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 "은퇴하면 축구계 떠난다… 남 가르칠 능력은 없어"

2024.03.18 17:21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주장 손흥민(32·토트넘)이 은퇴하면 축구계를 떠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18일 패션 매거진 '하퍼스 바자' 코리아가 공개한 인터뷰에서 "'은퇴하면 축구에 관한 일은 안 할 것'이라고 한 과거 발언이 여전히 유효하냐"는 질문에 손흥민은 "그렇다. 이 마음은 평생 변하지 않을 것 같다. 나와의 약속이고 이미 결정을 내린 부분"이라고 답했다. 축구지도자의 길도 걷지 않겠다고 밝혔다. 손흥민은 "축구를 사랑하고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을 가르칠 능력이 없다"며 "나는 직접 공을 차는 순간을 사랑한다"고 말했다. 다만 "(은퇴 이후에도) 축구 팬으로서 축구와 가깝게 지낼 것"이라고 덧붙였다. 축구에 대한 애정도 드러냈다. '축구가 지독한 짝사랑이라고 느낀 순간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언제나 축구 때문에 울고 웃었는데 깊이 생각해보면 짝사랑이라고 느낀 순간은 없다"며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고 답했다. 또 "다른 일을 하다가도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축구 영상을 보고 있고, 차를 타고 가다가도 나도 모르게 창밖으로 길거리에서 축구하는 아이들을 유심히 구경하고 있다"며 "나의 모든 사적인 순간 하나하나가 축구와 연결돼 있다고 느낀다"고 했다. 현역 선수로서의 욕심과 포부도 드러냈다. 손흥민은 "축구 선수 손흥민은 밖으로 보이지 않을 뿐 욕심이 정말 많다"며 "매 경기 이기고 싶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지금처럼 내가 받은 사랑을 돌려드릴 수 있는 행복한 축구 선수가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뛴 손흥민은 이날 오후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태국과의 2연전(21일)에 대비한 첫 훈련에 합류하기 위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저출생 위기에 '차관 부부' 네쌍둥이 돌잔치 직접 챙겼다

국내 저출생 정책 주관부서인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 '차관 부부'가 첫돌을 맞은 네쌍둥이 가족을 방문해 축하했다. 18일 지난해 네쌍둥이를 출산한 송리원·차지혜 부부에 따르면 이기일 보건복지부 1차관과 신영숙 여성가족부 차관은 지난 15일 이들 부부의 집을 찾았다. 송씨 부부는 지난해 3월 16일 초산으로는 국내 처음으로 자연분만을 통해 일란성 쌍둥이 딸과 셋째 아들, 막내딸을 얻었다. 네쌍둥이의 이름은 각각 리지(여), 록시(여), 비전(남), 설록(여)이다. 네쌍둥이의 첫돌은 16일이지만 차관 부부는 가족들만의 시간을 방해할 것을 우려해 하루 전날 아이들 이름을 새긴 돌 축하 케이크를 가지고 깜짝 방문했다고 한다. 네쌍둥이가 함께 탈 수 있는 유모차(왜건)도 선물했다. 두 차관은 비밀리에 네쌍둥이 집을 찾아갔지만, 차씨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이 차관과 신 차관의 자택 방문 사진과 손편지를 공개하면서 외부에 알려졌다. 이 차관과 신 차관은 손편지에 "지난해 봄 선물같이 우리에게 찾아온 리지, 록시, 비전, 설록의 첫돌을 축하한다.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처럼 지혜를 가지고(리지), 남에게 베풀며(록시), 밝은 미래를 만들며(비전), 타인에게 경청하는(설록) 멋진 사람으로 자라길 진심으로 기원한다"고 적었다. 이 차관은 지난해 5월 18일 송씨 부부가 재직 중인 회사를 찾아 임신과 출산, 양육과정의 어려움을 청취했다. 또 네쌍둥이의 100일도 직접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 차관과 신 차관은 1993년 행정고시 37회로 나란히 공직에 입문한 뒤 부부의 연을 맺었다. 같은 시기 차관직을 수행하는 '차관 부부'는 이들이 사실상 첫 사례다.

스포츠 '약물'의 혈관을 움켜쥔 과학자

고대 그리스 올림픽 참가자들은 그들의 주신(主神) 제우스 신전에서 정정당당한 대결을 다짐하는 선서(Olympic Oath)를 했다. 그 의례는 1920년 벨기에 안트베르펜 올림픽에서 부활, 매회 이슈에 따라 문구를 수정해가며 지금도 행해진다. 예컨대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1961년 선서문에서 ‘국가의 명예’란 구절을 ‘팀의 명예’로 대체했다. 민족주의와 이념-국가 간 과열 경쟁을 지양하자는 취지였다. 소위 스포츠맨십에는 너절하게 넘치는 개인-집단의 욕망까지 제어하고자 하는 아름다움이 있다. 2021년 IOC가 근대올림픽 창시자 쿠베르탱이 1894년 채택한 올림픽 표어(Olympic Motto)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Citius, Altius, Fortius)’에 ‘다 함께(Communiter)’란 가치를 더한 것도 그런 예다. 올림픽 정신에 담긴 연대와 평화, 도덕적 고양을 향한 염원이 저 낱말 하나로 더 선명해졌다. 하지만 언제나 이상은 현실이란 보색의 잔상으로 더 선명해지는 법. 스포츠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올림픽 선서에 ‘도핑(dopping)’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0년 호주 시드니 올림픽에서다. 도핑이란 금지약물로 지정된 통칭 ‘경기력 향상 약물(PED)’을 복용하거나 주사해 기량보다 나은 성적을 꾀하는 부정행위를 가리킨다. 그 대회 개막식 선수단 대표는 “모든 선수의 이름으로(…) 도핑 없이(without doping) 경기에 전념할 것을 다짐”했다. 한 해 전인 1999년 IOC는 도핑과의 전면전을 선언하며 금지약물 선정 및 테스트 등을 전담할 세계반도핑기구(WADA)를 설립했다. 올림픽 반(反)도핑의 시작은 1967년 말 IOC 의료위원회가 설립되면서부터였다. 의료위의 3대 원칙은 선수 건강 관리와 의료 윤리, 공정 경쟁이었고, 도핑 방지는 작은 일부였다. 그해 7월 BBC 선정 1965년 ‘올해의 선수’인 영국 사이클 선수 토미 심슨(Tommy Simpson)이 유서 깊은 국제사이클대회 ‘투르 드 프랑스’ 경기 도중 숨졌다. “10번 해서 죽는다면 9번 해서 이긴다(If it takes ten to kill you, take nine and win)”가 좌우명이었다는 그의 ‘10번’은 심장의 한계를 넘어선 페달링이 아니라 약물(암페타민 화합물)이었다. 더 앞서 60년 8월 로마올림픽의 덴마크 사이클 선수 크누드 옌센(Knud Jensen)도 100km 단체 레이스 도중 넘어져 두개골 골절로 숨졌다. 그의 몸에서도 다량의 암페타민이 검출됐다. IOC는 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부터 도핑 테스트를 의무화했다. 당시 금지약물은 마약성 진통제와 각성제, 흥분제 등 일반적인 것들이어서, 대표적 금지약물인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나 인간성장호르몬(HGH) 등은 목록에도 없었다. 스테로이드의 경우 이미 30년대부터 약성이 알려져 일부 선수들이 복용한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당시엔 테스트 기술이 없었다. 스테로이드는 75년에야 금지약물로 지정돼 76년 몬트리올 올림픽서부터 테스트가 시작됐다. 그사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약물의 힘으로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 시상대까지 달렸을지는 알 수 없다. 반도핑은 숙명적으로 도핑에 후행한다. 신종 마약처럼 신종 금지약물도 검사를 피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변형되지만, WADA가 그 존재를 파악하고 신뢰할 만한 테스트 기법을 개발하는 덴 상당한 시간과 돈이 든다. 근년의 IOC가 선수의 혈액 등 샘플을 10년 동안 보관하며 주기적으로 재검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68년 이래 2020년 도쿄올림픽까지 52년 간 173개의 메달(금메달 57개)이 도핑 검사로 박탈됐고, 그 중 상당수는 시상식 수년 뒤에야 이뤄졌다. 미국인 내과의 겸 내분비학자 돈 캐틀린(Donald “Don" Catlin)은 ‘반도핑의 개척자’라 불렸다. 그는 1982년 사실상 세계 최초로 반도핑 연구 및 테스트 전문기관인 ‘UCLA 올림픽 분석 연구소’를 설립, 합성 스테로이드 등 여러 종의 금지약물 검출 기법을 개발하고, 인체가 분비하는 천연 호르몬과 흡사한 구조로 합성된 소위 ‘디자이너 약물’ 다수를 최초로 발견하는 등 반도핑 과학을 이끌었다. 84년 LA올림픽부터 2008년 베이징올림픽까지, 또 전미대학체육협회와 메이저리그(MLB). 미식축구연맹(NFL) 등 미국 프로 스포츠 선수를 대상으로 한 반도핑 업무를 총괄 지휘하거나 자문했다. 그가 반도핑 연구를 한 건 스포츠맨십 때문이 아니라 선수 건강과 생명을 위해서였다. 그가 별세했다. 향년 85세. 문헌 등에 따르면 도핑은 고대 올림픽(BC 776~AD 393년)에선 일반적 관행이었다. 월계관의 영예와 함께 큰 상금이 걸린 올림피아의 제전에 참가하는 선수들은 온갖 약초와 와인몰약, 환각제 등을 공공연히 복용했고 주술적 의미로 동물 심장이나 고환을 먹기도 했다. 로마 검투사들과 전차 경주 참가자들도 꿀로 만든 알코올 음료 ‘하이드로멜(hydromel)’을 마셨고, 환각제와 치명적 각성제 스트리크닌(strychnine)으로 두려움을 넘어섰다. 승부 조작이 아닌 한 모든 게 허용됐고, 당연히 도핑이란 개념 자체도 없었다. 점액질 아편 주스를 일컫던 중세 네덜란드어 ‘도우프(doop)’에서 유래했다는 도핑이란 말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도 불분명하다. 19세기 말 약리학이 발전하면서 코카인 등을 섞은 전문 약물이 등장한 이후라 추정될 뿐이다. 투르 드 프랑스의 사이클 선수들은 근육 피로를 덜고 지구력을 높이기 위해 코카잎 추출물 성분이 든 와인 ‘뱅 마리아니(Vin Mariani)’를 물처럼 마셨다. 올림픽 최초라 알려진 도핑의 주인공은 1904년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마라톤 결승선을 통과한 뒤 쓰러진 미국 마라토너 토머스 힉스(Thomas Hicks)가 꼽힌다. 그는 치사량에 가까운 스트리크닌을 섞은 브랜디를 마시고 출전해 어쨌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차대전 군인들은 나치 연합국 할 것 없이 전투력 향상을 위해 국가가 보급한 아편과 헤로인 등을 복용했고, 약물은 전후 스포츠계로 흘러들었다.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제제가 미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아 처음 출시된 건 1958년이었다. 그 약의 오남용과 부작용에 따른 비극이 얼마나 심했던지, 약을 세상에 내놓은 미국 내과의 존 보슬리 지글러(1920~1983)가 말년에 자신의 발명을 후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돈 캐틀린은 1938년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서 태어나 60년 예일대(통계학, 심리학)를 거쳐 65년 뉴욕 로체스터 의대를 졸업했다. 3년 간 캘리포니아 의대와 UCLA 등서 수련의-전공의 과정을 마친 뒤 육군에 입대, 만 3년(69~72년) 워싱턴D.C의 월터 리드(Walter Reed) 군 메디컬센터에서 근무했다. 그는 거기서 마약에 중독된 수많은 베트남전 군인들을 만났다. 당시는 2차대전 때와 달리 군대 내 마약이 엄격히 통제되던 때였다. 2007년 USA투데이 인터뷰에서 그는 “중독자는 의학적 치료 대상이지 처벌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국방부 장군들과 맞선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항변은 물론 부질없었다. 제대 후 UCLA 의대 약리-의학대 조교수로 임용돼 임상 약리학과 내분비학 특히 주전공인 통증 관리 연구를 지속했고, 77년 논문으로 인체 뇌하수체에서 분비되는 모르핀 유사 물질(엔돌핀)이 진통 효과와 더불어 마약 금단증상을 완화한다는 사실을 처음 밝히기도 했다. 그가 82년 대학에 스포츠 약물 연구소를 설립하며 저 혼탁한 늪에 뛰어든 계기는 불분명하다. 다만 2년 뒤 예정된 LA올림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도핑 논란이 동서 갈등과 이념 대결의 대리전 양상으로 격화하던 때였다. 68년 올림픽 이래 서독과 따로 출전한 동독이 독일 단일팀 시절보다 훨씬 앞선 메달 순위 5위를 기록하고 72년 뮌헨올림픽에서는 구소련과 미국에 이어 3위, 76년(몬트리올)과 80년(모스크바) 올림픽에서 연거푸 2위를 차지했다. 국가 차원에서 진행된 도핑 덕이라는 의혹이 팽배했다. 그 의혹은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구동독 선수(출신)들의 양심선언과 진상조사 등을 통해 대부분 사실로 밝혀졌고, 도핑 선수 및 자녀들이 심각한 약물 후유증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미국과 서독 등 유럽 선수들도 약물의 유혹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83년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열린 미주 종합스포츠경기대회(Pan American Games) 때는 스테로이드 검사가 추가되면서 미국 선수 12명을 포함 총 24명이 대회 직전 출전을 포기했고, 출전 선수 중 19명도 약물 양성 판정을 받았다. 캐틀린은 2007년까지 만 25년 연구소를 이끌었고, 은퇴 전후 비영리단체인 반도핑연구소(Anti-Doping Research Inc.)와 금지약물통제그룹(BSCG)을 잇달아 설립해 숨지기 직전까지 WADA와 미국반도핑기구(USADA), NFL을 비롯한 각종 스포츠기관-단체의 반도핑 업무를 거들었다. 그는 90년대 탄소동위원소 질량분석 기법으로 체외에서 주입된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과 아나볼릭 스테로이드 등을 검출하는 기법을 처음 개발했고,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는 빈혈약으로 개발된 적혈구 생성 물질 에리스로포이에틴(EPO, Erythropoietin)과 스테로이드 성분의 디자이너 약물(norbolethone)을 역시 최초로 검출해냈다. 전자는 단기 심폐-지구력 향상에 도움을 주지만 심장마비와 뇌졸중 등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고, 성장 촉진 및 비만 치료제로 개발된 후자 역시 강력한 면역억제 작용 등으로 퇴행성 질환과 궤양 등을 유발해 목숨을 위협할 수 있는 약물이다. 동독 사태 이래 최대의 약물 스캔들로 기록된 2003년 미국의 ‘발코(BALCO) 스캔들’ 수사에도 그는 결정적으로 개입했다. 캘리포니아 베이 지역의 한 연구소가 기존 테스트 기법으로는 검출되지 않는 신종 스테로이드성 디자이너 약물 ‘테트라하이드로게스트리논(THG)’ 등 다수의 약물을 개발해 메이저리그의 아메리칸리그 전 MVP 제이슨 지앰비(Jason Giambi), 전설의 강타자 배리 본즈(Barry Bonds), 올림픽 육상 단거리 스타 매리언 존스(Marion Jones) 등 1급 선수들에게 은밀히 공급한 사건. 미 국세청과 FBI, USADA 등의 합동조사에서 캐틀린은 ‘더 클리어(The Clear) 등으로 불린 약물들의 정체를 확인했다. 당시 담당 수사관이 입수한 관련자 메일에는 “캐틀린이 (약물을) 알아챘어. 다른 것으로 바꾸는 게 낫겠어”라는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캐틀린은 켄터키 더비 등에 출전하는 말의 혈액증강 약물 ‘세라(CERA)’를 판독하는 등 반도핑 영역을 경주마로 확장했고, 2000년대 워싱턴포스트 의뢰로 건강보조식품과 피트니스 보충제에서 스테로이드 성분과 간독성 물질 등을 2차례에 걸쳐 조사, 당국의 대대적인 수사를 돕기도 했다. 캐틀린이 뭔가를 찾아낼 때마다 선수들은 자격정지나 영구 퇴출, 메달 박탈, 기소-구속 등을 당하곤 했다. 그의 헌신 덕에 스포츠 경쟁 무대는 얼마간 신뢰를 회복했고, 다수의 피해자들이 뒤늦게나마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 물론 그들은 포디움에 서는 영광과 CF 등 부수적인 기회는 박탈당했다. 그는 2007년 뉴사이언티스트 매거진 인터뷰에서 자신의 일을 ‘시시포스의 숙명’에 비유했다. “따라잡기 위해 쉼 없이 분투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전세계 질량분석기를 총동원하고 모든 화학자가 매달려도 도핑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신종 약물들을 찾아내기 위한 기술과 장비 개발에 점점 더 많은 비용이 든다”고 말했다. 말년의 그는 자신이 감당해온 그 숙명의 언덕이 점점 더 높아져가는 현실도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그의 영역은 아니었지만 도핑의 세계는, 골프의 경로 탐색 등 종목별 기능에 특화한 안경과 삽입렌즈, 근육에 산소를 공급하고 부력을 강화해주는 특수 수영복 등 테크노 도핑(techno-doping)과 선수의 특정 유전자를 변형시키는 유전자 도핑(gene-doping), 뇌 자극을 통해 투지나 동기 등을 강화하는 신경 도핑(neuro-doping) 등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도핑 규제의 한계가 명백한 만큼 도핑의 유혹을 뿌리치고 정직하게 경기에 임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선의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건강-생명에 지장에 없는 한 원칙적으로 도핑을 허용하자는 주장도 스포츠계 일각에서 진지하게 제기되고 있다. 캐틀린도 “타락한 선수들에게 너무 집중해 어딘가 있을 난해한 약물의 마지막 작은 분자를 찾는 데 엄청난 돈을 쓰기보다 좋은 선수들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선수의 혈액과 소변 성분 등을 장기간 데이터화해 특정 수치의 비정상적인 변화를 모니터링하는 ‘선수 생체 여권(ABP, Athlete Biological Passport)’을 유력한 대안으로 여겼다. 아버지와 함께 연구소를 운영해온 장남 올리버는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NFL 선수들이(…) 경기장을 떠난 지 5분 만에 숨지는 일이 없게 된 게 그들이 먹던 끔찍한 약물을 찾아내 못 먹게 한 덕분이라고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라고 반문했다.

"백신보다 나은 2700원 모기장, 아프리카 아이들 살린다"

"우리가 인터뷰하는 1시간 동안 아프리카에선 60명의 아이들이 말라리아로 죽습니다. 단돈 2달러(약 2,700원)짜리 모기장 몇십 개만 있어도 보호할 수 있는 생명들인데 말이죠. 한국이 이런 비극에 공감한다면 훌륭한 후원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1일 서울 중구 주한영국대사관에서 만난 그레엄 넬슨(43) 한국 말라리아 예방공동체(AMF 코리아) 이사는 유창한 한국어로 기부 동참을 호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영국에 본부를 둔 AMF는 지난 7일 서울시에 비영리민간단체로 등록하고 자선사업을 시작했다. AMF 코리아의 기틀을 다진 넬슨 이사는 "한국은 과거 가난을 극복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의 아픔에 공감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AMF는 지난 15년간 말라리아 퇴치를 위해 기부금의 99%를 살충제 처리가 된 모기장을 구입·배포하는 데 사용해왔다. 배포 지역은 주로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 파푸아뉴기니다. 여기선 매년 약 62만 명이 말라리아로 죽는데, 사망자의 70% 이상이 5세 이하 아동이다. 가까스로 살아남는 환자도 매년 2억 명 이상이나 된다. 넬슨 이사는 "말라리아에 걸린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전혀 못한다. 가족들도 간병을 위해 집을 팔거나 직장을 그만두면서 악순환이 이어진다"고 전했다. 말라리아 예방 백신이 있기는 하지만, 감염 예방 효과가 36~65% 수준에 그친다. 접종 대상도 6~18개월 영·유아로 제한된다. 즉 비용 대비 효과를 따져 보면 모기장이 압도적이다. AMF가 백신 대신 모기장 배포에 힘을 쏟는 이유다. 한정된 예산으로 최대한 많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AMF는 광고나 운영비를 최소화한다. AMF 정직원은 단 10명이고, 사비로 활동하는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는다. 넬슨 이사도 일과 시간엔 주한영국대사관의 정치참사관으로 일하고, AMF 활동은 퇴근 후 짬을 내서 한다. 주민들이 말라리아 감염을 피하면 농사나 교육 등 일상을 유지할 수 있어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된다. AMF는 지난해 1~9월 모기장 8,500만 개를 구입할 수 있는 기금을 모았는데, 이는 말라리아 감염 4,000만 건을 예방하면서 약 22억 달러 규모의 지역경제 개선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추산됐다. AMF 코리아가 생기기 전에도 국제 결제로 AMF에 기부를 해온 한국인들이 있다. 작년 한 해 동안 한국인이 기부한 모기장이 6,549개였다. 일본(5,005개)과 중국(649개)보다 많지만, 서양 국가들과 비교하면 매우 적다는 게 AMF 코리아 측 설명이다. 넬슨 이사는 "한국 사람들은 기부를 많이 하려 해도 기부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걱정이나 회의감이 짙은 것 같다"며 "한국은 교육 수준이 높고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인구 비율이 높은 만큼, 기부금 사용의 효율성을 강조하면 참여를 더욱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AMF는 모기장 배포 내역과 후원금 계좌를 홈페이지에 실시간으로 공개한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다는 넬슨 이사는 "과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돈을 투자할 때 가치를 따져 본다. (기부도 마찬가지로) 후원자들의 소중한 기부금을 가치 있게 사용하고 최대한의 성과를 내는 것이 그들을 존중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AMF 코리아는 올해 한국 학생들과 함께하는 자선 운동회도 계획 중이다. AMF는 본래 자선 수영 캠페인으로 유명한데, 한국에서는 마라톤 등으로 활동 범위를 넓혀 참여를 촉진한다는 구상이다. "학생들이 말라리아로 고통받는 다른 나라 아이들을 위해 뭔가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고 넬슨 이사는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