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도 반한, 꿈꾸는 듯한 문장의 섬에 빠져들다

카뮈도 반한, 꿈꾸는 듯한 문장의 섬에 빠져들다

입력
2020.11.06 04:30
21면

<34>장 그르니에 '섬'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을 다시 조근조근 얘기해 봅니다. 작가들이 첫손에 꼽는 산문가, 박연준 시인이 '한국일보'에 격주 금요일 글을 씁니다.


장 그르니에.

책장에서 유독 빛나는 책이 있다. 책들 사이에 있으면서, 독자적으로 떠있는 섬처럼 존재감을 뽐내는 책. 장 그르니에(1898-1971)의 '섬'이 그렇다. 이 책을 여러 번 읽었지만 책장에 꽂혀있는 걸 볼 때마다 안도한다. 언제든 그곳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책의 물성을 지닌 ‘장소’다. 들어가 머물 수 있는 곳, 피안의 형태로 숨어있는 곳. 단단하고 고요한 문장들이 사는 곳. 침묵이 나무처럼 자라나는 곳. 펼치고 덮을 수 있는 피난처다. 장 그르니에의 제자인 카뮈는 책의 발문에서 이렇게 썼다.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14쪽)


알베르트 카뮈. 위키피디아


과연 이 책은 혼자 숨어 읽고 싶게 만드는 데가 있다. 그의 문장은 짐승처럼 나아간다. 느릿느릿 움직이다 별안간 도약하고, 침묵 속에서 놀라운 이미지를 꺼내 보여준다. 기교 없이 감정의 진폭을 크게 흔드는 음악 같다. 시와 철학, 삶과 죽음, 작은 이야기 속에 끼어있는 묵직한 화두가 책을 이루는 주재료다. 사유는 단단한 동시에 유연하며 특별한 동시에 보편적이다. '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챕터는 '고양이 물루'라는 제목의 글이다. 시작은 이렇다.

"짐승들의 세계는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짐승들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37쪽)

이제 곧 고양이 물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텐데. 슬픔과 기쁨, 삶과 죽음이 뒤범벅인 가운데 시종일관 침착한 음색을 띠는 작가의 문체가 나올 텐데. 어느 대목을 지나면 눈물을 뚝뚝 흘리게 될 텐데…. 나는 알면서 속는 사람처럼 이 글 앞에서 매번 당하고 만다. 처음 읽는 사람처럼 미소 짓다 처음 슬픔을 맛보는 사람처럼 울게 된다. 무거운 슬픔이 아니라 가벼이 흩어지는 슬픔이다. 나중엔 슬펐던 기억만 남아, 슬픔이 그리움으로 대체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오후에는 침대 위에 가 엎드려서 앞발을 납죽이 뻗은 채 가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을 잔다. 어제는 흥청대며 한바탕 놀았으니 아침 일찍부터 내게 찾아와서 하루 종일 이 방에 그냥 머물러 있을 것이다. 이때다 싶은지 여느 때 같지 않게 한결 정답게 굴어댄다. 피곤하다는 뜻이다―나는 그를 사랑한다. 물루는, 내가 잠을 깰 때마다 세계와 나 사이에 다시 살아나는 저 거리감을 없애준다.” (41쪽)

'나는 그를 사랑한다’라는 문장에서 작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작가는 고양이 물루에게서 이런 말을 듣는다. “나는 저 꽃이에요. 저 하늘이에요. 또 저 의자예요. 나는 그 폐허였고 그 바람, 그 열기였어요. 가장한 모습의 나를 알아보지 못하시나요? 당신은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를 고양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물루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만 같다. 헤르만 헤세가 그랬던가. 작가가 고양이를 표현하는 방식을 보면, 그 작가에 대해 알 수 있다고.


섬ㆍ장 그르니에 지음ㆍ김화영 옮김ㆍ민음사 발행ㆍ184쪽ㆍ1만2,000원


'섬'을 읽은 뒤 ‘시가 없다’는 게 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시가 없다는 말은 더할 수 없이 단조롭기만 한 것에서 매순간 새로운 면을 발견하게 만드는 그 뜻하지 않은 놀라움이 없다는 뜻이다.”(173쪽) 뜻하지 않은 놀라움? 그렇다! “뜻하지 않은 놀라움”을 책장을 넘기는 매순간 발견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 책엔 시가 있다.

창가에서 손끝을 매만지며 먼 데를 떠올리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좋아할 것이다.

박연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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