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이는 이야기

죽이는 이야기

입력
2022.04.14 20:00
25면

ⓒ게티이미지뱅크

진짜 죽이는 이야기 하나. 옛날옛날 한 옛날에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늦둥이가 태어난다. 탄생을 환영받지 못한 이 아이의 이름은 중팔이. 엄마 아빠의 나이를 합치면 88이 된다고 하여 대충 붙여진 이름이다. 중팔이는 17세에 부모님을 여의고 탁발승이 되어 세상을 떠돈다. 그렇게 밑바닥에서 한세상 허무하게 끝날 것 같았던 중팔이의 인생에 기회가 찾아온다. 반란을 일으킨 도적떼에 합류한 것이다. 총명함과 재기가 가득했던 중팔이는 놀라운 수완으로 도적떼의 우두머리가 되더니 결국 나라를 세우고 황제가 된다.

말 그대로 흙수저 인생에서 최고의 권력자가 된 그를 축하하는 글 하나가 도착한다. 어느 유생이 쓴 글의 내용은 이렇다. 빛나는 하늘 아래, 하늘이 성인을 낳아, 세상을 위한 법칙을 만들었다(光天之下, 天生聖人, 爲世作則). 황제가 기분 좋으라고 이 글을 썼건만, 외려 황제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를 느낀다. 황제의 눈에는 '광(光)'자부터 거슬린다. 빛 광자는 '대머리 독(禿)'을 연상시키는 글자이니 이건 내가 머리 깎은 중이었던 것을 조롱하는 것이렷다. '승(僧)자'와 발음이 비슷한 '생(生)'자를 쓴 것을 보니 내 짐작이 확실하군. 어라, '도적 적(賊)'과 발음이 비슷한 '법칙 즉(則)'자를 썼네. 홍건적이었던 내가 황제가 되니 가소롭다는 뜻인가? 이건 빼도 박도 못하는 확실한 증거다. 이 무엄한 자를 죽여라. 그렇게 유생은 참형에 처해진다.

명나라 주원장 초상화

중팔이란 이름을 가졌던 황제의 이름은 주원장, 즉 명나라를 세운 홍무제이고, 그가 자신을 조롱하는 문자를 썼다 하여 유생을 죽인 사건은 '문자의 옥'이라고 불린다. 이 사건은 흔히 자신의 비천한 출신 때문에 열등감에 빠져 있던 황제의 폭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내막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 사건은 단순한 황제의 폭주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중국을 위시한 동아시아의 봉건 군주제는 이런 '죽이는 이야기' 위에 세워져 있었다. 문자의 옥은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중국 왕조의 역사에서 빈번하게 나타난 숙청 방식이었던 것이다.

문자의 옥은 운 없는 한 유생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이는 이야기'는 새로운 나라에 퍼져 나가고, 그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글자들은 사용할 수 없는 금지된 문자가 된다. 황제가 자의적으로 '찍은' 문자들과 그 문자를 사용하는 텍스트 양식은 더 이상 황제의 치하에서는 유통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문제가 간단치 않다. 난감하게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적 상황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새로운 언어 표준이 제시되고, 외교 문서를 작성하는 방법까지 바뀐다. 그리하여 황제의 신민은 이제 금지의 체계(문자의 감옥)를 준수하며 새로운 말하기 방식을 익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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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제 안에서 새로운 군주는 기존 언어에 새로운 금지의 체계를 설정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확보했다. 군주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거나 글로 쓰지 못하게 하는 '피휘(避諱)', 특정 문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문자의 옥'은 봉건 군주들의 통치 방식인 셈이다. 그대들은 정말 나에게 복종하는가? 그렇다면 새로운 말하기 방식을 익혀라. 그렇지 않으면 죽음이 기다릴 것이니.

다음은 별로 안 죽이는 이야기.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자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언론에 '당선자'가 아닌 '당선인'이라는 말을 쓸 것을 요구했고, 대부분의 언론은 이를 기꺼이 따랐다. '놈 자'가 비칭인데 감히 대통령한테 품격이 떨어지는 말을 쓸 수 없다는 이유였다. '놈 자'의 '놈'이 본래 비칭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접미사 '-자'에는 비하의 의미가 없다는 지적, 헌법에서는 '당선자'로 규정되어 있기에 '당선인'이라는 말은 반헌법적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지만 언론의 '당선인' 사용은 여전하다.

한국일보 2008년 1월 11일자 10면

이런 비판이 마땅치 않은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봤자 부르는 이름일 뿐이고, 이렇게 부르든 저렇게 부르든 실재는 변하지 않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이왕 불러주는 거 본인이 원하는 대로 불러주면 어디가 덧나냐고 따질 수도 있을 것이다. 불러 달라는 대로 불러주자.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뭐가 어렵냐?

그러나 '당선인'이란 이름을 둘러싼 소동의 핵심은 '그렇게 불러 달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소동의 핵심은 '그렇게 부르지 말라'는 것, 다시 말해 '금지된 말'을 설정하는 것에 있다. 당선인이라고 불러 달라는 것은 곧 '당선자'라는 말을 금지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당선자라는 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자. 이 말에 비하의 의미가 들어 있는가? 아니다. 이 말은 민주적 선거에서 선출된 사람을 가리키는 중립적인 말이다. 그렇다면 이 말은 언제 비하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가? 그것은 이 말이 금지되는 바로 그 순간이다. 더불어 이 금지의 체계가 작동될 때 대통령 선거에서 선출된 사람의 사회적 실재도 변한다. 당선자는 모두가 평등한 시민들의 대표가 아닌, 우러러보고 받들어 모셔야 하는 주군과 유사한 존재가 된다.

앞서 봉건제의 군주가 언어에 금지의 체계를 설정하는 것을 통해 권력을 구축했다는 것을 떠올려 보자. 봉건 사회의 공동체는 군주와 관련된 언어를 쓰면 안 된다는 지식을 공유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을 통해 만들어졌다. 여기서 '사람 인'이니 '놈 자'니 하는 문자의 의미 자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금지' 그 자체이다. 생각해보라. '빛 광'이나 '날 생'자를 쓴 명나라의 유생은 정말 죽을죄를 지었는가? 이렇게 금지는 군주의 신민을 문자의 감옥에 가둔 후 규율하고 길들여 복종하게 한다. 금지된 체계를 어긴다면? 그건 군주에 대한 반역이니 '죽이는 이야기'를 다시 쓸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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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당선인 소동으로 돌아오자. 당선인이라는 말을 쓰는 이들은 선출된 후보에게 충성을 표하는 무리이고, 당선자라는 말을 고수하면 반역을 꾀하는 역당들의 무리인 것일까? 이건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다면 그가 어느 정당 출신이든, 그에게 표를 주었든 안 주었든 공화국의 시민은 그를 시민들의 대표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선자'라는 대한민국 민주공화국 헌법에 규정된 말을 버리고 '당선인'이라는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언론은 봉건 군주제의 문자 감옥을 다시 지었다. 그리고 우리들은 어느 틈에 그 문자의 감옥 안에 갇히게 되었다. 당선자라는 말을 쓰는 지금, 나는 의도치 않게 새 군주에게 반기를 드는 반역자가 된 기분이 든다.

한국 사회는 오랜 기간 '대통령은 왕'이라는 은유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니 지금도 사로잡혀 있다. 한국 민주화의 역사는 이 은유에서 벗어나기 위한 역사이기도 했다. 각하, 영부인, 영애, 영식이라는 말을 버린 것은 그 은유를 깨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당선자라는 말 대신 당선인을 쓰자고 하거나, 대통령의 배우자를 누구누구 씨 대신 여사라고 부르는 게 시대 정신이라는 억지 주장처럼 그 은유를 고수하려는 노력도 여전하다.

대통령은 왕이 아니고, 대통령의 배우자는 왕후가 아니다. 우리는 공화정 체제에 살고 있으며 대통령이 됐든 그 배우자가 됐든 그들은 어디까지나 나와 동등한 시민이다. 그러니 그들의 호칭을 군주의 그것처럼 여겨 금지하는 문자의 감옥은 이제 그만 짓자. 봉건 군주제에서 수천 년 동안 반복되어 온 '죽이는 이야기'는 이제 지겹다.

백승주 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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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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