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에 상상력 더하는 순간...하나의 이미지가 빚어내는 수많은 창작물

입력
2022.09.06 04:30
수정
2022.09.06 07:32
15면


편집자주

아무리 유명한 예술 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4> 스토리텔링 그림감상법

"개취존중"이라는 말이 자주 들린다. "개인의 취향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화제의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감상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사람들끼리 서로 싸우다가 결국 "개취존중!"을 외치면서 물러나는 일도 많아졌다. 과거 20세기 아날로그의 문화 감상에는 개인 취향이 가지는 지분이 적었다. 대중문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했지만 고급문화와의 경계가 제법 선명했었다. 그러나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문화적 콘텐츠는 대중문화와 고급문화의 경계가 뒤섞이면서 취향에 따른 감상 평가도 나노(nano) 단위로 쪼개지고 달라졌다. 길거리 노포의 떡볶이집도 미쉐린 가이드에 수록된 고급 레스토랑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린다. 미술 작품에 대한 가치와 평가도 과거와는 달라지고 있다. 다양한 요리로 가득한 뷔페식당에 서 있는 사람처럼, 이제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맞는 그림을 선택한다.

명작이냐, 종이 쪼가리냐…감상법 알면 위축되지 않아

그렇다 해도 그림을 어떻게 감상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남는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바꾼 위대한 명작일지라도 나에게는 길거리에 흩어져 있는 광고 전단지 같을 수 있다. 문제는 그 누군가가 해당 분야에서 알려진 비평가나 평론가일 때다. 내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나의 문화적 소양 부족인가 하는 위축감이 생길 때, 우리는 그림 앞에서 두려움을 가질 수 있다. "나는 원래 투뿔 한우 스테이크보다 막장에 찍어 먹는 순대가 좋을 뿐이야!"라고 우기는 것만으로는 그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는다. 개인 취향이라는 나의 주장이 근거 없는 우격다짐으로 끝난다면 감상은 즐거움이 아니라 외로움이 되고 만다. 그래서 알아야 한다.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과 과정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나의 취향은 그만큼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

현대인들이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은 보통 두 가지로 흐른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리고 "몰라도 느낀다"는 두 방향의 협업에서 감상은 이루어진다. 그림을 둘러싼 시대적 배경, 상황, 창작자에 대한 정보 등 그림을 이루고 있는 배경지식이 많을수록 그만큼 그림에 대한 감상은 깊어진다. 그러나 아무런 사전 정보나 배경지식이 없어도 놀라운 감동으로 남는 그림이나 예술 작품을 만나는 일도 우리 삶에서 흔히 일어난다.


그림도 외국어처럼 공부해야 VS 몰라도 느낄 수 있어

그림 감상과 관련해 미술교육학계에서 흥미로운 논쟁이 있었다. 1960년대 말 미국의 미술교육학자 존 데브스가 처음 '비주얼 리터러시(Visual Literacy)'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시각 이미지는 반드시 해석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텍스트상의 지식으로 다루자"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림을 잘 그려낼 줄 아는 것보다는, 그림과 시각 이미지를 읽고 해석할 줄 아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비평주의 미술교육론'이 대두됐다. 그림은 배워야 이해할 수 있는 외국어라고 보는 것과 같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주장이 당연히 강조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곧 반론에 부딪힌다. '표현주의 예술교육론'을 옹호하는 연구자들은 미술은 한 개인의 감정과 정서의 표현이기에 그림은 공부해야만 하는 외국어가 아니며, 예술가의 천재성이나 창의력은 지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몰라도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다. 20세기 미술교육론은 이러한 비평주의와 표현주의라는 큰 두 가지 흐름으로 연구됐다. 최근 미술교육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 입장이 따로 구분돼 대립하기보다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고 보는 편이다. 2000년대 이후로 접어들면서 비주얼 리터러시는 점차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라는 포괄적인 의미 속에 들어가게 된다. 예술로서의 그림이 더는 액자 안에만 머무르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몰라도 느끼는 감정도 지식만큼 중요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은 사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지식과 상식이 풍부할수록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깊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성실하게 학습하고 알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몰라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의외로 작품 감상에서 큰 부분을 담당한다. 이 영역이야말로 창작자가 얼마큼 보편적 감성을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시대정신'으로 끌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창작 역량이다. 대중적 콘텐츠일수록 '몰라도 느낄 수 있는' 지점이 중요하다. 특정 언어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수용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스토리텔링 감상법 도전: 김홍도 '노상파안'

앞서 말했듯이 감상은 어느 한쪽 방향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림을 본다는 것은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서 감상자 개인의 경험이 더해지는 과정이다. 이 사이를 조율하는 감상 테크닉이 있다. 상상력, 즉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다. 스토리텔링은 이미지에서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이다. 이것은 미디어 리터러시 감도가 빠른 사람일수록, 즉 이미지의 문화적, 사회적, 역사적 배경과 상식을 기초에 두고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그림을 보자마자 자동적으로 실행하는 첫 번째 과정이다. 셜록 홈스와 같은 탐정가의 시선으로 그림을 뜯어보는 것부터 시작하게 된다.

이 과정을 김홍도(1745~1806년?)의 '노상파안'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김홍도는 정통파 궁중화가이자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누렸던 조선시대 최고 스타 아티스트였다. 노상파안은 김홍도의 유명한 풍속 화첩 중 하나다. 밑도 끝도 없이 '길 위에서 미소 짓다'는 제목만이 이 그림에 대한 정보의 전부다. 그저 조선시대의 한 풍경일 뿐, 구체적으로 전해지는 지식이 없는 작품이다. 그러나 오히려 정해진 이야기가 없기에 우리는 마음껏 상상해 볼 수 있다.

먼저 그림 속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것부터 시작한다. 아이를 안고 업고 이동하는 가족이 길에서 말을 탄 양반과 스쳐가는 장면이다. 등장인물은 총 6명, 등장 동물들은 소, 말, 망아지, 닭, 총 4마리다. 인물들의 시선이 모두 다르다. 부채로 얼굴을 살짝 가린 큰 갓을 쓴 양반은 누구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머리쓰개를 살짝 들어 올리는 여인과 눈이 마주친 것인지, 아이와 닭과 짐까지 등에 업고 땀 흘리며 걸어가고 있는 (아마도) 남편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양반이 큰 말이 아닌 작은 조랑말을 타고 있다. 말을 몰고 가는 소년 하인은 옆의 가족에 시선을 주지 않고 있다.


노상파안(路上破顔), 단원풍속도첩, 종이에 담채, 27cm x 22.7cm,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노상파안(路上破顔), 단원풍속도첩, 종이에 담채, 27cm x 22.7cm, 국립 중앙박물관 소장



이제 여기에 몇 가지 아는 것들을 덧붙여 나가본다. 조랑말이 3월에 새끼를 낳아 5, 6월까지 젖을 물린다고 했으니 이 장면은 한창 싱그러운 녹음이 시작되는 깊은 봄이다. 젖먹이를 안고 있는 젊은 여인의 미소는, 어쩌면 걸어가는 중에도 굳이 젖을 먹겠다는 양반네의 어린 망아지에게 향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본다면 노상파안은 조선시대의 한가로운 봄날, 사람 냄새 물씬 나는 따뜻한 마을 어귀 풍경의 '스틸 컷(영화·드라마 등의 한 장면)'이다.

여기서부터 스토리를 상상한다.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엉큼한 미소를 건네는 양반과 서방 몰래 눈빛을 주고받는 여인이 등장하는 남녀상열지사 한 장면이라면 어떨까? 유쾌하고 불량스럽지만 귀여운 스냅 사진 한 장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주인공은 '썸 타는' 양반 사내와 아기 안은 여인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이 그림이 그려졌을 당시 조선시대의 신분 제도, 경제 상황 등에 대한 지식을 더해보면 조금 다른 이야기가 된다. 부채로 얼굴을 가린 사내의 갓은 넓고 크니 양반 신분이다. 양반의 말에는 화구통인지 우산인지 작은 것이 매달려 있다. 그것이 전부인 것으로 보아 단순한 외출로 보인다. 짚신을 신고 아이를 업고 걷는 사내의 갓은 조금 작다. 중인 신분이거나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평민과 다름없는 양반일 수도 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이동하는 가족은 짐이 많다. 장터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중일 수 있다. 또는 닭까지 등에 지고 가는 것으로 보아 식솔들 전부를 데리고 생존을 위해 살던 집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하는 어려운 상황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그림의 주인공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짚신 신은 사내가 된다.

또 다른 주인공도 가능하다. 양반의 조랑말 고삐를 쥔 소년에 주목해 보자. 소년은 신발조차 신지 못한 맨발이다. 놀고먹는 양반을 모시는 소년이 건너편 가족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몸집으로 보아 기껏해야 아직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인데 소년의 부모는 어디에 있을까? 소년은 왜 가족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얼굴을 돌려 외면하고 있을까? 이 그림의 주인공이 맨발의 어린 소년이 되는 순간 감상은 전혀 달라진다. 아까의 로맨스 드라마가 아닌, 모순된 현실에 대한 사회 고발의 한 장면이 된다.

김홍도의 노상파안은 예술과 역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과 상식이 있다면 좋겠지만, 아는 것이 부족해도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그림이다. 좋은 그림이란 무릇 사전 지식을 알아도 즐겁고, 몰라도 상관없이 즐거운 감상으로 마주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어떤 이에게는 김홍도의 노상파안은 한가로운 조선시대의 평화로운 장면이라는 감상에 그치지만, 어떤 이는 걸출한 영화, 드라마의 시놉시스(줄거리)를 떠올릴 수도 있다. 에로틱한 로맨스물에서부터 처절한 사회 고발 메시지를 담은 콘텐츠까지 전부 가능하다. 그것이 예술로서 그림이 주는 에너지와 힘이다.

상상을 지식으로 뒷받침하면 더 즐거워

그림 속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은 즐거운 과정이고 이를 통해 감동하는 것은 행복한 감상이 된다. 한 장의 그림에 대한 상상만으로도 한 편의 드라마, 소설, 영화가 가능해진다. 다만 관련된 지식을 알고자 조사하며 학습하고 그 위에 개인의 상상력을 더할 때 가치 있는 개인의 취향이 완성된다. 이러한 성실한 감상 과정을 거쳤다면 '내가 스테이크보다 순대가 좋은 이유'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근거를 알게 된다. 그림뿐만 아니라 각종 미디어에서 쏟아지는 광고 이미지, 매일 쓰는 제품에 새겨진 작은 이미지들도 그저 쳐다보는 것을 넘어, 그 뒤편의 무언가를 상상하는 훈련을 한다면 21세기의 화두, 크리에이티비티(창조성)는 좀 더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송주영 미술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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