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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25시간처럼 살았던 백상 장기영. 한 손으로 전화를 받고, 한 손으로 서류를 보며, 눈으로 신문을 읽던 생전의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급변하는 사회에서도 옛것은 중요하다. 공자는 온고지신(溫故知新), 즉 옛것을 익혀야 새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실학자 박지원이 주장한 법고창신(法古創新)도 같은 뜻이다. 그러나 옛것과 전통만 지나치게 고집하면, 융통성을 잃은 바보가 된다. 스페인 침략군과 싸울 때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그랬다.

스페인군에 잡힌 아즈텍의 황제 목테수마 2세는 밤중에 몰래 탈출하면서 일부러 큰 고함을 질러 경비원들을 깨웠다. 다음 황제 콰우테목은 포위망을 뚫고 배로 도망칠 때 일부러 크고 화려한 배에 올라타서 집중 공격을 받았다. 그래서 둘 다 탈출에 실패했다. 황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해야 한다는 고대사회의 전통을 고수한 탓이다.

러일전쟁의 영웅이라는 일본의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장군도 마찬가지다. 러시아 극동함대가 정박하고 있던 뤼순 항구를 점령하려면,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해발 203m의 작은 야산을 점령해야 했다. 러시아군은 그 야산 꼭대기에 콘크리트로 요새를 만들고,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노기 장군은 평지에서 산꼭대기로 매일 아침 육탄돌격을 명령했다. 그 때마다 사망자가 속출했다. 13만명의 병사 중 6만명이 전사했고, 거기에는 노기의 두 아들도 있었다. 마침내 요새는 차지했지만, 상처뿐인 영광이었다. 결국 노기는 할복 자살로써 자신의 미련함을 후회했다.

융통성과 순발력은 전쟁터만이 아니라 일터에서도 중요하다. 일제강점기의 김교철이 좋은 예다. 그는 조선총독부 장학생으로 뽑혀 도쿄고등상업학교(현재 히토쓰바시대학교)를 졸업한 뒤 32세에 한일은행 군산지점 지배인이 되었다. 당시 군산은 일본으로 쌀을 내보내는 경제 중심지였다.

그러나 한일은행은 작은 은행이었다. 군산에서 큰 은행들과 경쟁하려면, 현지에 맞는 영업 전략이 필요했다. 그래서 김교철은 쌀가마니를 담보로 잡았다. 당시 군산에서는 쌀가마니가 오늘날의 반도체와 비슷했다. 그것이 없으면 쌀의 운반과 수출이 불가능하고, 경제 활동이 중단되었다. 담보로 제공할 땅과 건물이 없는 쌀장수들은 쌀가마니를 들고 한일은행을 찾았다.

그는 가는 곳마다 전례 없는 영업 방식을 찾았다. 원산에서는 마른 명태를, 서울에서는 쌀 창고 열쇠를 담보로 상인들에게 대출했다. 그런 기발한 영업 방식에 힘입어 광복 후 조흥은행장까지 올랐다. 융통성과 순발력이 뛰어났던 김교철은 자기 직업을 아주 자랑스러워했다. 일본 유학을 마친 삼남 김정렴(훗날 재무장관)도 조선은행에 취직시켰다.

그러나 은행원의 융통성과 순발력이 너무 강하면, 독이 된다. 김정렴의 상관인 장기영이 그랬다.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서울의 지식인들은 가재도구도 못 챙긴 채 급하게 부산으로 피란했다. 생존 능력이 떨어지는 고학력자들은 염치불구하고 친척집에 얹혀서 눈칫밥을 먹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자 한국은행 부총재 장기영이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직장의 명성만 보고 몇 달 치 월급을 신용대출하는 것이다.

그것은 은행 내규에도 없는, 위험천만한 모험이었다. 결국 제대로 갚는 사람이 없었다. 꼿꼿하기로 소문난 변영태 외무장관(시인 변영로의 형)만 갚았다. 장기영은 그 일로 인해서 사퇴를 종용받았다. 당시 장기영이 가계대출을 무리하게 추진한 이유는, 지식인들이 생활난에 쪼들려 좌경화되거나 반체제로 돌아서는 것을 막는 데 있었다. 약간의 대출 손실은 전쟁 중의 체제유지 비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개 은행원이 혼자서 추진하기에는 너무 큰 원고심려(遠考深慮)였다.

어느 시대, 어느 분야에서나 정공법과 임기응변, 고지식함과 순발력, 원칙과 파격이 대립한다. 대체로 한국인들은 원칙과 기초에 약한 반면, 순발력과 응용력은 강하다. 코로나바이러스와 싸우기 위해서 우리 의료진이 고안해 낸 ‘드라이브스루’ 검진 방법은 세계를 감동시켰다. 35년 전 새만금 간척사업 때는 고 정주영 회장이 폐유조선으로 바닷물을 막아 전 세계가 놀랐다. 이쯤 되면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말은 ‘정주영의 배’로 고쳐야 한다.

하지만 순발력과 응용력이 항상 성공할 수는 없다. 세상의 모든 혁신은 많은 시도와 실패를 자양분으로 삼는다. 그런데 실패와 실수만 문제 삼으면, 아무도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지 않는다. 규정과 전례만 따지게 된다. 그러므로 혁신은, 열심히 일하다가 그릇을 깨는 실수가 용납될 때 분출된다.

개인의 의지도 중요하다. 한 번의 실패와 실수에 좌절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포수인치(包羞忍恥), 즉 수치심을 품고 견디는 기개가 필요하다. 장기영이 그랬다.

장기영은 유난히 아이디어가 많아서 호가 백상(百想)이었다. 남달랐던 그의 꾀와 깡이 한국은행에서는 독이 되어 결국 그릇을 깼다. 하지만 그는 훗날 언론인, 경제부총리, 국회의원, IOC 위원으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질풍노도와 같았던 그의 삶은, 한국은행에서 그릇을 깬 실수를 포수인치한 결과다.

장기영은 한국은행에서 그릇을 깨고 쫓겨난 뒤 보란 듯이 한국일보를 일으켰다. 6월 9일은 그 한국일보의 생일이다.

차현진 한국은행 인재개발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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