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해군의 아름다운 '작전'

입력
2022.12.29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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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9 헨리 케일리

1920년 11월 호주 태즈메이니아 포트 아서(Port Arthur)의 만 6세 소녀 낸시 벤틀리(Nancy Bentley)가 뒷마당 덤불에서 놀다가 독사에게 손목을 물렸다. 병원은 너무 멀었고, 아버지는 거룻배를 저어 인근 카나번 만에 정박 중이던 왕립호주해군 경순양함 시드니(HMAS Sydney)로 딸을 이송했다. 당시 함장은 군의관의 민간인 의료행위를 금한 군법 규정을 피해 아이를 ‘함정 마스코트’로 임명해 치료받도록 했다. 저 사연은 호주 해군 첫 공식 여군의 탄생 에피소드로 꽤 알려져 있다.

그 함장이 헨리 케일리(Henry Cayley, 1877.12.29~1942.12.31, 당시 대령)였다. 그는 저 다급한 상황에서 공식 보직인 ‘마스코트’에 착안했다. 단위부대가 장병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동물을 입양해 ‘마스코트’로 임명, 임금 대신 군수식량으로 먹이를 줄 수 있도록 허용한 규정. 케일리 함장은 벤틀리에게 군번(000001)을 부여하고, “싫증날 때까지” 복무할 수 있도록 했다. 벤틀리는 선상 응급치료 후 태즈메이니아 호바트로 호송돼 완치됐고, 입대 8일 만에 ‘제대’했다. “가족의 간곡한 요청”이 제대 사유였다.

영국 브리스톨 클리프턴에서 외과의사 아버지와 전업주부 사이에서 태어난 케일리는 왕립해군사관학교를 거쳐 해군 장교로 임관, 의화단 반란 당시 중국서 근무하고 1913년 중령으로 갓 창군된 왕립호주해군으로 이적, 1차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1919년 대령으로 승진, 시드니호 함장을 맡아 1922년까지 지휘했고, 영국과 호주 해군의 여러 주요 보직을 거친 뒤 1931년 8월 해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왕립 호주 해군 역사상 가장 인도주의적인 작전을 성공시킨 그는 예편 후 1906년 결혼한 아내와 함께 영국서 여생을 보낸 뒤 고향 첼시의 자택에서 폐색전증으로 별세했다.

호주 해군이 여성의 입대를 공식 허용한 것은 1941년 4월부터다. 2차대전 전시 수요 때문이었고, 첫 자원 입대자 14명의 보직은 무선 전신수와 선상 조리사였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