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땅에서 왜 가야의 유적이...미궁의 '전북 가야' 미스터리

백제의 땅에서 왜 가야의 유적이...미궁의 '전북 가야' 미스터리

입력
2022.10.01 11:00
수정
2022.10.01 14:27
17면

편집자주

우리 역사를 바꾸고 문화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한 발견들을 유적여행과 시간여행을 통해 다시 한번 음미한다. 고고학 유적과 유물에 담겨진 흥분과 아쉬움 그리고 새로운 깨달음을 함께 즐겨보자.


<24> 전북 남원 운봉고원의 가야고분들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 두락리에서 발굴된 가야고분(두락리 32호분)과 출토된 철기유물들. 문화재청

전라도 지방에도 가야가 있었다? 흔히 한반도 고대 사국시대의 가야는 경상도 남부 지방에 위치했고, 전라지방에는 마한의 제국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런데 1982년 달빛고속도로라고 불리는 광주와 대구를 잇는 도로가 건설되면서 전북 남원 월산리에서 가야고분이 처음 발굴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후 전북의 동부 고원지대인 운봉과 장수 일대에서 가야고분들이 연이어 발굴되었다. 방대한 새로운 고고학 자료들을 토대로 가야의 실체와 범위를 반영해 우리 고대사를 다시 써야 할 판이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알고 있는 사실을 새로운 시각에서 봐야 하는 경우다.

전북 남원의 아영분지에서 앞쪽 붉은 표시지점이 월산리 고분이다. 멀리 연비산의 낮은 구릉지에 두락리 고분군이 보인다.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우리 고대사를 삼국시대라는 틀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삼국으로 정립되는 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역동적이었다. 사실 신라나 백제도 가야나 마한의 제국과 같은 시절이 있었을 것인데, 승자의 관점에서 쓰인 역사의 뒷면에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야나 마한 역시 400년 이상의 세월 동안 각 지역에서 지속되었던, 나름의 찬란한 문명을 가진 나라다. 특히 운봉지역의 가야고분들은 오늘날 평화스러운 풍경이나 고분의 화려한 부장품들과는 달리 한반도 남부 고대국가들의 처절한 생존전략을 엿볼 수 있는 유적이다.

운봉고원의 유곡리-두락리 가야고분

두락리 고분군은 말안장처럼 낮은 곳(붉은 표시지점)을 중심으로 양쪽 사면에 분포하고 있다.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남원에서 동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한참 올라가면 해발 약 500미터의 운봉고원이 평탄하게 펼쳐진다. 조선 중기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의 '난리를 피하기 좋은' 10승지의 하나인데 고대에도 오지 중 오지였을 법하다. 운봉읍에서 북으로 멀지 않은 곳이 인월인데 남쪽에 있는 실상사(實相寺)나 지리산 뱀사골을 들어가는 마을이다. 동쪽으로는 경상도 함양이 지척이고, 북으로 이어지는 아영면에는 풍천을 중앙에 두고 두락리와 청계리와 서로 마주보는데 가야계 고분들이 낮은 산등성이에 남아 있다. 청계리 앞의 월산리에는 가야고분들이 고속도로 건설로 많이 사라졌는데 현재 두 기가 복원되어 방문객이 내부를 살펴볼 수 있다.

아영분지 내 주요 가야고분의 위치 1. 유곡리와 두락리 2. 월산리 2. 청계리 4. 광평 5. 유곡리 성내토성 6. 건지리.

운봉고원에서는 지금까지 180여 기의 고분이 확인됐는데, 유곡리와 두락리 주변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두락리 고분들은 말안장 모양의 작은 구릉이 이어지는 경사면에 촘촘히 자리 잡고 있다. 앞에 널찍한 들판이 펼쳐진 마을 경로당을 지나 가파른 오솔길을 오르면 가건물로 만든 전시관 뒤편으로 40여 기의 고분들이 나타난다. 최근에 사적으로 지정되어 복원된 둥그스름한 봉분들이 고즈넉한 경관을 만들고 있다. 그동안 가야계 고분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정비에 힘을 쏟은 덕이다.

가야고분에서 백제의 유물이...

공중에서 본 두락리 고분군과 분포도.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수혈식석곽묘(竪穴式石槨墓)는 가야사람들이 많이 애용한 방식이다. 땅에 구덩이를 파고 벽에 돌을 쌓아 길쭉한 방을 만들고, 그 속에 시신과 장신구, 가야토기, 철제무기와 농구 등의 부장품을 안치하고 뚜껑을 덮어 만든 고분들이다. 그런데 두락리 32호분에서는 가야고분 최고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능형문으로 장식된 금동신발이 출토되었는데, 나주나 익산 등지에서 발견되는 백제계의 것과 유사한 모습이다. 두락리의 한 고분에서 출토된 목걸이, 팔찌 등 장신구의 기법도 백제 무령왕릉의 제품과 유사하다. 두락리 고분에서 나온 동물문양띠가 돌려져 있는 청동거울은 중국 후한대의 것인데 이보다 시기가 늦은 것이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적 있다.

공중에서 본 두락리 32호분 발굴조사 현장(왼쪽)과 실측 도면. 길이 7.3미터 수혈식석곽과 개석으로 구성됐다.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

또한 맞은편 마을인 월산리의 고분에서 손잡이 달린 쇠솥(鐵製鐎斗)과 함께 발굴된 중국 남조(南朝)제 청자 계수호(鷄首壺)는 기문국(己文國·기문가야)의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역관계를 반영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금동신발이나 계수호같은 위세품은 백제가 마한 지역 수장들에게도 주었던 것이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곳을 가야사람들의 무덤이라고 하는가?

두곽리 32호분에서 출토된 금동신발편(위)과 청동거울. 신발편에 압출 마름모(능형문)가 보인다.

고고학유적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여러 문화가 복합된 양상을 보일 때가 많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는 발굴된 유물 중에 가야계 토기가 압도적으로 많고 무덤의 구조 역시 가야 전통방식으로 가야식 생활과 의식문화를 보여준다. 그래서 위세품의 출처만 가지고 백제가 직접 다스린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가야계 사람들이 백제의 사비성에 왔다는 기록도 있고 실제 가야계 토기가 부여의 관북리(官庫里) 유적에서 발굴되기도 했다. 그리고 백제 땅이라고 볼 수 있는 부안의 해양제사유적인 죽막동에서도 가야계 유물들이 보인다. 가야-백제의 우호적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고분 축조양식도 돌로 쌓은 방의 측면에서 시신을 들여가는 횡구식(橫口式)이나 횡혈식(橫穴式)으로 바뀌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운봉 가야세력에 대한 백제의 영향이 점점 강해졌지만, 백제 무령왕이 반파국을 복속시키는 6세기 초중엽까지 독자적인 세력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운봉가야와 일본서기의 기문국

720년 완성된 일본서기와 6세기 중국 양나라 양직공도에는 가야계의 기문국들이 섬진강을 따라 있었다고 전한다. 재야사학자 일부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믿을 수 없고 이를 따르는 것은 친일사관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전북 동부 운봉지역은 기문국, 그리고 이보다 북쪽인 섬진강 상류수계인 장수지역의 가야고분들은 반파국(伴跛國)의 유적일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여러 학자들의 두드러진 의견이다.

두락리 30호 고분에서 출토된 항아리들에는 음식 먹거리들이 남아 있었다. 오른쪽 항아리에는 백합조개가 들어있었는데, 바닷조개가 제사상에 오른 것으로 보아 이동시간이 짧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두락리가 위치한 아영분지지역은 남강 상류수계에 연결되어 있고 백두대간의 동쪽에 해당하는데, 백제가 한성에 있을 때부터 이 지역을 통과해 섬진강을 따라 남해안으로 진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동쪽의 신라, 북쪽의 고구려와 경쟁하는 과정에서 왜와의 교류가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러한 사실이 백제사의 곳곳에 남아 있다. 무령왕도 일본으로 가는 도중 출생한 것을 보면 왜와 통교하기 위한 교통로의 확보는 국가 안위를 좌우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4세기 중엽 백제 근초고왕대에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七枝刀)도 이 길을 따라 이동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왜와의 교역을 위해 섬진강 하류지역을 백제가 차지하기 전까지는 중간지역인 가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을 것이고, 그 통로에 기문국이 있었다는 사실이 일본서기에 남게 된 연유일 것이다. 백제로서는 기문국 왕에게 최고의 선물을 보내 철생산 및 왜와의 교통로를 확실하게 확보하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가야가 어떻게 전라도에 나타난 걸까?

운봉고원과 진안고원 지대는 섬진강, 금강, 남강 등 주요한 강이 발원하여 사방으로 흘러가는 곳이다. 고대에 강을 따라 형성된 교통로가 이곳까지 연결되는 셈이다.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이 ‘가야본성(伽倻本性):칼과 현’ 전시회에 앞서 가야국의 거점도시를 연결하는 자전거 대회를 개최한 적 있다. 두락리고분에서 출발해 90㎞ 정도 떨어진 대가야의 수도인 고령군 대가야박물관까지 세 시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운봉-장수 가야세력들은 지리적으로 대가야와 밀접하게 연결된 위치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락리32호분에서 출토된 다양한 철기유물들. 문화재청

가야 출현 이전에 마한왕 달궁계곡피난 전설이나 마한 고분과의 양식적인 관련성으로 미루어 마한 문화가 희미하게 남아 있기는 하지만 고대 당시 정치적인 공백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무령왕대에도 이 지역으로 피신한 백제인들을 잡으러 온 것을 보면 오지였을 것이다. 고분의 갑옷과 무기 등 철기 유물이 보여주듯 철을 중시하는 가야가 최고급 니켈철이 생산되는 이 지역을 차지하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봉수(烽燧)를 쌓는 등 특별한 노력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역 토기문화의 변화로 볼 때, 섬진강을 따라 남해안 소가야와 아라가야 문화가 들어왔을 것이다. 이후 고구려의 압박으로 김해의 가야세력이 쇠퇴하자 고령의 대가야세력이 팽창하고 이곳을 선점하여 독립적인 나라를 형성했을 것이다. '전북가야-흥미진진한 가야철(鐵)' 고고학이 읽혀지는 대목이다.

사라진 고대문명이 있던 곳

가야 고분들이 곳곳에 확인되고 또한 뛰어난 유물들이 발굴되었지만 역사고도, 옛 도읍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에는 왕이 사용한 궁궐도 있음직하지만 아직은 미궁 속이다. 고고학 여행자로서 운봉고원만큼 환상적인 곳은 없을 듯하다. 통념을 깨는 고고학 유물이 쏟아져 나왔고 아직도 완벽히 설명되지 않은 고대 역사를 흥미롭게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전거대회 이후 이곳을 네 번이나 찾았다. 오늘날 도시의 먼지를 털어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 지리산 골짜기를 찾는다. 평탄한 능선에 섬처럼 떠 있는 가야고분을 보게 되면 사라진 고대문명의 장소라는 점에서 운봉고원을 신비로운 별천지로 느끼게 될 듯싶다.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한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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