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반발한 구소련 베테랑들

입력
2023.03.1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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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에너미 앳 더 게이트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Enemy at the Gates)’는 미국 작가 윌리엄 크레이그의 1973년 논픽션을 원작 삼아,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유럽 자본으로 프랑스 영화감독 장 자크 아노가 만든 영화다. 2차대전 구소련의 전설적 저격수 바실리 자이체프를 앞세워 그가 독일 최고의 저격수와 벌인 (가상의) 대결을 뼈대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양상을 그렸다. 영국 배우 주드 로가 자이체프 역을 맡아 열연한 그 영화는 2001년 3월 16일 개봉됐다.

러시아제국 오렌부르크의 산골 오지 옐레닌카에서 태어나 사냥으로 잔뼈를 키운 자이체프는 1937년 구소련 해군에 입대, 흑해함대 해군 육전대 소속 저격수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됐다. 그는 1942년 11월 10일부터 12월 7일까지 채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독일군 저격수 11명을 포함해 225명을 사살했다. 영웅 칭호를 받고 볼셰비키 당원이 된 그는 박격포 부상으로 1943년 1월 눈을 다친 뒤 저격수 훈련교관으로 변신해 수많은 저격수들을 양산했다. 그는 대위로 예편한 뒤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섬유공학을 공부해 기술자-공장장으로 일하다 소비에트 해체 직전인 1991년 12월 15일 숨졌다. 그는 2차대전 승전의 주역이자 구소련 성쇠의 상징적 존재였다.

2차대전 최악의 전투로 기록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은 약 112만여 명(추축국 80만~100만 명)이 희생됐고, 마침내 승리함으로써 동부전선의 전세를 뒤집었다. 그만큼 저 전투의 베테랑들은 자신들이 조국을, 세계를 지켜냈다는 남다른 자부심을 과시해왔다. 그들은 저 영화의 러시아 상영을 반대하며 캠페인을 벌였다. 영화 자체가 지닌 고증적 허점과 한계 이면에는 서구 자본으로 서구인이 출연해 만든 자본주의 영화에 대한 반감과 민족적 자부심, 한 영웅의 그림자에 가려진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한 전우애가 깔려 있었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