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만과의 '굿'바이

입력
2023.03.01 18:00
26면
SM 경영권 분쟁… '이수만 1인 체제' 그림자 드러나
‘선 기획 후 캐스팅’ 등 이수만의 공로는 분명
 31일 SM 주총,  '이수만 이후' K팝의 시험대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1980년대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기자에게 ‘이수만’이라는 이름은 프로듀서가 아닌 가수나 방송진행자(MC)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는 1970년대 포크, 록 음악에서 출발해 이후 디스코풍 전자음악까지 선보였지만 가수로서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얼굴이 길다는 공통점 때문에 이문세, 유열과 함께 ‘마(馬)3 트리오’로 묶였던 그는 여러 방송 프로그램이 앞다퉈 모셔가던 특급 방송진행자였다. 30여 년 전 기억 속의 이수만과 현재 초대형 연예기획사의 막후 실세인 이수만 사이의 간극이 아스라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지난달 10일 이수만 SM엔터테이먼트 전 총괄 프로듀서가 자신의 SM 주식 지분 대부분을 방탄소년단(BTS) 소속사 하이브에 매각한다는 깜짝 뉴스가 나온 뒤 대중음악계에는 바람 잘 날이 없다.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는 별별 얘기들이 다 나오지만, 현 SM 경영진이 이 전 총괄에 대해 제기한 의혹들은 꽤나 자극적이다. 한 대중음악평론가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현 제1야당 대표에 버금갈 정도로 의혹의 중심에 서 있다.

이번 사태로 ‘K팝 황제’로서 그의 이미지가 손상된 건 확실하다. 그렇다고 일찌감치 한국 대중음악의 미래를 고민한 그의 혜안이나 열정마저 과소평가받아선 안 된다는 생각이다. 본격적으로 프로듀서 활동을 시작한 80년대 후반부터 그는 노래 한 곡도 클럽용, TV용, 라디오용으로 구분해 만들 정도로 디테일을 챙겼다. 일본에 진출시킬 가수로 초등학생 보아를 점찍은 뒤, 춤과 안무를 연습시키기 전 정확한 일본어를 가르치기 위해 도쿄의 일본 방송국 여성 아나운서 집에 머물도록 한 것도 잘 알려진 일이다. 중국에 진출시키려는 연습생들에게는 자신이 직접 만든 중국어 교재로 ‘서바이벌 중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노래를 잘하는 인재에게 좋은 곡을 주고 부르게 하던 기존 방식을 탈피해, 먼저 타깃층을 정하고 전략을 세운 뒤 리듬과 곡을 결정한 다음 곡에 맞는 가수를 찾는 ‘선 기획 후 캐스팅’ 방식을 선도한 이도 이수만이다.

SM을 설립한 초기 야심만만하게 데뷔시켰던 현진영이 마약사건에 연루돼 사업이 풍비박산 나고, 소속 연예인들과 ‘노예계약’ 논란에 휘말리는 등 SM 역사에도 그늘은 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팝 선도자’라는 이수만에 대한 평가는 달라지지 않는다. 역외탈세, 별도회사를 통한 이익 편취 등 이수만을 둘러싼 최근의 의혹들도 당국의 조사로 실체가 드러나거나, 이달 31일 SM 주주총회에서 평가가 내려질 것이다. 특히 이번은 마지막 시험대일 수밖에 없다. K팝의 종가(宗家)를 자부하는 SM이 SM의 알파이자 오메가였던 이수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아니면 SM이 ‘핑크블러드’로 상징되는 이수만의 색깔을 그대로 계승할지 판가름 난다.

대중에게 ‘새로운 감각’을 제공할 수 있다면 1인 지배든 다른 형태든 누가 SM을 맡아도 상관없다는 입장이다. 그런 점에서 역외탈세나 황제경영 논란 같은 음악 외적인 추문보다도 이수만이 소속 가수들 곡에 ‘나무심기’ 내용의 가사를 넣도록 했다는 주장은 더 심각하게 느껴진다. 사실이라면 특정 목적(환경운동)을 위해 권력으로 음악과 가수들을 이용한 사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음악적 자신감을 잃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혹시라도 음악에 전심전력했던 초기의 열정과 순정함, 장인 정신을 포기했다면 이제는 완벽하게 2선으로 물러나는 것이 옳다. 다만 그것은 이수만 이후 SM, 이수만 이후 K팝을 이끌어가야 할 후배들에게 크나큰 도전이 되리라는 점도 분명하다.




이왕구 문화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