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롭지 못한 미국을 보는 착잡함

입력
2022.08.22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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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감축법 자유무역 근간 흔들어
중국 반민주 욕하더니 일방주의 폭주
보편적 가치 배반 갈등·투쟁 부를 것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기후변화 대응과 의료보장 확충 등을 골자로 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하고 있다. 하지만 감축법의 일부 조항은 자유무역주의의 근간을 흔들 위험이 크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간) 워싱턴DC 백악관에서 기후변화 대응과 의료보장 확충 등을 골자로 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하고 있다. 하지만 감축법의 일부 조항은 자유무역주의의 근간을 흔들 위험이 크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의 ‘2022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은 미국이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워 온 ‘보편적 가치’에 대한 신뢰를 다시 한번 배반한다. 이번에 훼손된 보편적 가치는 인류공영을 위한 ‘자유롭고 공정한 교역’이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는 2017년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일방 탈퇴함으로써 글로벌 지도국으로서 미국의 위상을 스스로 훼손했다. 하지만 이번 감축법을 통한 자유무역 가치 훼손은 기후협약 탈퇴 못지않은 폭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식이라면 미국이 민주주의 운운하며 중국을 비난한들 어떤 바보가 동조하겠는가.

지난 16일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으로 발효된 감축법의 목적은 역대급으로 치솟은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구조적으로 완화하는 것이다.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대표적 변수인 에너지의 경우, 3,690억 달러(약 480조 원)를 투입해 신재생에너지 투자를 적극 확대함으로써 화석연료 의존도를 줄이고 에너지 가격 안정과 온실가스 감축 목표 이행을 동시에 이루고자 한다.

‘에너지 안정화’와 함께 인플레 감축을 위한 또 다른 구조적 조치는 ‘공급망 재편’이다. 그동안 미국은 글로벌 밸류체인의 정점에서 생산설비를 아웃소싱함으로써 비용을 낮추고 더 많은 이익을 누려 왔다. 그 결과 자본 이익은 극대화했지만, 수입 인플레이션 위험이 높아지게 됐다. 미국 내 일자리가 줄고 소득양극화가 심화되는 부작용도 빚어졌다. 감축법은 이런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소재와 부품 공급, 생산기반 등 밸류체인 전체를 미국 내에 재구축하는 조치를 포함하고 있다.

문제는 바로 이 대목이다. 미·중 ‘반도체 전쟁’ 단계만 해도 미국의 목표는 미국이 보유한 첨단기술의 불법적 중국 유출, 중국의 반도체 소재·부품의 무기화 등을 막기 위한 우방국 간 ‘반도체동맹’ 구축이었다. 이는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되, 우방국 간 국제분업체제는 인정하는 조치였다. 하지만 감축법에서는 미국 내 전기차 구매자에게 적용하는 대당 최대 7,500달러(약 1,000만 원)의 구매 보조금 지원(세금 감면) 대상을 북미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로 한정함으로써 외국산 완성 전기차에 대해 실질적 무역장벽을 구축한 셈이 됐다.

사실 ‘미국에서 팔려면 미국 내에서 생산하라’는 식의 노골적 일방주의는 전기차에만 적용되고 있는 게 아니다. 이미 반도체와 배터리 등에서도 미국 내 생산이 아닐 경우 차별적 대우가 예고돼 각국의 생산기지가 미국으로 급격히 이전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당장 지난해 우리나라의 미국 직접투자가 2020년 대비 83.4%나 폭증한 278억 달러에 달하고, 최근 삼성전자 반도체공장부터 SK하이닉스, LG전자, 현대·기아차 등 우리 글로벌기업들의 대규모 미국 투자계획 발표가 잇따르는 것만 봐도 추세는 뚜렷하다.

감축법은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바이든 정부와 민주당 득표에 크게 기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자유무역 증진을 위한 FTA 규정상 ‘내국인 대우 원칙’과 세계무역기구(WTO) 규범인 ‘최혜국 대우 원칙’ 등과 정면 충돌하며 글로벌 자유무역의 근간을 뒤흔들 위험이 크다.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일찍이 정의로운 보편적 가치야말로 국제관계에서 자발적 동의와 지지를 이끄는 매력으로서 ‘소프트 파워’라고 간파했다. 미국은 자유민주체제 선도국으로서 그동안 소프트 파워 1위국 자리를 굳건히 유지해왔다. 하지만 트럼프 정부 이래 미국의 소프트 파워는 급속히 소실되어 가는 느낌이다. 전락하는 미국의 모습도 착잡하지만, 정작 걱정인 건 세계가 보편적 가치에 대한 믿음을 잃고 갈등과 투쟁이 만연하는 야만의 시대로 점차 회귀하는 듯한 상황이다.

장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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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철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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