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설정

에덴이라고 알려진 뮤지션 Jonathan Lei Ming, 2016 (출처: Wikipedia)

사진 속 인물은 ‘에덴’(Eden)이라 불리는 가수다. 구글을 통해 ‘eden’을 찾아 보면 제일 먼저 검색된다. 이 인물은 사진 속 표정이 항상 비슷한데 썩 밝아 보이지는 않다. 하지만 뭔가 상실한 듯한 이 애잔함은 사실 에덴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에덴을 소재로 한 대표적 작품을 꼽자면 밀턴의 17세기 작 ‘실낙원’일 것이다. 제목 자체만 보자면 성서 에덴의 의미를 잘 전달해 준다. 창세기의 첫 부분을 보면 낙원은 매우 짧게만 언급되어 있고, 나머지는 그 낙원을 잃은 후 발생한 인간 타락과 징벌에 관한 이야기다. 환상적인 에덴을 부여받지만, 인간은 곧이어 마치 추락하듯 낙원을 상실해 버린다. 본래 성서의 에덴은 하나님과 인간의 완벽한 관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죄로 인해 인간은 낙원을, 즉 신과의 올바른 관계를 상실한다. 성서의 에덴이 표방하려는 신학적 의미는 그러하다.

이 성서의 에덴을 인류 문화는 어떻게 받아들여 왔을까? 기독교의 꽃을 피운 유럽 문명을 대표적으로 보자. 많은 화폭 속의 에덴은 그야말로 이상(理想)이다. 남녀는 벗고 있지만 불편해하지 않고, 맹수와 가축은 다정하게 지낸다. 계절은 언제나 푸르며 겨울을 모른다. 문학 속 상상은 더 흥미롭다. 9세기의 ‘피닉스’ 속 낙원은 낙엽도 열매도 떨어지지 않으며 추위와 슬픔, 갈등도 없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14세기 작 ‘코케인의 땅’은 사람이 아무 수고도 할 필요가 없고 어느 이성과도 언제 어디서든 관계를 할 수 있는, 최상의 쾌락이 보장된 낙원을 상상한다. 가만히 누워 있어도 머리 위 원반이 돌면서 음식을 입에 곧장 떨어뜨려 주며, 새들과 가축은 구워진 채 등에는 포크와 나이프를 꽂아 놓고 사람 사이에 돌아다닌다.

언뜻 보기에는 성서 본래의 에덴과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성서의 에덴과 문화 속 에덴 모두 그 뒷맛이 씁쓸하기 때문이다. 이상이 높을수록 상실은 깊다. 이상이란 본래 현실과는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황홀한 낙원을 인간이 그릴수록, 그 이상은 결코 우리 손에 닿을 수 없다는 것도 우리는 재빠르게 인식하는 편이다.

이상적인 에덴 못지않게 자주 그려진 에덴의 장면이 있다. 바로 첫 인간인 아담과 이브가 뱀의 유혹을 받아 죄를 짓는 모습이다. 에덴을 그저 아름답게 그리기만 한 작품들에 비하면, 본래 성서가 말하고자 하는 에덴을 그 신학적 의의와 함께 잘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작품 속 인물들의 적나라한 누드는 그 신학적 무게감으로부터 우리의 눈길을 쉽게 빼앗아 버린다. 그 부끄러운 상실의 순간을 슬쩍 눈감아 보려 한 것일까? 역설은 그 장난질을 그치지 않는데,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누드 앞에 우리 눈은 감기는커녕 더 밝아지고 만다.

본래 성서의 에덴은 이상과 상실의 공간이다. 문화 속 에덴은 마치 이상만 드러내는 것 같지만 실은 아련한 상실감을 감추지 못한다. 저 사진 속 인물의 표정처럼 말이다. 당신은 죄인이라는 말보다 듣기 싫은 말이 있을까? 그래서 에덴은 누드촌이었다는 것으로 첫 타락의 순간을 외면해 보려 하지만, 도끼로 자기 발을 찍는 격이다. 물론 누드 감상이 꼭 죄악인 것은 아니라고 침 튀기며 항변하고 싶지만 동시에 겸연쩍다.

성서의 이야기들은 사실 신학적 옷을 입고 문자로 기록되기 전, 오랜 세월 동안 인간 사회에 회람되면서 농익은 전승들이다. 당연히 인간 내면 심연의 무언가를 품고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성서의 에덴과 문화 속 에덴은 우리 인간 경험의 깊은 것을 공유한다. 황홀한 이상은 곧 애잔한 상실이라는 것이다. (이 글은 국립춘천박물관이 현재 진행하고 문화대학에서 저자가 지난 6월 11일에 강연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 개최 측의 초청에 다시금 감사드린다.)

기민석 목사ㆍ침례신학대 구약성서학 교수

web_cdn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