각했는데, 이후 다른 사람들과도 눈에 띄게 관계가 소원해졌다"라며 "업무에 지장이 갈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아 회사 선배에게 고민을 털어놨지만 '사회성을 길러보라'는 조언만 받았다"고 털어놨다. 이후에는 심지어 그 선배마저 A씨를 데면데면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A씨가 더 힘들어하는 건 이런 사례에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들어서다. 법적 제재를 위해서는 괴롭힘을 가하는 사람이 A씨보다 상급자여야 하는데, 명백한 주도자 없이 단체로 행해지는 따돌림은 판단 기준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A씨는 "결국 참거나 퇴사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니 버티기가 더 힘들다"라고 토로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도입 3년 반...괴롭힘 줄었지만 사각지대 여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2019년 7월 16일 시행됐다. 근로기준법에 '직장 내 괴롭힘 금지' 조항을 만들었는데, 특히 직장 내 괴롭힘 피해를 신고·주장하는 것을 이유로 해고 등 불이익한 처우를 한 경우 사용자는 형사처벌까지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직장갑질119가 여론조사 전문기관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올해 9월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법 시행 이후 직장 내 괴롭힘이 줄었다는 응답은 57.6%로 2019년(39.2%)에 비해 늘었다. 소위 갑질 경험도 2019년 44.5%에서 올해 29.1%로 15.4%포인트 줄었다.

그러나 사각지대는 분명하다. 법이 직장 내 괴롭힘을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범위를 넘어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라고 규정한 만큼 이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는 손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노동 현장에서는 A씨 사례처럼 직장 동료들이 암묵적으로 따돌린다거나, 동기 또는 후배가 괴롭히거나, 나아가 거래처 관계자나 고객이 괴롭힘의 주체인 경우가 적지 않다.

어린이집 교사인 B씨 역시 '고객'의 괴롭힘에 시달리고 있다. 한 아이의 학부모가 매일같이 B씨에게 전화를 걸어 불평불만을 늘어놓은 게 시작이었다. 해당 학부모는 B씨가 아이들을 차별대우한다고 생각했고, 이에 B씨의 일거수일투족에 딴지를 놓기 시작했다. B씨는 "메신저 프로필 사진만 바뀌어도 옷차림을 지적했고, 아이 스스로 긁다가 생긴 상처도 내 책임으로 돌렸다"며 "원장 선생님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하며 무조건 학부모의 비위를 맞춰주라고 하는데, 이런 건 괴롭힘에 들어가지도 않는다는 게 답답하다"고 말했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고객의 괴롭힘으로부터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사업주에게는 조치 의무가 부여된다. 특히 고객응대 근로자가 사업주에게 고객 갑질을 방지할 수 있는 조치를 요구했다는 이유로 사업주가 해당 근로자를 해고하거나 불리한 처우를 할 경우 형사처벌까지 할 수 있다.

다만 '고객응대 근로자'가 아니라면 또 다시 법의 사각지대에 빠지게 된다. 심준형 공인노무사는 "만약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학부모가 교사를 모욕할 경우 모욕죄나 명예훼손죄가 성립할 수도 있겠지만, 학부모 평판이 중요한 어린이집에서 소극적 대처로 일관한다면 현실적으로 교사에 대한 학부모의 갑질을 방어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신고해도 두 손 놓는 사용자...어떻게 해야 하나

법적으로 직장 내 괴롭힘 금지의 책임자는 해당 직장의 사용자다. 사용자는 직장 내에서 괴롭힘이발생한 사실을 인지한 경우 지체 없이 조사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해야 한다. 피해자에게 불리한 처우를 해서도 안 된다. 회사 자체 조사에 따른 처리가 원칙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사용자가 신고를 접수하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경우다. 작은 소프트웨어 기업에 다니고 있는 C씨의 경우 팀장이 둘만 있는 자리에서 수시로 폭언을 쏟아부었다는 사실을 올해 초 회사에 알렸지만 6개월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여전히 C씨는 팀장과 함께 근무하고 있다. C씨는 "이제 팀장이 대놓고 폭언을 하지 않는 걸 보면 회사 측이 언질을 준 것 같다"면서 "공식 조사나 징계, 피해자 분리 조치 등이 하나도 행해지지 않는 게 황당하다"라고 말했다.

다행히 법 시행 3년이 지나며 최근에는 직장 내 괴롭힘을 방치한 사용자에게도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보는 판결이 늘고 있다. 지난해 수원지법 안산지원은 피해자가 2년간 상사에게 직장 내 괴롭힘을 당했다고 호소한 사건에 대해 회사가 위자료 1,2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사용자가 직접 괴롭힘 행위를 한 경우뿐 아니라 직장 내 괴롭힘을 예견·예방할 수 있었음에도 이를 방지하지 못한 경우에도 손해배상 책임을 진다"고 판시했다.

근로기준법 적용 안 받는 5인 미만 사업장...사용자 괴롭힘 만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이후 실제로 괴롭힘이 줄었다는 근로자가 늘었지만, 이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사업장 상용 근로자에 한한다.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지 않는 5인 미만 사업장 근로자는 지난해 기준 378만 명이었다. 여기에 간접고용노동자(347만 명), 특수고용노동자(229만 명), 플랫폼 노동자(53만 명) 등도 법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D씨도 건설 현장에서 용역 업무를 담당하는 5인 미만 기업에 다니고 있다. 파견 직원은 10명이 넘는데, 정작 회사 소속은 4명뿐이라 이 회사는 근로기준법 적용을 받지 않는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상식 밖의 업무 지시와 거친 욕설에도 D씨가 할 수 있는 건 회사를 그만두는 방법밖에 없다.

직장갑질119는 "5인 미만 사업장은 직장 내 괴롭힘 경험과 심각성, 극단적 선택 고민 등이 모두 직장인 평균보다 훨씬 높다"며 "특히 5인 미만 사업장에서는 괴롭힘 행위자가 사용자인 사례가 30.2%로, 직장인 평균(23.4%)을 상회한다"고 지적했다.

심준형 노무사는 "아무런 법적 보호를 못 받던 노동자들에게 '기댈 언덕'이 마련됐다는 데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큰 의의가 있다"면서도 "여전히 사각지대가 많은 법이고, 그런 곳에 있을수록 취약한 노동자일 확률이 큰 만큼 정부와 법원이 법의 취지를 고려해 괴롭힘의 범위를 보다 넓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곽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