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속 250㎞ 사이클론에 초토화된 '럭비의 고장'…"우리 페이스대로 싸운다"

입력
2023.01.26 12:00
4면
기후소멸국을 가다 ②피지
해변 침식에 사라진 '럭비 놀이터'
공동체 정신으로 재난 대응 시작
피지 첫 시민사회 NGO도 출범해

편집자주

기후전쟁의 최전선에 태평양 섬나라들이 있습니다. 해발 고도가 1~3m에 불과한 작은 섬나라들은 지구 온난화로 생존을 위협받습니다.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해변 침식과 해수 범람이 삶의 터전을 빼앗은 지 오래입니다.
태평양 섬나라 14개국이 배출하는 온실가스는 전 세계 배출량의 1%가 안 됩니다. 책임 없는 이들이 가장 먼저,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부정의이자 불공정입니다. 태평양 섬나라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에 당신의 책임은 없을까요? 한국일보는 키리바시와 피지를 찾아 기후재난의 실상을 확인하고 우리의 역할을 고민해 봤습니다.



럭비는 피지의 국민 스포츠다. 피지 비티레부섬 남부 난드라가나보사주(州) 나마타쿨라마을은 2016년 피지에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안겨 줬다. 피지와 호주 럭비 국가대표를 지낸 로테 투키리 선수와 그의 사촌 테비타 쿠리드라니 선수가 이곳 출신이다. 호주, 프랑스 등 세계 리그에 진출한 선수들이 나마타쿨라의 백사장에서 꿈을 키웠다.

그러나 옛날 얘기가 됐다. 해변이 침식되고 물에 잠겨 럭비 경기를 할 수 없는 마을이 됐기 때문이다.

이달 6일(현지시간) 나마타쿨라의 해변에서 만난 마을 대표 조세바타 나가사우쿨라(49)에게 "마을 아이들이 요즘도 여기서 럭비를 하냐"고 물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해변엔 모래 대신 자갈뿐이다. 군데군데 웅덩이가 패여 물이 고였다. 이런 데서 어떻게 운동을 하나. 10년 전엔 모래사장이 지금보다 두 배는 넓었고, 20~30년 전까지는 작은 자갈 하나 없는 고운 모래였는데, 지금은···."

마을의 자랑이었던 아름다운 백사장은 10~15년 전부터 사라졌다. 사이클론(강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열대성 폭풍)과 높은 파도가 번갈아 덮쳐 모래를 쓸어 간 탓이다. 해변이 침식되면 그걸로 끝이 아니다. 범람한 해수가 마을로 더 많이 밀려든다. 나가사우쿨라는 "'킹 타이드(밀물과 썰물의 파고 차가 연중 가장 높아지는 현상)' 때는 집 안에서도 바닷물이 종아리까지 차오른다"고 했다.

사이클론은 마을을 스치기만 해도 위력적이다. 나가사우쿨라는 2016년 남반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사이클론 '윈스턴'의 피해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윈스턴이 섬의 반대편인 북쪽을 지나갔는데도 마을 텃밭이 침수되고 주식인 열대작물 카사바와 빵나무 열매가 뿌리째 뽑혀 날아갔다. 매년 사이클론이 닥칠 때마다 피해를 입었다 복구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는 "집을 잃은 사람이 많다. 나는 텐트 생활을 안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했다.


마을 회의로 '재난 대응' 시작했다

나마타쿨라 주민들은 마을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연을 상대로 아무것도 못한다'는 생각을 버리자"며 의지를 다졌다. 주민 300~400명이 전원 참여하는 회의를 열어 홍수 대책을 논의했다.

2018년 돈을 걷어 굴삭기를 빌렸다.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나우시강 주변에 흙을 쏟아부어 강줄기를 틀었다. 가장 큰 고민거리였던 강가 토양 침식이 언제 그랬냐는 듯 멈췄다. "공사를 안 했다면 침식 방향에 있는 집들은 지금쯤 다 무너졌을 것"이라고 말하며 나가사우쿨라는 자랑스러워했다.

2021년엔 정부가 방파제 건설을 승인해 공사를 시작했다. 마을에서 파낸 돌과 바위를 해변에 쌓고 있지만, 속도는 더디다. 450m 길이의 짧은 방파제를 짓는 작업이 15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끝나지 않았다. 장비와 기술 부족 때문이다. 나가사우쿨라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하면 된다"는 여유를 보였다. 그는 "지난해 12월 총선 전에 공사가 중단됐고, 이제 새 정부가 들어섰으니 다시 시작될 거라 믿는다. 기다려보겠다"고 했다.


피지 첫 NGO 출범…"우리 땅, 역사 스스로 지킨다"

재난에 맞서는 도전적인 분위기 속에 나마타쿨라엔 피지 최초의 시민사회 비정부기구(NGO)가 탄생했다. 마을 청년 사무엘라 쿠리드라니(30)가 2017년 세운 카이니콜라(Kai Ni Cola·생명의 나무라는 뜻)다. 쿠리드라니는 2017년 열린 제23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3)에 피지 청년 대표로 참가했다.

쿠리드라니는 2017년 호주에서 3년간 유학하고 돌아온 뒤 마을의 위기에 눈을 떴다. 해변은 척박해졌고, 홍수 피해는 극심했다. 해양생물학자인 사촌과 대화하고 나서야 기후변화의 결과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카이니콜라는 두 가지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우선 해안선 보호를 위한 맹그로브 나무 400그루 심기. 맹그로브의 길고 넓은 뿌리는 흙을 꽉 움켜쥐어 토양 유실을 막는다. 마을 주민들이 비용을 댔고, 100명 가까운 청년들이 노동력을 제공했다. 두 번째는 마을을 둘러싼 암초에 산호 600그루 심기. 산호는 높은 해일을 막아 준다. 해피엔딩은 아직이다. 맹그로브와 산호 대부분이 거센 파도에 파괴됐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닥치며 활동이 주춤했지만, 쿠리드라니는 다시 일어설 준비를 마쳤다. 피지대학교와 새로운 기후대책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자금 지원을 받을 외국 NGO들과도 접촉했다. '3주에 한 번 새로운 프로젝트 시도하기'라는 목표도 세웠다. 펀딩이 올해의 목표냐는 물음에 쿠리드라니는 답했다. "맞다. 그렇지만 '돈' 자체가 중요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땅과 역사를 지키기 위해서다. 재정 지원을 받는 최종 목표는 기후변화에 스스로 맞설 수 있는 회복탄력성을 갖는 것이다."

나마타쿨라(피지)= 장수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