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철창 속 갇혔던 사육곰들… 자유 찾아 미국행

10년간 철창 속 갇혔던 사육곰들… 자유 찾아 미국행

입력
2022.03.16 15:30
수정
2022.03.22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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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전 강원 동해시 한 사육곰 농장에서 선천적 장애로 앞을 볼 수 없는 반달가슴곰 '글로리아'가 구조를 앞두고 뜬장 밖을 내다보고 있다. 동물자유연대는 22마리 사육곰을 미국 야생동물보호단체(TWAS)로 이주시킨다. 동해=최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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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억. 으억!"

14일 낮 12시 강원 동해시 한 사육곰 농장. 6.6㎡도 안 되는 좁은 철창 속 곰들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곰들은 마취를 위해 전날 굶은 데다 평소와 달리 수십여 명의 사람이 몰린 탓에 흥분한 상태였다. 정동혁 충북대 수의대 교수가 철창 속 곰 2마리의 엉덩이에 각각 마취제를 쏘자 곰의 비명이 잇따라 울려 퍼졌다. 곰이 공격받거나 놀랄 때 내는 소리다. 다른 곰들은 곰의 울부짖음을 듣자 흥분하며 철창 위로 올라가기 바빴다. 마취제를 맞은 곰들은 점차 움직임이 느려지더니 20여 분 만에 잠들었다.

이때부터 동물보호단체 동물자유연대 활동가들과 국립공원공단 수의사들은 더 바빠졌다. 활동가들은 먼저 곰을 우리에서 빼내기 위해 철창을 잘라냈다. 수의사들은 곰이 제대로 마취됐는지 확인한 후 들것에 실어 바닥에 눕혔다. 웅담채취용으로 길러진 곰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철창 밖으로 나온 순간이었다.

14일 오전 강원 동해시 한 사육곰 농장에서 정동혁 충북대 수의대 교수가 곰에게 마취제를 놓고 살펴보고 있다. 동해=최주연 기자

사육장 밖에서 대기하던 수의사들은 곰 혀에 산소포화도 측정기를 달고 혈액, 분비물 검사 등 건강검진을 실시했다. 김영준 국립생태원 연구실장은 "발이 빠지는 뜬장에서 10년 넘게 살아온 것을 보여주듯 곰 발바닥이 거칠게 갈라져 있다"며 "피부병으로 몸 곳곳의 털은 듬성듬성 빠져 있지만 건강에 크게 문제는 없어 보인다"고 설명했다.

10년 넘게 뜬장에 살던 곰의 발바닥은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동해=고은경 기자

검진을 마친 곰은 대형맹수용 이동장(크레이트) 안으로 옮겨졌다. 양정진 국립공원연구원 야생동물의료센터장은 곰에게 각성제를 투입한 후 마취에서 깨우기 위해 여러 차례 혀를 당기고 코를 꼬집었다. 9분가량 지나자 곰의 호흡이 차츰 빨라지고 눈에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양 센터장은 재빨리 이동장 문을 닫았다. 곰이 갑자기 일어나 덮칠 수도 있어서다. 지게차는 곰을 실은 이동장을 곧바로 무진동 차량으로 옮겼다. 다음 날 곰들을 미국행 비행기에 태우기 위한 준비 작업은 이날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사육곰 22마리, 1만평 넘는 미국 보호시설로

국립공원공단 사육사와 안전요원들이 14일 오전 강원 동해시 한 사육곰 농장에서 마취한 곰을 들것에 실어 밖으로 옮기고 있다. 동해=최주연 기자

동물자유연대(동자연)가 15일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 인근에 위치한 야생동물보호단체(TWAS) 보호시설(생크추어리)로 보낸 사육곰은 총 22마리. 생크추어리는 동물이 자연사할 때까지 본래 서식지와 최대한 유사한 환경에서 돌보는 것을 목표로 운영하는 곳이다. 곰들은 미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한 다음 육로로 보호시설까지 이동하게 되는데, 총 50여 시간이 걸릴 예정이다.

이날 구조된 22마리 가운데는 어릴 때 옆 칸 곰과 싸워 앞발과 뒷발 한 쪽씩을 잃은 '오스카'와 선천적 실명을 안고 태어난 '글로리아'도 포함됐다. 공간이 좁다 보니 오스카처럼 곰들이 싸우면서 발가락이나 손가락이 잘리는 경우도 많다. 이혜원 동자연 부속동물병원 원장은 "오스카와 글로리아는 다행히 생활하는 데는 지장이 없어 이번 구조에 포함됐다"며 "재활 적응 프로그램을 거치면 충분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기대했다.

어릴 때 다른 사육곰에게 공격당해 앞발와 뒷발 한 쪽씩을 잃은 오스카가 철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동해=최주연 기자

최소 10년 이상 철창에 갇혔던 곰들은 이제 3,900만㎡(약 1,180만평)가 넘는 부지의 보호시설에서 사육곰이 아닌 반달가슴곰으로 살아가게 된다. 반달곰의 수명이 20~25년임을 감안하면 이들은 10년 이상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곰들의 이주를 위해 이날 지리산 반달가슴곰 종복원 사업을 하는 국립공원공단, 국립생태원, 충북대 수의대가 총출동했다.

40년 전 농가 수익 위해 수입된 사육곰, 사각지대 방치

14일 오전 강원 동해시의 한 사육곰 농장에서 국립공원공단 소속 수의사가 마취한 곰의 맥박을 재고 있다. 동해=최주연 기자

사육곰의 비극은 4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부1980년대 농가 수익을 위해 일본, 말레이시아 등지에서 사육곰 수입을 장려했다. 이후 동물보호 여론이 형성되면서 1985년 사육곰 수입이 금지됐고, 우리나라가 1993년 멸종위기야생동물의 국제간 거래에 관한 협약(CITES)에 가입하며 수출판로마저 막혔다. 정부는 1999년 농가 손실 보전을 위해 24년 이상 곰의 웅담 채취를 합법화하고, 2005년에는 다시 기준을 10년으로 낮췄다. 2014년에는 정부가 당시 남은 사육곰 967마리에 대해 중성화 수술을 시키면서 번식을 막았다.

하지만 남은 사육곰은 웅담을 찾는 이들이 줄면서 애물로 전락했고, 개 사료와 잔반을 먹으며 방치되어 왔다. 하지만 국내에서 지리산에 복원하는 반달가슴곰과 단지 아종(분류학상 종의 하위 단계로 같은 종에서 유전·지리·형태적으로 세분된 개념)만 다를 뿐, 이들 역시 국제적 멸종위기종이다.

민간단체 위주 사육곰 구조, 정부도 나서야

양정진 국립공원연구원 야생동물의료센터장이 14일 오전 강원 동해시 사육곰 농장에서 구조한 곰에게 각성제를 투입한 후 마취에서 깨우기 위해 여러 차례 손가락으로 혀를 당겨보고 있다. 동해=고은경 기자

정부가 손 놓고 있는 사이 보다 못한 민간단체들이 사육곰 보호 대책 마련에 나섰다. 동자연은 2020년 7월 사육곰 농장 가운데 가장 열악했던 동해시 농장 업주를 설득해 곰 22마리를 매입하고 폐업을 약속받았다. 문제는 농장에서 곰을 구조해도 국내에 대형 포유류를 위한 보호공간이 없다는 점이다.

14일 오전 강원 동해시의 한 사육곰 농장에서 동물자유연대 활동가가 곰을 이송할 대형 이동장을 안전하게 잠그고 있다. 동해=최주연 기자

동자연은 2018년 폐쇄된 콘크리트 방에 갇혀 있던 사자 가족을 구조해 이주시켰던 것을 계기로 TWAS와 손잡고 22마리의 곰을 보내게 됐다. 미국 내 수입허가를 비롯한 해외 및 미국 내 운송 비용은 TWAS가, 국내 운송비용 등은 동자연이 부담했다. 총 비용만 10억 원이 넘게 들었다. 정진아 동자연 사회변화팀장은 "지난해 상반기 미국으로 보내는 게 목표였지만 코로나19 영향으로 화물기 등을 구하기 어려워지면서 1년 넘게 지연됐다"며 "이제라도 보내게 돼서 다행이다. 곰들이 가서 잘 살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14일 오전 강원 동해시 한 사육곰 농장 인근에서 지게차가 구조한 곰이 있는 대형 이동장을 무진동 차량으로 옮기고 있다. 동해=최주연 기자

여전히 국내에는 360마리의 사육곰(2022년 1월 기준)이 남아 있다. 환경부는 올해 1월 '2026년 곰 사육 종식'을 선언하고 2025년까지 전남 구례군과 국립생태원이 있는 충남 서천군에 보호시설을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정부 보호시설이 수용할 수 있는 개체 수가 130여 마리에 불과해 남은 230여 마리에 대한 대책 마련도 시급하다. 조희경 동자연 대표는 "이번 구조 활동은 사육곰이 야생동물 보호 구역에서 살 수 있게 된 첫 사례다"라며 "국내에 남은 사육곰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동해=고은경 애니로그랩장 scoopkoh@hankoookilbo.com

고은경 애니로그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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