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보다 더 많은 생명 구할 기술

입력
2024.05.09 16: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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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비료 없이 작물 대량생산 묘수
미생물 세포 내 작은 구조물서 힌트
과학자들 “교과서 다시 써야” 들썩

편집자주

과학 연구나 과학계 이슈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일을 과학의 눈으로 분석하는 칼럼 ‘사이언스 톡’이 3주에 한 번씩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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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억5,800만 명. 극심한 식량 불안을 겪고 있는 세계 인구다. 2022년 기준이니 지난해 발발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까지 감안하면 지금은 더 많을 것이다. 전쟁이 아니어도 기후변화와 환경오염으로 작물 생산이 줄고 가격이 오르면서 식량 부족이 곧 인류 생존을 위협할 거란 경고가 이어져왔다. 어쩌면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가 될 연구가 최근 발표됐다. 세계 과학계는 교과서부터 다시 써야 하는 것 아니냐며 들썩이고 있다.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와 카를 보슈가 100여 년 전 개발한 하버-보슈 공정은 인구 급증에 따른 대규모 기아 위기로부터 인류를 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기술 덕에 곡물 생산량이 비약적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곡물이 잘 자라려면 탄소, 수소, 산소, 질소가 충분히 공급돼야 하는데, 질소가 문제였다. 질소는 공기 중에 많긴 하지만, 원자 2개가 삼중결합으로 단단히 묶여 있어 그대로는 식물이 성장에 이용하지 못한다.

하버와 보슈는 고온·고압 조건에서 촉매를 이용해 질소 화합물인 암모니아를 대량생산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후 암모니아 비료가 보편화하면서 곡물 생산이 크게 증가했다. 그런데 농경지에 비료가 다량 투입되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질소 화합물이 토양이나 공기 중에서 화학반응을 거쳐 대기오염물질로 변하는 것이다. 작물에 질소를 안정적으로 공급하면서도 환경엔 영향을 미치지 않는 묘수가 필요해졌다.

미국 캘리포니아대 연구진이 한 해양 조류(藻類)의 세포 내에서 발견한 ‘니트로플라스트’라는 작은 구조물(소기관)이 바로 그 묘수로 지목됐다. 이 소기관의 정체가 담긴 연구진의 논문은 지난 3월과 4월 과학학술지 ‘사이언스’와 ‘네이처’, ‘셀’에 일제히 실렸다. 한 연구가 3대 과학학술지에 모두 소개되는 건 이례적이다. 그만큼 학계가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는 의미다.

연구진이 이 소기관을 찾아낸 건 약 2년 전이다. 처음엔 소기관이 아니라 UCYN-A라는 세균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의 질소 기체를 조류 세포 안으로 들여와 조류가 자라는 데 쓸 수 있는 질소 화합물 형태로 바꿔주기 때문이다. 이런 일을 스스로 하는 건 세균 같은 원핵생물만 가능하다는 게 정설이었다. 연구 대상 조류는 세포 하나로 이뤄졌지만 내부에 핵과 소기관이 존재하는 진핵생물로 분류되는 반면, 세균은 단세포면서 핵도 소기관도 없는 원핵생물이다.

아주 오래전 진핵생물은 스스로 못하는 일을 시키기 위해 원핵생물들을 체내에 들어와 공생하게 했다. 그중 일부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진핵생물 세포 내에 눌러 앉아 작은 기관이 돼버렸다. 서로에게 더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가 일어난 것이다. 진핵생물의 생존에 필수인 두 소기관, 엽록체와 미토콘드리아가 이런 과정을 거쳐 자리 잡았다.

연구진은 분석 끝에 UCYN-A도 약 1억 년 전 조류 세포 안에서 공생을 시작했다가 니트로플라스트라는 소기관으로 바뀌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스스로 질소를 가져다 체내에 적합하게 활용할 수 있는 특별한 진핵생물로 진화했다는 얘기다. 학계는 이 조류의 능력을 작물에 도입해 스스로 질소를 충당할 수 있도록 개량하면 화학 비료 없이도 대량생산이 가능해질 거라고 내다본다.

이런 예상이 현실화할 경우 의사보다 훨씬 많은 생명을 살릴 기술이 탄생할 수 있다. 이게 바로 과학자의 힘이다. 물론 실패를 거듭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모른다. 그렇게 수많은 실패가 쌓이다 보면 인류를 또 한 번 굶주림의 위기에서 구해낼 제2의 하버-보슈 공정이 교과서에 쓰일 날이 올 거라고 기대한다.

임소형 미래기술탐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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