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에서 피투성이로 발견된 10대 4명… 3명의 용의자, 범인은?

입력
2023.02.1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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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핀란드 보돔 호수 살인 사건

편집자주

‘콜드케이스(cold case)’는 오랜 시간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는 범죄사건을 뜻하는 말로, 동명의 미국 드라마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일보>는 격주 금요일 세계 각국의 미제사건과 진실을 쫓는 사람들의 노력을 소개합니다.


'호수의 나라'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 인근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하나 있다. 이름은 '보돔'(Bodom träsk). 주말이었던 1960년 6월 5일 오전, 호숫가를 산책하던 한 남자는 눈에 들어온 풍경에 발길을 멈췄다. 그의 시선 끝에는 찢어진 천막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남자는 턱이 부러진 채 천막 위에 쓰러져 숨을 헐떡대는 소년, 그리고 이미 싸늘한 주검으로 변한 피투성이 청소년 3명을 발견하곤 황급히 경찰에 신고했다.

핀란드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보돔 호수 살인 사건'은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주민들 쉼터였던 호수에서 아직 채 피지도 못한 꽃다운 아이들을 대상으로 벌어진 참극이었던 만큼, 분노로 들끓은 핀란드 사회에서는 하루빨리 범인을 잡으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곧장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며, 범인도 조만간 꼬리를 밟힐 것으로만 보였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났건만 수사엔 전혀 진전이 없다. 보돔 호수 살인 사건의 진범은커녕 범행 동기, 범행에 쓰인 흉기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살인의 비밀을 품은 호수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다.

호수로 떠난 청춘들, 무자비하게 살해당하다

비극이 있기 하루 전, 청소년 4명이 보돔 호수로 야영을 떠났다. 15세 소녀 마일라 이르멜리 비외르클룬드와 아니아 툴리키 매키, 18세 소년 세포 안테로 보이스만, 닐스 빌헬름 구스타프손이었다. 매키와 보이스만은 연인 사이였고, 구스타프손은 매키의 친구 비외르클룬드에게 호감을 느끼는 상태였다.

이때만 해도 10대의 떨리는 설렘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네 명의 청춘은 종일 낚시와 물놀이를 즐겼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비극은 예고없이 찾아왔다. 친구들과 호수에서 보낸 하루가 '인생의 마지막 날'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감하지 못했다.

경찰은 이튿날 정오쯤 현장에 도착했다. 잔혹한 범행 수법에 경찰도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유일한 생존자 구스타프손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의 사망 원인은 머리뼈 골절과 타박상인 것으로 조사됐다. 범행 당시 상황에 대해 경찰은 "텐트 바깥에서 칼과 둔기에 의한 무차별 공격이 가해졌고, 피해자들은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목격자는 곧 나타날 것으로 보였다. 근처에 유명한 해변이 있어 평소 오가는 사람도 많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범인의 흔적을 쫓으려 투입된 인력도 역대 최대 규모였다. 경찰은 군(軍)에도 도움을 요청했고,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와 수색견도 힘을 보탰다. 시민들은 "빨리 범인을 잡으라"고 촉구하는 서명 운동에 나섰고, 언론도 수사 상황을 생중계했다. 이 나라의 모든 시선이 '보돔 호수'에 쏠렸다는 얘기다.

묘연한 범인의 행방… 경찰은 최면술까지 동원

얼마 지나지 않아 증언도 나왔다. 조류 관찰이나 낚시를 위해 호수를 찾았던 청소년들이 "사건 현장 근처에서 금발 남자를 봤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목격자는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다.

사실 경찰 수사에도 문제가 있었다. 수사관들은 맨손으로 증거품을 만졌다. 현장에서 담배를 피우며 구경꾼을 마음껏 드나들게 하기도 했다. '현장 보존'은 단지 구호에 불과했다.

그래서였을까. 결국 경찰은 범행에 쓰인 흉기도 파악하지 못했다. 천막 바깥에서 '칼과 둔기'로 저지른 범죄라는 윤곽만 잡혔을 뿐, 둔기의 실체는 규명되지 않았다. 범행 동기도 의문투성이였다. '강도 사건'이라고 하기엔 4명의 청소년이 가지고 있던 게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졌다. 현장에서 사라진 건 약간의 돈이 든 지갑과 낡은 신발, 옷가지, 오토바이 열쇠뿐. 이들이 호수에 갈 때 탔던 오토바이도 그대로 남았다.

병원에서 회복한 구스타프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머리에 큰 충격을 받아 의식을 잃었던 그는 "상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경찰은 '최면술'까지 동원, 구스타프손으로부터 "금발 남자가 텐트를 찢고 칼과 쇠파이프로 공격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이를 토대로 그린 몽타주로 수배에 나섰으나, 별 소득은 없었다.

세 명의 유력 용의자… 모두 풀려났다

보돔 호수 살인 사건을 향한 세간의 관심은 계속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됐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했지만, 핀란드 사회에 이름을 남긴 유력 용의자는 딱 세 명이다.

용의자① "내가 살인자" 고백한 노점상 주인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은 보돔 호수에서 노점상을 운영하던 카를 발데마스 귈스트림이다. 폭력적 성향으로 가족·이웃과 사이가 좋지 않던 그는 이전에도 호수 야영객이 소란을 피운다는 이유로 종종 마찰을 빚었다. 살인 사건 후 갑자기 마당의 우물을 메웠다는 점도 의심을 샀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귈스트림의 아내는 사건 당일 그의 행적에 대해 "나와 함께 있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1년이 넘도록 진행된 수사 끝에 경찰은 그를 용의자에서 제외했다.

사건 9년 후, 귈스트림은 보돔 호수에 빠져 숨졌다. 극단적 선택이었다. 이후 귈스트림의 아내는 "남편이 알리바이를 조작해 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고 주장했다. 지인들도 그가 술에 취하면 "내가 보돔의 살인자"라고 털어놨다고 전했다.

다만 사적 공간에서 이뤄진 귈스트림의 '자백'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다. 그는 참전 후유증에 따른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다. 귈스트림을 싫어하던 가족과 이웃들이 이미 사망한 그를 범인으로 몰았다는 분석도 있다.

용의자② 붉은 얼룩이 튄 '수상한' 독일인

살인 사건 다음 날, 헬싱키 소재 병원에 독일 태생의 한 남자가 실려 왔다. 그의 이름은 한스 아스만. 보돔 호수 근처에 사는 '수상한 남자'였다. 평소부터 소련의 스파이라거나 다른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는 등 소문이 좋지 않았던 아스만의 옷에는 흙과 함께 붉은색 얼룩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의심스러운 행적은 이뿐이 아니었다. 아스만은 '보돔 호수 살인 사건 범인은 금발'이라는 언론 보도가 나오자 머리카락을 깎았다. 최면 상태에서 이뤄진 구스타프손 진술을 바탕으로 그린 몽타주와 얼굴이 닮았다는 말도 나왔다. 그가 방문한 병원에서 일하던 의사 요르마 팔로는 아스만에 대해 "의식이 없는 척하고 있었다"며 그를 범인으로 지목한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은 아스만에겐 명백한 알리바이가 있다고 밝혔다. 사생활을 이유로 구체적 내용을 공개하진 않았는데, 이는 2005년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사건 당일 내연 관계였던 여성의 헬싱키 아파트에 머물렀던 것으로 조사됐다. 연인뿐 아니라 연인의 여동생 부부도 이를 확인했다. 경찰은 팔로의 책도 '허구'라며 공개 반박했다.

용의자③ 범인으로 몰린 생존자, 구스타프손

반세기가 지나도록 풀리지 않던 보돔 호수의 미스터리는 2000년대 들어 반전을 맞는다. 생존자였던 구스타프손이 2004년 이 사건 살인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다음 해 열린 재판에서 핀란드 검찰은 그에게 종신형을 구형했다.

검찰이 재구성한 범행 개요는 이렇다. "술에 취한 구스타프손이 친구들과 크게 싸웠고, 비외르클룬드에게 치근대다가 거부당했다. 친구들을 죽인 그가 흉기를 버리고, 의심을 피하려 자해했다." 비외르클룬드의 시신에는 그가 숨을 거둔 이후에도 10차례 이상 칼에 찔린 흔적이 남았다는 사실도 이런 추정을 뒷받침했다. 특히 구스타프손이 체포된 후 "사건은 이미 벌어졌고, 난 15년형을 받을 것"이라고 털어놨다는 한 경찰관의 증언도 있었다.

그러나 검찰 주장은 '가설'이나 '심증' 수준에 그쳤다. 구스타프손의 자백에 가까운 말도 공식 심문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법원은 2005년 10월 7일 구스타프손이 피해자라는 결론을 내렸다.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일부 사실 관계가 불분명하지만, 무죄 추정 원칙상 그를 가해자로 보긴 어렵다”고 밝혔다. 검찰은 항소를 포기했고, 구스타프손은 보상금을 받았다.

다시 미제가 돼 버린 살인 사건

구스타프손의 재판 후, 경찰 수사는 사실상 중단됐다. 현지 언론은 핀란드 중앙형사경찰서 관계자를 인용해 "현재 보돔 호수 살인 사건에 대해 진행되는 수사는 없다"고 전했다. 사건 관련 제보는 꾸준히 들어오지만 "대부분 이미 수사를 마친 내용"이라는 게 경찰 입장이다.

핀란드에서 보돔 호수 살인 사건은 '현재 진행형 미제'다. 이 사건의 영향을 받은 영화와 드라마도 최근까지 수차례 만들어졌고, 보돔 호수 이름을 딴 유명 밴드도 존재한다. 2019년에는 헬싱키 대학 고고학과 학생들이 범인의 흔적을 찾으러 현장을 살폈다. 지금도 보돔 호수 이야기가 나오면 핀란드인들은 저마다 이 끔찍한 살인 사건의 진범에 대한 추론을 내놓고 있다. 정답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보돔 호수만이 알고 있는 상태다.

전혼잎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