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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힐 만하면 뉴스에서 듣게 되는 단어, 받침이 없어 걸리는 데 없이 단박에 쑤욱 들어오는 단어, 그러나 듣고 나선 글자 획 하나하나에 불편한 마음이 걸려 집단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단어, 유기(遺棄)!

‘유기(遺棄)’라는 단어를 오랫동안 나는 나와 내 주변과는 상관없는 타인의 언어라고 생각해 왔다. 심지어 사람에게는 쓰이지 않는, 다른 개체에나 소용되는 특수한 단어라고까지 생각했었다. 버려진 동물을 다룬 뉴스에서나 간혹 들었고 따라서 반려동물을 키워본 적도 없고 키워 볼 의사도 없는 나로서는 어쩌면 당연했다. 뉴스를 보거나 들으면 편치 않은 마음이 들어 인상은 써졌지만 거기까지였다. 버려진 주체가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어쩌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오만했다.

그런데, 전 세계에 두려움과 공포를 몰아오며 그야말로 코로나19가 들이닥쳤다.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였고 사회적 거리 두기로 경제는 바닥이 어딘지도 모르게 하강했다. 주인으로부터 버려진 개와 고양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는 뉴스가 자주 들린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신출귀몰한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최후의 보루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랑과 정마저 격파한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참 신기한 일이다. 배우지 않아도, 억지로 외우고 익히지 않아도 ‘아는’ 게 자꾸 많아진다. 온갖 경우의 수를 대입해 하나를 보면 열을 본 것만큼 이해 확장이 이루어진다. 버려진 반려동물들을 다루는 뉴스를 보며 TV 화면을 통해 내가 본 건, 보고 있었던 건, 퀭하게 파인 눈두덩과 등뼈가 드러나도록 마른 짐승들이 아니었다. 사람들이었다. 나는 버려진 사람들을 보았다. 끝도 없는 불안과 그보다 더 가파르게 치솟아 있는 그리움으로 위태로운 사람들, 굶주림보다 더 절박하게 사람을 상하게 하는 외로움과 그 외로움을 목줄처럼 걸고 방치당한 이 시대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나는 ‘유기’라는 단어와 정면으로 마주 섰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들만이었다면 이 글은 써지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 있다는 건 그래도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어서도 유기된 현장을 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본 가장 끔찍하고 가장 화나는 장면이었다.

어머니가 계신 추모공원에서였다. 추모공원 봉안당은 그곳에 안치된 후 10년마다 한 번씩 10년 치의 관리비를 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미납되어 그것을 알리는 고지서가 붙어있는 분들이 적지 않았다. 처음엔 내가 갈 때마다 편지를 붙이고 오듯이 그분들 앞에 붙어 있는 노란 직사각형 종이도 거기를 다녀간 후손들의 손편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관리비 미납이라니... 수개월 혹은 그보다 더 긴 세월 동안 아무도 다녀가지 않았다는 게 분명한 그 장면, 함께 간 아들 내외가 보고 있다는 게 어른으로서 부끄러워 온몸이 뜨거워졌다. 그러나 솔직히 그보다 더 컸던 건 아들 내외에게 그것이 있을 수 있는 일로 느껴지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었다. 아주 드물게 한 분 앞에만 그런 게 붙어 있었고 나 혼자 간 날이었다면, 대납을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도 그래서였다.

어떤 사람이 살아서 자신의 봉안묘를 구입하며 백 년 치의 관리비를 미리 냈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 말을 들었을 땐 ‘백 년’이라는 시간에만 초점이 맞춰져 탐욕이라는 생각에 불쾌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추모공원에서 봉안당 벽에 붙어 나부끼던 관리비 미납 고지서를 본 후론, 다른 각도로 생각이 바뀌었다. 기간만 떼고 본다면 자신이 안장될 묘지의 관리비 선납을 한 그 사람의 마음이 읽힌다. 비밀스럽게 따라 하고 싶은 마음까지 든다.

유기... 문법적으로 명사다. 뜻은 내버리고 돌아보지 않음. 버려진 개는 유기견이고, 버려진 고양이는 유기묘다. 그렇다면 버려진 사람은 당연히 유기인이 된다. 이들에게 공통적인 분모는 주인이나 가족, 즉 정 붙이고 산 핏줄이나 친지가 있었다는 것이다. 있었지만 그들로부터 버려졌다는 것이다. 의무와 도리로부터 버려졌던, 사랑과 애착으로부터 버려졌던, 인정과 나눔으로부터 버려졌던, 이전에 누군가와 함께 했던 시간과 기억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유기’라는 말이 붙지 않는다. 그래서 길짐승보다 유기된 짐승이 더 불쌍하다. 그래서 혈혈단신보다 가족과 친지로부터 유기된 사람이 더 불쌍하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한다는 데는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최선을 다한 책임이 사랑이라는 것에도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버려지고 있다. 내 몸 건사하기도 힘들어서, 생을 살아내기가 팍팍해서, 숨 한번 쉬면 바뀌는 세상이 너무 바빠서, 온갖 정을 주고받았던 개를 버리고 고양이도 버린다. 부모를 버리고 자식을 버리고 이웃을 버린다.

나를 뒤지는 날이 이어진다. 나는 버린 무엇이 없는가. 나는 무엇으로부터 버려진 건 아닌가. 내가 만든 유기인은 없는가. 내가 혹 유기인이 된 건 아닌가.

사랑을 부활시키고 싶은 마음이 절실해지는 즈음을 살고 있다.

서석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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