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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대통령의 철학 
 
 ※시대의 독설가, 피아 구분 없는 저격수를 자처하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여러 현상들을 미디어 이론을 통해 조명해보는 글을 씁니다. 매주 목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대통령의 연설에는 철학과 비전이 담겨야 한다. 2000년 12월 노르웨이 오슬로시청에서 노벨평화상 수상 직후 연설하고 있는 김대중(왼쪽부터) 대통령, 2007년 개헌 관련 연설을 하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지난 5월 취임 3주년 특별연설을 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오슬로=연합뉴스ㆍ한국일보 자료사진ㆍ연합뉴스

조지 6세는 훌륭한 연사가 아니었다. 그는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그런데도 1939년에 행한 그의 대독 선전포고 연설은 사상최고의 연설 중 하나로 꼽힌다. 더듬지 않으려고 때때로 문장을 끊고 숨을 고를 때, 거기서 우리는 국가를 위해 능력을 넘어선, 거의 불가능한 임무를 떠맡아 제 한계에 맞서는 한 인간의 고투를 본다. 그의 사명감은 연설을 듣는 영국의 국민에게 고스란히 전해졌을 것이다.

 ◇대통령의 연설 

전설적인 연설들이 있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 미국이라는 국가의 민주적 정체성을 천명한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 소련으로부터 자유국가를 수호하겠다는 미국의 약속을 전 세계에 발신한 케네디의 베를린 장벽 연설. 그리고 “군산복합체”의 위험을 경고한 아이젠하워의 마지막 연설. 이때 그가 경고했던 많은 것들이 훗날 현실로 드러난다.

우리에게도 한때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연설가들이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혹독한 군사정권 시절 독재에 신음하는 국민에게 언젠가 실현될 민주국가의 비전을 보여주었다. 재임 중에는 ‘지식기반경제’의 표어로 디지털 경제의 방향을 제시했다. 퇴임 후 보수정권 아래서는 민주주의의 후퇴를 목도하고 국민의 역할을 촉구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수사학의 대가였다. “그럼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장인의 좌익경력이 문제가 됐을 때 그는 이 한마디로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켰다. 현장의 감동을 살리려고 그는 종종 원고를 무시하고 즉석연설을 즐겼다. 격식을 깨는 투박하고 솔직한 어법은 청중을 매료시켰고, 거기서 아직도 인용되는 수많은 명언이 탄생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연설에는 철학이 없다는 비판에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을 지낸 윤영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페이스북에 문 대통령이 직접 원고를 고치는 모습을 올리며 반박했다. 윤영찬 의원 페이스북 캡처
 
 ◇철학의 빈곤 

지난주 전현직 청와대 참모들과 가벼운(?) 설전이 있었다. 발단은 어느 강연에서 한 나의 발언. 얼마 전 대통령이 ‘위안부 운동을 흔들어서는 안 되며 시민단체의 회계는 투명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한 달을 기다려 들은 대통령의 발언이 실망스러웠나 보다. 질의응답 시간에 누군가가 내 의견을 물었다. ‘대통령이라면 사회정의를 위해 더 적극적인 역할을 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지적에 동의하며 나는 “문재인 대통령은 김대중ㆍ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철학이 없다. 남이 써 준 원고나 읽는 의전 대통령 같은 느낌”이라고 답했다. 이 말에 전직 청와대 참모들이 일제히 발끈했다. 내 말을 반박한다며 대통령이 원고를 교정하는 사진을 올렸다. ‘철학의 부재’를 고작 ‘교정의 존재’로 반박하는 걸 보니, 내심 김대중ㆍ노무현이 아니라 박근혜를 경쟁자로 여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히스테리는 징후적이다. 만약 내가 ‘김대중ㆍ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는 철학이 없다’고 했다면 어땠을까? 다들 웃어넘겼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문 대통령은 철학이 없다’는 말은 그렇게 우습게 들리지 않는다. 김 전 대통령은 남북화해의 신념을 지키려 ‘빨갱이’ 누명을 무릅썼고, 노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와 싸우려 확정된 패배를 각오했다. 문 대통령에게는 그런 도덕적 추진력(virtus)이 보이지 않는다.

 ◇야쿠자의 도덕 

철학의 빈곤은 통치에 반영되기 마련이다. 이번 대통령의 발언에는 정작 국민이 듣고자 했던 얘기가 쏙 빠져 있었다. ‘윤미향의 거취를 어찌할 것인가?’ 여당은 범법만 없으면 문제없다며 판단을 검찰에 맡겼다. 반면 국민 대다수는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이용수님과의 갈등은 차치하고 회계부실, 안성쉼터, 개인통장 등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윤미향이 의원직에 필요한 도덕적 자격을 잃었다고 보았다.

판단의 기로에서 대통령은 여당 편에 섰다. 그냥 회계를 개선하는 선에서 마무리하자는 인식이다. 문제는 그가 따라간 여당의 윤리관념이 ‘법만 지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야쿠자 도덕이라는 데에 있다. 법은 윤리의 극히 일부만 규제한다. 위법이 아닌 부도덕도 수없이 많다. 사업을 합법적으로 한다고 야쿠자가 어디 윤리적이던가? 그런데 이 야쿠자 도덕을 공직임명의 원칙으로 추인해 준 것이다.

국민의 70.4%가 윤미향 의원의 즉각 사퇴를 원했다. 국민 대다수는 법으로 규제할 영역과 윤리로 규제할 영역이 따로 있다고 본다는 얘기다. 그런데 대통령에게는 이 구별이 없다. 대통령은 집권 여당이 아니라 국민 전체를 대표해야 한다. 여당이 윤리의 궤도에서 벗어났을 때에는 국민의 편에 서서 공공선을 수호했어야 한다. 하지만 대통령은 윤리적 개입을 포기하고 제 편 지키기’를 택했다.

이번뿐인가? 조국 전 장관도 범법만 아니면 된다는 참모의 건의에 따라 임명을 강행했다. 야쿠자 도덕이 이 나라 공직 임명의 기준이 된 것이다. 뒤늦게 조국을 내친 것도 도덕의 명령에 따른 윤리적 행위라기보다는 하락하는 지지율에 대한 물리적 반응에 가까웠다. 더 절망스러운 것은 그 이후의 발언. 그는 낙마한 조국 전 장관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했다. 이게 참모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의사봉을 치고 있다. 청와대 사진 기자단
 
 ◇대통령 윤리 

법이 작은 원이라면, 윤리는 그것을 포함한 큰 원이라 할 수 있다. 큰 원에서 작은 원을 뺀 여집합이 법적 판단과 별도로 존재하는 윤리적 판단의 영역이다. 바로 거기가 지도자의 도덕역량이 발휘되는 영역이며, 거기서 우리는 대통령의 통치철학을 엿본다. 하지만 ‘법=윤리’라는 야쿠자 등식은 그 영역을 증발시켜 버린다. 설 곳을 잃은 통치 철학은 이제 지지율의 정치공학으로 대체된다.

“대통령 윤리는 그가 자기를 위해 일하는 이들에게 정해주는 ‘기준’을 통해, 혹은 의회와 법원이 그들에게 정해주는 ‘기준’을 통해 가장 잘 알려진다.”(T. S. 질먼) 즉 대통령은 ‘기준’을 정해주는 행위로써 국가 공동체의 성격을 결정한다. 그렇게 중요한 임무를 대통령은 남에게 내준 채 윤리를 포기한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직의 윤리적 기능이 망가지자, 인사청문회라는 의회의 윤리 감시기능마저 무력화됐다.

당에서 위성정당의 꼼수로 스스로 약속한 ‘정치개혁’의 대의를 파괴해도 대통령의 윤리적 개입은 없었다. 이 중대한 사안을 놓고 의원들 사이에 토론조차 없었다. 통치의 철학은 양정철의 손에 들린 시뮬레이션 시나리오로 대체됐다. 노무현이라면 당장 윤리적 개입을 해 당에 ‘원칙 있는 패배’를 주문했을 것이다. 그에겐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선거제 개혁이 우리가 권력을 한 번 잡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개혁이다.”

철학의 부재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진다. 원래 공화국은 ‘공무’(res publica)를 뜻한다. 그런데 “마음의 빚이 있다”는 말은 사적 감정의 표현으로, 공화국의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할 수 있는 발언이 아니다. 국가 공동체의 가치를 세워야 할 대통령이 윤리적 판단의 영역을 없애고, 그 공백을 ‘내 식구’ 철학으로 채워 넣은 것이다. 민주공화국은 그렇게 친문세력의 사화국(res privata)이 되어갔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여성혐오 발언으로 비난받는 이를 청와대로 부른다. 공동선의 표상이어야 할 공화국 대통령이 제 식구 챙기는 가장으로 행동한다. 그 식구들도 똑같다. 선거개입까지 해가며 아버지의 친구를 챙긴다. 윤리의 영역을 치워버린 것으로도 모자랐나? 최근에는 정의의 마지막 보루까지 흔들고 있다. 검찰총장을 공격하고, 확정된 판결을 뒤집으려 든다. 이렇게 국가의 정의는 무너져간다.

2017년 1월 10일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시카고 레이크사이드센터에서 임기 8년을 마무리 짓는 고별연설을 하던 중 눈물을 닦고 있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시카고=AP 연합뉴스
 
 ◇이 나라의 정신적 대통령 

대통령의 답답함은 “고구마” 화법의 문제가 아니다. 말을 더듬어도 연설은 감동적일 수 있다. 그러려면 말에 에토스(ethos)가 실려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은 그것을 내버렸다. 에토스 빠진 문장은 시인을 데려다 예쁘게 치장해도 그저 공허할 뿐. 그 많은 발언 중 인용할 게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다.” 한때 감동적이었던 이 말도 요즘은 비아냥에나 인용된다.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라는 노무현의 꿈은 ‘달빛에 취한 깡패들의 조직된 폭력’으로 실현되었다. 그들이 동료시민을 해코지하고 다녀도, 대통령은 말리지 않고 이 반민주적 행태를 외려 “양념”이라 축성했다. 격려에 고무된 그들은 정권을 닮아갔고, 급기야 나라의 로고스는 음모론(“냄새가 난다”)으로, 에토스는 비리의 옹호(“그럼 나경원은?”)로, 파토스는 싸구려 신파(“뭉클, 울컥”)로 대체됐다.

이 모두가 통치 철학의 부재에서 비롯된 일. 그래서 그가 내게는 ‘의전대통령’으로 느껴진 것이다. 대통령에게 철학이 있었다면 제 식구의 비리에는 더 날카로운 칼을 들이대라 했을 것이다. 그 비리를 알린 기자들이 수난 당하는 일을 제 정부의 수치로 여겼을 것이다. 문뜩문뜩 이 나라가 “죽창” 전사들의 왕국처럼 느껴지는 것은, 빛 바란 ‘대통령 윤리’ 아래로 운동권 참모들의 색채가 배어나기 때문일 게다.

대통령이 비운 자리는 유시민의 날조와 김어준의 선동으로 채워졌다. 그동안 대중의 윤리의식을 형성한 것은 대통령이 아니라 이들의 말이었다. 사실상 이들이 이 나라의 ‘정신적’ 대통령 역할을 해온 것이다. 이는 공화국 대한민국의 품격이 걸린 문제다. 부재하는 ‘대통령 윤리’는 원고를 수정하는 대통령 사진으로 가릴 문제도 아니고, ‘싸가지’니 ‘꼴값’이니 상스러운 욕설로 덮일 문제도 아니다.

이는 그동안 대통령이 회피해 온 ‘대통령직의 윤리적 기능’의 문제다. 언제부턴가 이 나라에 정의와 상식이 무너졌다. 국가가 아노미에 빠졌을 때 ‘기준’을 세워 국가의 품격을 살린 것은 철학을 가진 지도자의 말. 그 말을, 이미 있는 기준마저 허무는 이 나라 대통령에게 들을 수 없기에 딴 나라 지도자의 말을 인용한다. 연출된 싸구려 감동에 물린 백성은 감동마저 외국에서 빌어먹어야 한다.

“지금 우리가 당면한 것은 (...) 무엇보다 도덕적 이슈다. 이는 세세한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정의의 근본원리와 우리나라의 성격이 걸린 문제다.” (버락 오바마)

 진중권 미학자,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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