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식대학·숏박스 키운 ‘코미디 불도저', 940만명을 웃기다

피식대학·숏박스 키운 ‘코미디 불도저', 940만명을 웃기다

입력
2022.07.13 14:00
수정
2022.07.13 17:19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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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정영준 메타코미디 대표 ①

편집자주

<일잼 원정대>는 '현대인의 일'을 탐구하는 콘텐츠 실험실 '커리업(caree-up)'의 인터뷰 브랜드입니다. '일에서의 재미'라는 희소자원을 찾아 정박하지 않고, 원정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을 동력 삼아 일하는 방법'을 수집합니다.


국내 최초 코미디 레이블을 설립한 메타코미디 정영준 대표. 코미디 크리에이터 피식대학, 숏박스, 장삐쭈, 빵송국을 발굴하고 키워 냈다. 김하겸 인턴기자

“너 뭐 좋아하냐?” TV 프로그램 제작사에 입사하던 날, 스물아홉의 늦깎이 신입사원에게 상사가 물었습니다. 물음표가 떨어지기 무섭게 마중 나온 대답. “전 코미디를 좋아합니다.” ‘시크릿 가든’ 같은 드라마도, ‘1박2일’ 같은 예능도, ‘슈퍼스타K’같은 서바이벌도 아니고 단물 다 빠진 코미디라니. 상사는 옳다구나 반색을 했죠. 아무도 가고 싶어하지 않는 자리에 딱 맞는 적임자가 생겼으니까요. “코미디 좋아한다니 딱이네.” 그렇게 그는 누구도 탐내지 않아 재고가 수북이 쌓인 ‘비인기 코너’의 매대를 지키게 됩니다. 때는 2010년, 코미디가 딱 그 정도의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죠.

'피식대학'을 만든 코미디언 정재형, 김민수, 이용주. 2022년 7월 현재 구독자 155만 명을 보유하고 있다. 정재형은 2014년 KBS 29기 공채 개그맨으로, 이용주와 김민수는 2016년 SBS 16기 공채 개그맨으로 데뷔했다. 스탠드업 코미디 무대에서 만난 세 사람은 영준씨의 권유로 2019년 4월 유튜브를 시작했다. '피식대학'이라는 채널명 역시 영준씨의 아이디어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메타코미디 제공

940만 명. 그로부터 12년 후,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대박 상품’들의 성적표입니다. 한사랑산악회, B대면데이트, 05학번이즈백 시리즈로 메가 히트를 친 155만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부터, 리얼한 스케치코미디로 반년 만에 199만 구독자를 모은 ‘숏박스’, 국내 최초 애니메이션 더빙 코미디를 선보이고 있는 315만 채널 ‘장삐쭈’까지... 이 모든 히트작들이 한때는 먼지만 풀풀 날렸던 ‘이 사람’의 매대 위에서 붙티나게 팔려 나가고 있습니다. 국내 최초 코미디 레이블, ‘메타코미디’를 만든 정영준(40) 대표의 이야깁니다.

일요일 밤 9시면 온 가족이 텔레비전 앞에 둘러앉아 KBS 개그콘서트(이하 개콘)를 보던 시절, 기억나시나요? SBS 웃찾사, MBC 개그야가 ‘삼국지’처럼 힘겨루기를 하던 ‘공개코미디 전성시대’는 10년 전쯤부터 급속도로 저물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3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자랑했던 웃찾사와 개콘은 저조한 시청률을 반등하지 못하고 맥없이 막을 내렸죠. 그 끝물에 간신히 데뷔한 젊은 코미디언들은 지명도를 쌓을 새도 없이 하루아침에 무대를 잃어버렸습니다. 갈 곳이 없어진 이들은 홍대의 소극장들을 전전하게 되죠.

스케치코미디 채널 '숏박스'를 만든 김원훈, 조진세. 2022년 7월 현재 구독자 199만 명을 보유하고 있다. 김원훈과 조진세는 각각 KBS 30기, 31기로 데뷔한 선후배 사이다. 2021년 12월 말부터는 32기 엄지윤이 합류해 3인조로 활동 중이다. 메타코미디 제공

좁디 좁은 무대, 관객이라고 해봤자 열댓 명 남짓. 듬성듬성 비어 있던 관객석 한 켠에 늘 조용히 앉아 있던 손님이 있었는데요. 그게 바로 영준씨였다고 해요. 허름한 무대에서도 광채를 뿜어내던 그들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봤죠. “이 친구들, 천재인데?” 어항에 갇힌 이 고래들을, 넓은 바다에 풀어주기로 합니다. 그들에게 ‘유튜브’라는 새로운 무대를 열어준 것이죠. ‘피식대학’(154만)의 정재형, 이용주, 김민수. ‘빵송국’(40만)의 곽범, 이창호. ‘숏박스’(198만)의 엄지윤, 김원훈, 조진세. 이 고래들은 지금, 유튜브라는 광활한 바다를 힘차게 헤엄쳐 나가고 있습니다.

메타코미디 소속 코미디언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해준, 엄지윤, 면상들(이선민, 조훈), 스낵타운(이재율, 강현석). 메타코미디 제공


Prologue. 코미디라면 앞뒤 안 가리고 파는 불도저, 그가 만든 ‘국내 최초 코미디 레이블’

영준씨는 드라마와 예능, 쇼버라이어티가 점령한 콘텐츠업계에서 오직, ‘코미디 외길’ 인생만을 걸어온 지독한 덕후입니다. "10대 시절부터 ‘코미디’만 보고 살았죠.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부터, 일본의 만사이(만담) 개그까지… 앞뒤 안 가리고 불도저처럼 팠죠." 그렇게 열광하다 보니 문득 궁금했다고 해요. “왜 한국엔 일본의 요시모토흥업이나 미국의 코미디센트럴 같은 ‘제대로 된’ 코미디 기획사가 없을까?” 그래서 한국의 코미디판에 뛰어들기로 합니다.

코미디를 만드는 현장에서 영준씨는 그야말로 날아다녔습니다. 첫 직장이었던 CJ ENM에서는 전례가 없었던 페이스북 마케팅을 벌여 'SNL 코리아' 시즌3에 성공의 날개를 달았고, YG엔터테인먼트에서는 국내 최초 1,300석 규모의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 '유병재의 B의 농담'을 선보였죠. MCN 샌드박스에서는 개콘 폐지 후 뿔뿔이 흩어진 코미디언들을 모아,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키워 냈고요.

메타코미디 소속 크리에이터들의 프로필 사진. 왼쪽부터 유튜버 과나, 코미디언 정재형, 이선민, 김민수, 유튜버 장삐쭈, 웃음박재, 코미디언 조훈, 이용주. 메타코미디 제공

어느 순간 돌아보니 ‘전천후 코미디 전문가’가 되어 있었어요. 제작사에선 ‘콘텐츠로 돈 버는 법’을 배웠고, 연예기획사에선 ‘매니지먼트의 기술’을 익혔죠. 마지막 정착지였던 MCN(멀티채널네트워크)에선 '유튜브 세계의 문법'을 습득했습니다. 그렇게 10년을 살다 보니, 다시 스무 살 때의 질문이 떠오르더랍니다. “왜 한국엔 제대로 된 코미디 기획사가 없을까?” 그래서 만들기로 했어요. 지난해 7월 문을 연 ‘메타코미디’가 바로 그런 회사죠.

메타코미디는 국내 최초 ‘코미디 레이블’이에요. 레이블(Label)이란 음반 업계에서 흔히 쓰이는 말인데요.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인디록, 힙합, 재즈 아티스트들이 모인 ‘소규모 음반 기획사’를 이르던 용어예요. 정확한 사전적 정의는 없지만, ‘특정한 색깔을 가진 아티스트들이 모여 있는 브랜드’를 뜻합니다. 비유하자면, 대형 엔터테인먼트는 세계 어디에서도 같은 맛을 선보이는 ‘스타벅스’인 반면, 레이블은 주인장의 취향이 강하게 배어 있는 작은 로컬 카페인 셈이죠.

7월 1일, 회사 창립 1주년을 맞아 파티를 벌이고 있는 정영준 대표(가운데)와 메타코미디 임직원들. 영준씨 바로 뒤로 2인조 '스낵타운' 소속이자 EBS '딩동댕대학교'에서 부엉이 대학원생 '붱철'역 성우로 인기를 끌고 있는 코미디언 이재율씨가 보인다. 정영준 제공

영준씨가 만들고 싶었던 회사도 비슷했어요. 규격화된 시스템이 아니라, 창작자 한 명 한 명의 독특한 기질을 살려줄 수 있는 개성있는 브랜드를 만들고 싶었죠. 힙합 뮤지션들이 크루(crew)를 이루는 것처럼, 코미디언들 역시 잘 어울리는 한 패를 이룬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재미주의자가 지어 올린 이 ‘코미디공방’엔 기상천외한 천재들이 모였습니다. 전 세계 60억 팬클럽을 거느린 월드스타 아이돌 매드몬스터, 본더치 모자에 망고 나시를 입고 동대문을 누비는 05학번 형들, ‘여으얼정!’을 외치며 주말마다 산에 오르는 아재들… 시대상을 교묘히 비틀어 풍자한 세계관과 캐릭터는 대중을 금세 사로잡았죠.

피식대학의 인기 코너인 '한사랑산악회'(왼쪽)와 '05학번이즈백'(오른쪽). 지난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수많은 패러디와 오마주를 양산했다. 피식대학 유튜브 캡처

영준씨는 그들이 신명나게 놀 수 있도록 튼튼한 멍석을 깔아 줬어요. 가끔은 그들이 만든 세계 안에서 ‘투잡’을 뛰기도 합니다. 그의 또 다른 자아는 아이돌 매드몬스터를 성공시킨 매드엔터테인먼트의 수장 ‘대디(DADDY)’로 활동하고 있거든요. ‘비주류 장르', 코미디의 호쾌한 역전을 이끈 정영준 메타코미디 대표를 지난달 두 번에 걸쳐 서울 마포구 서교동 메타코미디 사옥에서 만났습니다.

Chapter1. ‘콘크리트 공화국’ 앞에 좌절한 청년 건축가, ‘콘텐츠의 세계’에 뛰어들다

<정의 독백>

어려서부터 나는 잡념이 많았어. 딴생각이 많아 유독 한 군데 집중을 못하는 아이였지. 그랬던 내가 무섭게 몰두했던 게 딱 하나 있었는데, 바로 건축이었어. 배우다 보니 건축은 ‘말하는 직업’인 거야. 거장들의 건축은 내러티브(narrative)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었어. 그들은 공간을 통해 사람들에게 어떤 감정과 경험을 전달할 것인지 고민했지. 그게 너무 좋았어. 나 역시 공간을 통해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졸업하자마자 존경하던 건축가의 사무소에 들어갔는데, 한국의 건축은 미국에서 배운 것과는 너무 딴판인 거야. 국내 부동산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환금성'이었어. 모두가 규격화된 집을 빨리 찍어 내는 데 매달렸지. 건축은 이야기를 담는 언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일을 하다 보니 ‘내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변방의 언어를 배워 온 게 아닌가’ 싶더라. 일주일을 통틀어 10시간도 못 자는 과로를 반복하다 결국은 그만뒀어. 지금부터라도 다른 언어를 배워야겠다 싶었지. 기왕이면, 모두가 쓸 줄 아는 가장 보편적인 언어를.

그토록 사랑했던 건축을 포기했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아홉. 그다음으로 선택한 회사는 CJ ENM이었습니다. 건축가였던 사람이 갑자기 콘텐츠 제작사에 들어간다니 ‘이게 무슨 반전 전개인가’ 싶기도 하죠. 하지만 당시의 영준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해요. “저는 어떤 형태로든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이었거든요. 그 언어가 '공간'에서 '미디어'로 바뀌었을 뿐인 거죠.” 창의성을 발휘해 메시지를 담는 직업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집을 짓는 일이나 TV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겁니다. 적어도 영준씨의 관점에서는요.

영준씨에게 콘텐츠의 세계가 낯설지 않았던 건, 그가 어마어마한 ‘코미디 중독자’였기 때문인데요. 에피소드 개수만 236개에 달하는 시트콤 '프렌즈'는 수십 번씩 돌려 볼 정도였답니다. 카투사에서 군생활을 하던 무렵, 미군들이 ‘세상에서 가장 웃긴 사람’이라며 보여준 데이브 샤펠의 코미디 DVD는 아직도 그의 사무실 한 켠에 꽂혀 있어요. 샤펠은 미국의 전설적 코미디언인데요. 흑인 정체성을 칼처럼 쥐고 ‘인종 권력’의 허점을 찌르는 개그를 주로 선보여 왔어요. 그의 말을 따라 한바탕 웃고 나면, 머릿속에 묵직한 질문이 남겨진다는 게 특징이죠.

“외국 코미디에서 유머를 다루는 감각들이 좋았어요.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위트의 가치’가 제대로 뿌리내리기 어려운 환경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대통령이 공적 자리에서 가벼운 농담 하나만 해도 욕을 먹는 곳이니까요. 국내에서 유일하게 위트를 테마 삼아 작품활동을 하시던 분이 장진 감독님이었는데요. 마침 그분이 tvN에서 방영하는 SNL 코리아 시즌1의 연출을 맡는다는 소식을 들었죠.”

SNL 코리아 시즌1은 2011년 tvN에서 방영됐다. 장진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tvN 제공

신입사원 시절, ‘너 뭐 좋아하느냐’라는 상사의 질문에 ‘코미디 좋아합니다’라고 당당하게 답했던 그는, 꿈에 그리던 SNL 코리아 시즌2의 콘텐츠 마케팅을 맡게 됩니다. 영준씨가 말하길 신입사원 시절의 그는 침투의 달인이었어요. 한마디로 ‘들이미는 걸 잘했다’는 뜻이죠. 마케팅부였지만 촬영현장에 매번 출석도장을 찍었습니다. 오후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쉼 없이 찍는 마라톤 촬영이 있을 때도 밤새 현장을 지켰어요. 출연자, 작가, 감독 할 것 없이 모두가 알아볼 때쯤 되자, 어느 날 PD가 그를 편집실로 불렀죠. “다음 주 방송분 가편집본이 나왔는데, 영준님이 한번 봐주실래요?” 미방영분까지 턱턱 보여주며 영준씨의 피드백을 구했죠. ‘들이밀기’의 기술을 끈질기게 발휘한 끝에, 그토록 좋아했던 코미디 프로그램의 첫 번째 시청자가 된 겁니다.

영준씨가 직접 만든 SNL 코리아 시즌3의 예고편 포스터와 페이스북 게시물. 게스트인 영화배우 최민수씨의 명대사를 패러디해 재치있는 한 줄로 녹여냈다. 영준씨는 사내 최초로 tvN의 공식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어 운영했다. 당시로선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정영준 제공

“그때, 시즌3 방영을 앞두고 처음으로 페이스북 마케팅을 건의했어요. 당시만 해도 SNS로 마케팅을 한다는 개념 자체가 낯선 때였거든요. 조사를 하다 보니, 젊은 2030시청자들을 제대로 포섭하지 못했더라고요. 그래서 사용자가 급증하고 있던 페이스북을 이용해야겠다고 판단했죠. SNL을 좋아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도달하기 위해서요.”

누구도 건드려보지 않았던 페이스북을 하겠다니, 반대도 적지 않았습니다. ‘성공한 전례가 없다’느니 ‘아직은 트위터가 대세’라느니 온갖 걱정과 우려가 난무했죠. 전담 인력 없이 혼자 해보겠다는 그의 말에 어렵게 조건부 허락이 떨어졌어요. 그런데 반응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뜨거웠습니다. 재치 넘치는 포스팅에 팔로어 수가 폭발했고, 계정의 구독자 수는 단숨에 10만을 찍었죠. 영상 조회수는 500만까지 올랐고요. 입사 1년도 되지 않은 그에게 ‘SNS 마케팅 강연 요청’이 들어올 정도였다고 해요.

SNL 코리아 시즌3의 페이스북 홍보 포스팅. 포스팅에 활용한 사진들은 대부분 영준씨가 직접 현장에서 찍은 것들이다. 짧고 유머러스한 문장들이 눈길을 끈다. 정영준 제공

보통은 ‘내가 이걸 잘한다’ 싶으면, 옳다구나 그것만 파잖아요? ‘반골 기질’이 다분했던 영준씨의 경우는 달랐다고 해요. ‘잘한다’는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기 시작하니까, 오히려 완전히 다른 걸 배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가 선택한 다음 행선지는 ‘광고팀’이었어요. 마케팅팀에서 ‘돈 쓰는 일’을 해봤으니, 이젠 ‘돈 버는 일’을 배워 비즈니스 감각을 키워야겠다는 속셈이 있었죠.

“광고팀에선 콘텐츠 안에 PPL이라 불리는 간접광고를 자연스럽게 녹이는 일을 했어요. 전 PPL이 미디어와 시청자가 함께 참아내는 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얘들아, 이거 약속이다? 잠깐만 참아줘! 우리도 돈 좀 벌자!’ 하고 간접광고를 털기 시작하면 시청자는 ‘그래, 나 이거 공짜로 보고 있으니 좀 참아줄게’ 하고 버티는 시간. 광고라는 게 다 그런 거잖아요? 근데 저는 그 시간을 좀 덜 피로하게, 덜 괴롭게 만들고 싶은 거예요.”

"광고는 광고 나름대로 재밌었어요. 성과가 숫자로 찍히니 성취감이 대단했죠. 사업 근육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됐고요." 김하겸 인턴기자

당시 쇼미더머니 시즌 4를 맡았던 영준씨는 메인 스폰서였던 아디다스와 기아자동차에 색다른 광고 아이템을 제안해요. “원래대로 하면 ‘지금부터 광고입니다~’ 하는 장면을 꼭 넣어야 해요. 이를테면 이런 거죠. 프로그램 중간에 뜬금없이 아디다스 매장에 가요. ‘30분 줄 테니 다 골라와. 다 사줄게’라고 말하면 참가자들이 막 환호하며 쇼핑을 해요. 거울 앞에서 운동화도 신어보고 옷도 입어보죠. 그러면 카메라가 브랜드 상표를 쭉 훑어 줘요. 전 그런 장면이 너무 참기 힘든 거예요.”

대신 영준씨가 제안한 건 아디다스와 기아자동차만을 위한 비트를 만들어 ‘음원 미션’을 내는 것이었어요. 우승자의 작품은 브랜드의 광고 음악으로 제작하고, 뮤직비디오까지 만드는 게 PPL의 조건이었죠. 스폰서의 제품을 직접 노출시키는 데 급급하기보단, 힙합 서바이벌이라는 프로그램의 맥락 안에 ‘녹아들 수 있는’ 광고안을 만든 겁니다. 광고에도 콘텐츠 만들 때의 영혼을 실으니 시청자들의 반응이 특히 좋았죠.

“이런 기획안을 만들면, 엄청나게 손이 많이 가고 품이 들어요. 담당자가 제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바뀌면 바로 사라져 버리죠. 창작자로서의 감각이 없는 사람에겐 힘든 아이템이거든요. 신기한 게 저는 항상 ‘손 많이 가는 걸’ 만들어 왔더라고요. 똑같이 돈을 버는 거면, 훨씬 품이 덜 드는 방법을 찾아가는 게 상식이잖아요? 근데 저는 늘 비효율을 찾아가는 스타일이었어요.

어쩌면 영준씨는 본능적으로 알았는지도 모릅니다. 투자 대비 효율이나 가성비에 매몰되면 ‘전에 없던 새로운 것’을 시도하긴 어려워진다는 걸요.

간접 광고도 그에게는 콘텐츠의 일부였다. 김하겸 인턴기자


Chapter2. YG, 유병재, 스탠드업 코미디를 통해 깨달은 '파트너십'의 본질

<정의 독백>

6년 만에 CJ ENM을 퇴사할 때 주변 사람들한테 이렇게 말했어. "난 코미디로 사업을 할 거야."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지.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는 사람도 별로 없었어. 그냥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그때만 해도 코미디는 돈 냄새 안 나는 시장이었거든.

언젠가 내 회사를 만들겠다고 생각하니, 문득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어. 기업의 자제들은 입사하자마자 자기 회사의 여러 부서를 반년, 1년씩 돌아다닌대. 한 5년 쯤 이곳 저곳 옮겨 다니며 다양한 일을 배우다가, 경영부서로 간다고 하더라고. 그런 게 ‘제왕학’이라는 건가 싶더라. 부분을 하나하나 다 알아야, 전체를 경영할 수 있는 거구나.

나는 상속자도 부잣집 아들도 아니니까, 내 힘으로 나를 돌려야겠다 싶었지. 오케이. 제작사에서 마케팅이랑 광고를 배웠으니 이 다음엔 어딜 갈까? 아, 매니지먼트를 배워야겠다. 그렇게 다음 행선지가 정해졌지.

2016년, YG엔터테인먼트는 안영미와 같은 예능인들을 새롭게 영입하며, 영준씨에게 러브콜을 보냈습니다. 가수 기획만 해왔던 회사니, 코미디 생태계의 흐름을 아는 사람의 조언이 필요했던 거죠. 영준씨가 YG에서 만든 팀의 이름은 무려 ‘코.미.디.팀’이었는데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팀 이름에 코미디가 뭐냐’는 잔소리부터 ‘촌스럽다’, ‘너무 정직해서 없어 보인다’라는 직설까지... 이번에도 말이 참 많았습니다.

말도 탈도 많았던 이 ‘코미디팀’에서 영준씨는 운명의 짝꿍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코미디언 유병재씨였죠. 그는 몇 마디 가벼운 말로도 사람들을 웃겨 쓰러뜨리는 알찬 내공의 소유자였어요. 페이스북에 자주 올리곤 했던 ‘유병재식 농담’은 찰진 ‘말맛’을 자랑했죠. 일침과 풍자를 녹인 말장난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습니다. 눈 밝은 영준씨에게 그 재능은 마치 심지처럼 보였습니다. 불만 붙여주면 활활 타오를 수 있는, 그러나 아직은 조용히 가능성을 숨기고 있는 마른 심지.

“수십 년을 코미디만 미친 듯이 보니까, 어떤 사람을 보면 ‘아, 얘 이거 잘하겠네’ 하는 감이 올 때가 있어요. 병재씨를 보고는 ‘스탠드업 코미디’를 떠올렸죠.

2017년, 영준씨는 유병재씨와 함께 스탠드업 코미디 공연 '블랙코미디'를 만들었다. 400명 규모의 작은 소극장에서 시작했다. 이 공연의 영상 편집본은 유튜브에 업로드되자마자 조회수 700만 회를 훌쩍 넘겼다. 현재는 넷플릭스에 판권이 팔려 유튜브 풀버전은 삭제된 상태다. 정영준 제공

가수 지디가 프로듀서 테디와 함께 곡을 만들 듯이, 영준씨는 병재씨와 함께 ‘스탠드업 코미디’ 제작에 뛰어들었어요. 그때만 해도 스탠드업 코미디는 한국에선 누구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생소함 그 자체’인 장르였다고 해요.

“첫 번째 회사를 퇴사할 때쯤, 재미로 ‘코미디의 정석’이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든 적이 있어요. 거기에 외국 스탠드업 코미디에 한글 자막을 단 영상을 올렸는데, 사람들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와, 이거 뭐냐, 너무 웃기다면서. 그래서 저는 국산 스탠드업에도 가능성이 있다고 봤어요. 마침 유병재씨에겐 확실한 재능이 있었고요.

영준씨는 관객이 딱 400명 들어가는 소극장을 빌렸습니다. 광고 비즈니스 업무를 할 때, 스스로 세운 철칙을 따랐죠. ‘규모는 작게, 적자 없이 시작한다.’ 세트, 소품, 무대연출까지 모두 영준씨가 직접 맡았습니다. 병재씨가 써 온 대본 초안을 함께 고치며 창작 파트너 역할까지 자처했어요. 병재씨가 작곡을 하면, 영준씨는 편곡을 하는 수준으로 함께 대본을 완성해 나갔죠. 그 과정에서 '매니지먼트'란 곧 '파트너십'이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2018년 4월 서울 용산구 한남동 언더스테이지에서 열린 스탠드업 코미디 'B의 농담' 제작발표회 현장. 당시 영준씨는 YG스튜디오 코미디팀의 팀장으로 이 무대에 올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병재씨랑 저는 만화가와 편집자 같은 관계였어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만화 '바쿠만'은 만화가 지망생 소년들의 성장 스토리를 담은 작품인데요. 만화가에게 편집자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가 나와요. 어떤 편집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만화의 퀄리티, 작품의 운명이 바뀌어 버리죠. 아직도 일하다 보면 그 대목이 떠올라 가끔씩 펼쳐보곤 해요."

2018년 넷플릭스의 스폰서를 받아 제작한 유병재 스탠드업 코미디쇼 'B의 농담'. 영준씨는 이 쇼를 통해 '극단적 분열 사이에 낀 중간자의 비명'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7년, 작은 소극장에서 시작한 병재씨의 스탠드업 공연 '블랙코미디'는 유튜브에 업로드되자마자 ‘100만’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곧바로 넷플릭스로부터 러브콜이 왔죠. 스폰서를 받아 제작한 후속 공연은 1,300석 대공연장인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열었어요. 1분 만에 3회 공연 전석이 매진될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죠.

“그 기세를 몰아서, YG엔터테인먼트 안에 코미디 레이블을 꾸리고 싶었어요. 눈여겨보고 있던 코미디언들을 영입해 코미디 콘텐츠를 만들고 싶었죠. 유튜브로 무대를 넓혀 보고 싶기도 했고요. 하지만 회사랑 생각이 맞지 않았어요. 어쩔 수 없었죠. 그렇다면 나가서 해야겠구나.” 2019년, 그렇게 그는 3년을 몸담았던 YG를 떠나 다음 정거장인 MCN ‘샌드박스’로 가게 됩니다.

2018년, 홍대의 작은 소극장에서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김민수, 이용주, 정재형씨. 영준씨는 이곳에서 이들의 재능을 미리 알아봤다. 1년 후 이들은 함께 '피식대학'을 만든다. 코미디헤이븐 캡처

2019년은 콘텐츠 주 무대가 유튜브로 옮겨 가던 시대였어요. 웃찾사는 폐지된 지 오래, 개콘 역시 저조한 시청률 속에 완전히 명맥을 다해가고 있었죠. “신기한 게, 당시 유튜브 생태계를 보면 코미디 쪽이 완전히 비어 있었어요. 이 공백을 어떤 사람들로 채울까. 그게 회사의 고민이자 저의 고민이었고요.” 영준씨는 젊은 개그맨들이 모여드는 홍대 소극장을 찾아다녔습니다. 웃찾사와 개콘에서 방생된 코미디언들을 모아 밥 사주고, 술 사주며 고민을 들어줬죠. ‘유병재 스탠드업 코미디’로 홈런을 쳤던 영준씨는 그들에게 이미 유명 인사였거든요.

코미디언 이창호, 곽범이 콤비를 이뤄 만든 만담 쇼 '까브라더쇼'의 한 장면. 영준씨는 이들을 처음 본 순간부터 이들이 천재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후일 이들은 유튜브 채널 '빵송국'을 함께 만든다. 페이스북 '코미디의 정석' 캡처

곽범, 이창호씨의 만담 공연 ‘까브라더쇼’에 처음 갔을 때가 안 잊혀져요. '와, 너무 잘한다, 얘네 천재다' 싶더라고요. 그다음 주에 병재씨를 데려가고, 또 그다음 주엔 유튜버 장삐쭈씨를 데려가서 세 번을 연달아 봤어요. 그 정도로 좋았죠. 그런데 갈 때마다 관객이 스무 명도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제안했습니다. 유튜브라는 새로운 판 위에서 ‘제대로 놀아보라’고요. 개그맨 이용주, 정재형, 김민수씨가 함께 만든 ‘피식대학’ 역시 비슷하게 시작됐죠.

영준씨는 오직 '장삐쭈' 하나를 보고 샌드박스로 이직했을 정도로 열렬한 그의 팬이었다. 더빙 애니메이션 '신병' 시리즈로 이름을 알린 장삐쭈는, 현재까지도 작가를 따로 두지 않고 모든 플롯과 대본을 직접 쓴다. 게다가 수십 명에 달하는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모두 혼자 연기한다. 극의 몰입을 깨지 않기 위해 얼굴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 장삐쭈는 영준씨와 함께 MCN 샌드박스를 나와 메타코미디의 1호 크리에이터가 됐다. 메타코미디 제공

한편 MCN에 몸담을수록 영준씨는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MCN은 유튜버들을 크리에이터가 아니라 하나의 ‘채널’로 보거든요. 창작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파트너의 역할보단, 채널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비즈니스'로서의 비중이 더 컸죠. ‘매니지먼트의 본질은 창작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라고 믿는 영준씨의 소신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재능을 다루는 일을 할 때, ‘비즈니스’ 관점만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돈 벌까’만 생각하면, 그 사람의 10년지대계, 20년지대계를 도울 수 없어요. 코미디언이 가진 예술성과 창의성, 상업적 가능성을 함께 봐 줄 수 있어야 하죠. 그래야 그 사람의 커리어가 하강하는 순간에도 그걸 같이 띄워볼 수 있는 원동력이 생기고요. 하지만 여러 회사를 다녀보며 깨달았죠. 이런 생태계는 내가 직접 만들지 않는 이상 절대로 그냥 만들어지지 않겠다는 사실을요.


Chapter3. '하고 싶은 거 다 해!' 멍석을 깔았다, 940만명이 열광했다

<정의 독백>

사람들이 자주 물어봐. ‘대박’을 터뜨릴 만한 코미디언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은 어떻게 길러진 거냐고. 솔직히 말하면 그런 안목 같은 거 따로 없어. 내가 남들보다 특별히 대단한 눈을 가지고 있어서 이들을 발굴해낸 게 아니거든. 다른 누가 봤어도 이 친구들은 틀림없는 ‘천재’라고 생각할걸. 조금만 눈길을 줘도 그 비범함은 다 보여. 무관심 속에 파묻혀 있어서 제대로 발견되지 못했을 뿐이지.

그들의 압도적인 재능을 보며 탄식할 때가 많았어. 왜냐고? 이 친구들이 가진 가능성에 비해 코미디가 파고들 수 있는 분야가 너무 좁은 거야. 기존의 코미디가 ‘점’에 불과했다면, 나는 그걸 ‘면’으로 넓히고 싶었어. 진짜 실력 있는 희극인들이 코미디의 바운더리를 넘어 더 멀리 뻗어 나갈 수 있도록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이분들 천재인 것 같아요.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대단한 사람=코미디언들ㅠㅠㅠ’

피식대학의 유튜브 콘텐츠를 보면 이런 댓글이 유독 많아요. ‘어떻게 작가, 연기자, 연출가가 한 몸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지 그저 감탄만 나온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죠. 피식대학의 장수 인기 코너 ‘한사랑산악회’를 예로 들어볼까요? 거친 동남 방언을 구사하며 ‘해병대 이력’을 자랑하는 독불장군 회장 아저씨부터, 교포 출신인 걸 동네방네 소문내 놓고도 자신 있게 엉터리 영어를 쓰는 LP 바 사장 아저씨까지. ‘페이크 다큐’에 가까울 정도로 대한민국 60대 아저씨들의 전형을 사실적으로 복원해냈죠.

피식대학의 장수 코너 중 하나인 '한사랑산악회'는 주말마다 산에 오르는 중년 아저씨들이 주인공인 휴먼드라마 시트콤이다. 코미디언 김민수는 산악회장 김영남을, 이창호는 영등포 상가 번영회장 이택조를, 이용주는 LP 바 사장 배용길을, 정재형은 정년이 코앞인 물리 교사 정광용을 연기한다. 주변에 흔히 있을 법한 60대 아저씨들의 모습을 '찍어낸 듯이' 모사하는 솜씨가 발군이다. 왼쪽부터 이용주, 정재형, 김민수, 이창호. 메타코미디 제공

60대를 연기하지만 코미디언들의 실제 나이는 대부분 30대거든요. 그런데 탑골공원에서 찍은 영상을 보면, 길에서 장기를 두는 비슷한 나이대 아저씨들이 그들을 스스럼없이 ‘또래’로 대해요. 그만큼 이 캐릭터들에 ‘위화감’이 없다는 뜻이죠.

영준씨는 ‘남 눈치 안 보고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요. 이것이 ‘메타코미디’의 역할이죠. 공개 코미디 시대에는 콘텐츠의 제작 권한을 방송사 PD나 작가가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달라요. 코미디언들이 직접 플롯을 짜고, 캐릭터를 설계하고, 세계관을 건설하죠. 이들이 가진 기획력, 구상력, 연기력이 입체적으로 발휘될 수 있는 환경이에요. 이 과정에서 영준씨의 몫은 ‘진두지휘’하거나 ‘감독’하는 게 아니라, 필요할 때 조미료를 쳐 주는 조력자의 역할이라고 해요. 리드하는 게 아니라, ‘파트너’가 되어주는 겁니다.

2000년대 중반 '싸이월드' 감성을 듬뿍 담아 만든 '05학번이즈백' 시리즈. 망고 나시와 본더치 모자, 카고바지와 쇠사슬 체인, 비니와 트레이닝 집업, 페도라와 팔토시 등 2000년대 중반을 강타했던 과한 패션 유행을 그대로 재현했다. 코미디언 김해준은 동대문 밀리오레에서 옷 장사를 하는 '쿨제이'를 연기해 특히 인기를 끌었다. 유튜브 캡처

콘티를 짜는 것부터, 의상과 소품을 준비하는 것까지 모두 코미디언들이 직접 해요. 대강의 설정만 짜두고 촬영장에 나가거든요. 현장에서 연기하면서 즉흥으로 채워 넣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저 역시 촬영을 따라가서 이런저런 피드백을 아끼지 않죠.”

영준씨는 이들의 사무실이나 스튜디오에 ‘옆집 친구네 놀러 가듯’ 자주 방문한다고 해요. 기획 회의가 열릴 때면, 팀의 일원이 되어 참여하죠. 실제로 그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캐릭터가 하나 있는데요. 바로 ‘김갑생할머니김’의 재벌 3세 이호창(이창호 역)입니다. 지난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죠.

피식대학의 'B대면데이트' 시리즈엔 소개팅에서 만나면 당장 도망가고 싶을 법한 '폭탄' 남자들이 줄줄이 나와 부담스러운 구애를 펼친다. 느끼한 카페 사장 최준(김해준), 험악한 중고차 딜러 차진석(이용주), 다단계 직원 방재호(정재형), 허세 래퍼 김수민(김민수) 다음으로 등장한 것이 김갑생할머니김의 재벌 3세 이호창(이창호)이다. '당신이 나를 싫어할 리 없다'는 거만한 태도가 매력 포인트. 후발주자지만 가장 강력한 '인기 캐릭터'가 됐다. 한사랑산악회의 투덜이 아저씨 이택조와 동일 인물이라는 항간의 의심이 있다. 유튜브 캡처

“피식대학의 ‘B대면 데이트’ 시리즈가 한창 카페 사장 최준(김해준 역)으로 인기몰이가 되던 때였어요. 대적할 만한 캐릭터가 등장해야 할 타이밍이었죠. 바보 같은 재벌 캐릭터가 나오면 재밌을 것 같았어요.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엄청 거들먹거리는, 또 자기 자신의 멋짐에 지나치게 취해 있는 '본부장님'으로 가자고 제안했죠. 그때 마침 불현듯 떠오른 게 ‘김’이었어요. 아, 김 재벌 하면 웃기겠다. ‘김갑생’이라는 회사명도 창호씨의 실제 할머니 성함이거든요. ‘Gim for Prime Life’라는 회사 슬로건도 김 공장 촬영가는 길에 그냥 툭하고 나온 아이디어였어요. 눈치채셨겠지만, ‘갑생(甲生)’이라는 한자어에서 그대로 따온 거예요.”

김갑생할머니김의 전략본부장 이호창(이창호 역)은 대한민국 외교부로부터 광고 제안까지 받았다. 이 영상에서 이호창은 '2021 P4G 서울 정상회의'의 발표자로 나서 'ESG 경영'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한다. "김갑생할머니김 정도 되는 대기업이 이렇게까지 책임지려는 모습, 너무나 일류답고 멋지다"는 과몰입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유튜브 캡처

김 재벌 이호창 캐릭터는 카페 사장 최준에 준하는 인기를 몰았어요. 팬들이 ‘극성’으로 과몰입을 해준 덕에 나중엔 ‘시가 총액 500조, 코스피 1위 기업'이라는 설정까지 추가됐죠.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의 신년사를 패러디한 영상은 지금도 피식대학의 '레전드 전당'에 올라가 있고요.

메타코미디는 총 3개의 조직으로 나뉘어 있어요. 아티스트(artist) 매니지먼트, 비즈니스(business) 매니지먼트, 그리고 크리에이티브(creative) 매니지먼트죠. 아티스트 매니지먼트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아는 로드 매니저의 일이에요. 연예인의 모든 스케줄을 따라다니며 관리하는 현장직이죠. 비즈니스 매니지먼트는 광고 제의나 비즈니스 문의를 조율하는 일이고요. 이 두 가지 직무는 다른 연예기획사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죠. 특이한 건 세 번째, ‘크리에이티브 매니지먼트’인데요. 이들은 영준씨가 지난 6년간 해왔던 것처럼 코미디언들의 ‘창작 파트너’로서 일한다고 해요. 소속 코미디언들이 새로운 코너나 캐릭터를 구상할 때, 그들 옆을 지키며 피드백과 제안을 아끼지 않는 역할이죠.

“소속 코미디언들이 기획 회의를 하다가, ‘어? 이 부분은 약간 애매한데?’ 싶으면 크리에이티브 매니저들을 불러요. 새로운 채널을 추가로 만들어보고 싶은데 도움이 필요하다? 바로 같이 의논하죠.”

코미디언 김원훈, 엄지윤이 만든 숏박스의 '장기연애' 시리즈. 2021년 10월 시작했지만 몇 달간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2022년 1월 올린 '장기연애'편이 알고리즘을 타고 조회수가 폭발했다. 20일 만에 구독자 수가 50만을 돌파했고, 현재는 200만을 향해 가고 있다. 일상에서 겪을 만한 일들을 빠른 템포의 콩트로 구성한 스케치 코미디를 주로 올린다. 리얼한 설정, 실감 나는 연기에 많은 이들이 열광했다. 유튜브 캡처

실제로 숏박스는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했어요. ‘웃낌표’로 활동하던 코미디언 김원훈, 조진세씨가 스케치 코미디 도전을 고민할 무렵 영준씨가 ‘새로운 채널로 시작하라’고 조언했다고 해요. 별다른 반응도 없는 영상을 묵묵히, 꾸준히 올리던 어느 날, '장기 연애편' 영상이 인기 급상승 동영상에 오르며 채널 구독자 수가 로켓 성장했죠.

중요한 건 우리가 함께 성장한 관계라는 사실인 것 같아요. 무명 시절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게 된 지금까지, 모든 순간을 다 함께 했으니까 사이가 돈독해질 수밖에 없죠.”

코미디언 조진세, 엄지윤이 만드는 숏박스 찐남매 시리즈. 숏박스의 대본은 모두 코미디언들이 직접 쓴다. 5분짜리 콩트 하나를 만들기 위해 세 사람이 한자리에 앉아 10시간씩 대본을 쓰기도 한다. 유튜브 캡처


Epilogue. 좋은 농담이란 무엇인가, 이 어려운 질문을 그만둘 생각은 없다

‘좋은 농담이란 무엇인가?’

벌써 12년째, 코미디 일을 하고 있지만 영준씨는 아직도 어렵다고 합니다. 왜냐. 코미디란 ‘양날의 검’이거든요.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자신의 손이 다칠 수도 있는 위험한 무기죠. 맥락을 조금만 놓쳐도 엉뚱한 곳을 찔러 엄한 이들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고요. 어설픈 농담은 ‘비웃음’이나 ‘조롱’으로 흘러가기 쉬워요. 실패한 농담은 때때로 파국을 빚기도 합니다.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사회자 크리스 록이 배우 윌 스미스에게 ‘실시간 폭행’을 당한 장면이 대표적이죠.

30대 초반에 갑자기 탈모가 생겼는데, 그때부터 대머리 개그가 하나도 안 웃긴 거예요. 그 전엔 대머리를 멸시하는 농담이 그렇게나 많은 줄 몰랐죠. 사람마다 각자 서 있는 지점에 따라 ‘불편함’을 느끼는 척도가 다 달라요. 그러니 '불편하지 않은 코미디를 만드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에요. 유병재씨와 함께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면서도 상처가 많았어요. 잘 만든 농담은, 탄탄하게 짜여진 맥락 위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건데, ‘일부분’만 오려내 욕을 퍼붓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하지만, 저는 이마저도 필요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 일이 아무리 어려워도 그만하거나 포기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영준씨는 오늘도, 치열하게 고민하며 웃음과 불편함의 경계를 찾아 나섭니다. 일단 ‘웃기는 걸’ 제대로 하다 보면, ‘노련하고 멋지게 웃기는 방법’ 역시 찾아지지 않을까, 기대하고 고대하면서요.

좋은 농담의 조건으로 영준씨는 '시대정신을 얼마나 잘 담아냈는가'를 꼽았다.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평범함의 가치를 비틀면 제대로 터지는 코미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려면 시대의 맥락을 잘 읽어내는 눈이 필요하죠." 김하겸 인턴기자

마지막으로 그에게 ‘일의 재미’를 물었습니다.

“얼마 전에 고등학교 동창회에 갔는데요. 제 친구 중에 의대에서 교수를 하는 수재가 한 명 있어요. 그 친구가 묻더라고요. ‘영준아, 너는 일이 재밌냐?’ 0.1초도 고민 안 했던 거 같아요. ‘솔직히 재미없다고 말하면 거짓말인 거 같아. 재밌어’라고 대답했어요. 친구가 한숨을 푹 쉬며 ‘부럽다’고 하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금까지 나에게 일이란, 재미와 동의어였구나. 그러니 도저히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는 거죠.

영준씨가 세상에 끊임없이 농담을 권하는 이유는 단순히 ‘재미’ 때문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는 ‘코미디란 분출구’라고 말해요. 오직 농담만이 분노와 혐오, 비방과 대립으로 팽팽해진 세상의 표면에 구멍을 뚫어 ‘압력을 빼는 역할’을 해줄 수 있다고 믿고 있죠.

저는 웃음이 없으면, 세상이 영영 분노로 가득 찰 것 같아요. 물론 저희도 실패할 때가 있겠죠.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할 거예요. 우리의 일은 세상에 더 많은 웃음을 만드는 거니까.”

그는 상상합니다. 사람들이 더 자주 웃는다면, 농담 앞에 조금 더 관대해진다면, '웃어넘기는 것'이 삶의 비극에 대처하는 가장 슬기로운 방법임을 더 알게 된다면, 그리하여 모두가 한 발자국씩 더 '유머 친화적'인 세상에 다가간다면, 지금보다 조금은 더 사는 재미가 나지 않을까? 그런 날들에 닿기 위해 오늘도 그의 웃음 공방은 바쁘게 돌아갑니다.

메타코미디의 크리에이터, 직원들과 함께한 영준씨. 가운데 선 영준씨를 중심으로 코미디언 김민수, 정재형, 이용주, 이창호씨가 보인다. 정영준 제공

▶ '웃찾사·개콘 넘어선 내공, 정영준의 일잼포인트' 읽으러 가기 (관련기사 ②)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2071214190005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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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길우 디자이너


박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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