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받을 세금" vs "그래도 믿어야" 개혁 방치에 MZ서도 갈린 국민연금 [리빌딩 국민연금]

입력
2022.10.11 04: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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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딩 국민연금]
<상> 신뢰 잃은 국민연금
낮은 소득대체율·불안정한 재정에
'용돈연금' 이미지로 전락… 불신 커져
그래도 국민연금만 한 노후 제도 없어
"MZ와 함께 연금 미래 담론 만들어야"

2015년 12월 12일에 촬영한 사진으로 서울 송파구 신천동 국민연금관리공단 앞에 시민들이 지나가는 모습. 배우한 기자

2015년 12월 12일에 촬영한 사진으로 서울 송파구 신천동 국민연금관리공단 앞에 시민들이 지나가는 모습. 배우한 기자

#서울의 한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30대 대학원생 김모씨는 현재 국민연금 '납부 유예' 상태로 7년째 보험료를 내지 않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보험료를 안 낸 건 아니다. 대학원에 다니기 전인 2013년 10월부터 2015년 2월까지 직장을 다녔기 때문에 직장가입자로 보험료를 냈다. 사업주에 고용되면 직장가입자가 돼 보험료를 의무적으로 납부해야 한다.

2015년 3월 대학원을 다니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면서 갈림길에 섰다. 당시 지역가입자(직장가입자가 아닌 가입자)로 전환해 보험료를 계속 납부할지, 납부를 미룰지 선택하라는 안내문이 날아왔다. 지역가입자로 전환할 경우 월 보험료는 최저 수준인 10만 원을 내면 됐지만, 50만 원이 전부인 한 달 수입을 생각하면 이마저도 부담스러웠다. 노후는 나중 문제라는 생각에 김씨는 결국 납부유예를 선택했다.

그가 내년에 예정대로 박사학위를 취득해 바로 직장을 구하더라도 국민연금 가입 기간은 8년의 공백이 생긴다. 김씨는 "선배들은 어떻게든 빨리 보험료를 내라고 권유하지만 서둘러 낼 생각은 없다"면서 "친구들은 '1990년대생은 연금을 못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해 망설이고 있다"고 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부산에 사는 이모(27)씨는 다른 청년들보다 빨리 국민연금에 가입했다. 이씨는 25세이던 2020년부터 보험료를 냈다. 그는 "프리랜서인 어머니는 항상 노후를 걱정했고,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연금을 내야 한다고 권유했다"며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에 지역가입자로 신청해 매달 10만 원을 냈다"고 말했다. 이씨는 5개월 계약직으로 근무할 때는 직장가입자로 보험료를 냈다. 계약이 끝난 2021년 5월 다시 지역가입자가 됐지만, 실업급여를 이용해 꾸준히 보험료를 납부했다. 공백 기간 없이 최대한 길게 납부하는 게 김씨의 목표다.

이씨는 2021년 10월 일자리를 구해 직장가입자로 바뀌었다. 김씨가 월 소득 250만 원 수준의 보험료를 정년 전까지 32년간 계속 낸다고 가정할 경우 퇴직 후 월 85만~90만 원을 연금으로 지급받게 된다. 만약 직장가입자가 되기 전 2년간 보험료를 내지 않았다면 연금 수령액은 85만 원 이하로 떨어진다. 그는 "연금 기금이 소진된다는 뉴스가 나올 때마다 한국 사회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고민했다"며 "연금에 대한 신뢰가 큰 편은 아니지만, 주변 친구들을 보면 일찍 가입하길 잘한 것 같다"고 말했다.

'못 받는 세금 아니냐' MZ의 연금 불만 왜 커졌나

국민연금 재정수지 및 적립금 전망. 시각물=강준구 기자

국민연금 재정수지 및 적립금 전망. 시각물=강준구 기자

미래 사회를 이끌 MZ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에게 국민연금은 두 개의 얼굴을 가졌다. 직장인이 되면 어쩔 수 없이 가입해 보험료를 내지만 큰 기대가 없어 무관심한 계륵 같은 존재이거나, 그래도 100세 시대에 대비해 적은 액수를 받더라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노후 보장 수단이라는 생각이다.

공통점이 있다면 '어차피 조금밖에 못 받는 용돈연금 아니냐'란 인식이다. 국민연금은 이상적으론 가입자가 죽을 때까지 소득을 보장하고 저소득층을 위한 소득 재분배 기능까지 하는 제도이지만, 현실에선 '노후 대비엔 턱없이 부족한 푼돈 연금'으로 여겨진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 개혁이 성공하려면 이 같은 MZ세대의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MZ세대 중엔 30대 대학원생 김씨처럼 '국민연금 비관론자'가 많다. 꼬박꼬박 보험료를 내더라도 소득대체율(생애 평균 소득 대비 연금 수령액 비율)이 높지 않아 국민연금 보험료를 일종의 세금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첫 직장에 입사한 20대 박모씨는 "월급에서 강제로 떼가니 내지만, 사실상 노인이 돼 받는 용돈 아니냐"며 "돈을 어느 정도 모으면 별도의 개인연금을 알아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국민연금을 불신하는 건 연금액이 너무 적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금 고갈로 'MZ세대는 연금을 못 받는다'는 이야기가 도화선이 됐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지난 1월 현 구조가 지속될 경우 연금기금이 고갈돼 "2055년에 연금을 수급하는 1990년대생부터는 연금을 받지 못한다"고 전망했다. 또 기금 고갈 시점이 2057년(2018년 보건복지부 발표)에서 2055년(2020년 국회예산정책처)으로 빨라진다는 전망도 불안감을 키웠다. 문유진 복지국가청년네트워크 대표는 "청년들은 연금을 못 받을 수도 있다고 하니 불안감이 커졌고, '못 받는 세금을 왜 내야 되냐'는 부정적 반응이 확산했다"고 했다.

"사적연금 대안 안 돼… 국민연금 지속 가능성 높여야"

국민연금 납부유예한 30대 대학원생 A씨, 20대 중반부터 공백기 없이 보험료 납부한 20대 직장인 B씨, 취업 전 공백 기간 추가납부하려는 40대 직장인 C씨의 국민연금 예상 지급액. 시각물=신동준 기자

국민연금 납부유예한 30대 대학원생 A씨, 20대 중반부터 공백기 없이 보험료 납부한 20대 직장인 B씨, 취업 전 공백 기간 추가납부하려는 40대 직장인 C씨의 국민연금 예상 지급액. 시각물=신동준 기자

연금에 대한 불신은 MZ와 장·노년층 간 세대 갈등으로 번졌다. 젊은 세대가 고령 세대의 연금을 지탱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세대 갈등이 커져 본질적 개혁 논의가 막혔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세대 갈등은 연금 불신을 더 심화시키는 요소"라며 "이런 상황에서 '사회 연대가 중요하다', '노인 부양을 책임져야 한다' 같은 메시지가 통할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40대 회사원 강모씨는 기금 고갈론을 접한 뒤 오히려 생각을 바꾼 사례다. 그는 "40대가 되면서 노후 준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는데, 아무리 봐도 국민연금만 한 투자처는 없는 것 같다"며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연금은 받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요즘 4년간 내지 않은 보험료의 추가 납부를 준비 중이다. 강씨는 2005년 4월 아르바이트를 하며 처음 보험료를 납부했다. 몇 개월 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면서 2009년 직장인이 되기까지 약 4년간 보험료를 내지 않았다. 정년까지 꾸준히 보험료를 내면 퇴직 후 월 150만 원의 연금액을 받는데, 공백기인 4년을 추가 납부할 경우(월 소득 450만 원으로 계산) 연금액은 월 163만~165만 원으로 늘어난다.

강씨처럼 보험료를 오래 납입하면 노후가 조금은 달라진다는 확신을 줘야 MZ세대가 개혁에 동의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해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공공연금센터장은 "사적연금을 국민연금의 대안으로 선택할 수 있지만, 장수나 투자 실패 등 리스크풀링(불확실성 감소)이 되는 건 여전히 국민연금뿐"이라고 말했다.

보험료율 인상 회피한 정부… "국민 설득 정면돌파 할 때"

지난 2018년 8월 17일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소속 회원들이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2018년 국민연금 재정계산 결과를 바탕으로 한 국민연금 제도 개선 방향에 관한 공청회에서 침묵시위를 위해 손팻말을 들고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18년 8월 17일 공적연금강화국민행동 소속 회원들이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2018년 국민연금 재정계산 결과를 바탕으로 한 국민연금 제도 개선 방향에 관한 공청회에서 침묵시위를 위해 손팻말을 들고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연금 개혁이 성공해야 신뢰도를 높일 수 있다고 한목소리를 낸다. 출생 인구 감소로 기금 고갈이 빨라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고려해 연금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도록 재설계하자는 것이다. 정부가 2023년 3월 제5차 재정추계를 내면 국회와 정부는 이를 토대로 제도 수정안을 마련해야 한다.

정 센터장은 "연금에 대한 세대 간 갈등을 불식시키고 연금 급여의 적정성을 유지하려면 개혁을 시작해야 한다"며 "국민연금이 제 기능을 하려면 이번에는 보험료율 인상을 합의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민연금 보험료율은 1998년 9%로 설정된 이후 한 차례도 올리지 못했다. 25년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보험료율(18.3%)의 절반 수준을 유지하느라 소득대체율은 40%로 떨어졌다. 보험료율을 높이지 않으면서 재정 안정성을 강화하려면 소득대체율을 낮춰야 하는데, 전문가들은 40% 밑으로 낮추면 노후 소득 보장성이 크게 흔들려 연금 자체의 의미가 사라진다고 우려한다.

정부가 이제는 과거 개혁 과정을 반면교사 삼아 정면돌파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의견이다. 2007년 개혁 과정에서 보험료를 올리는 것에 대한 저항을 의식해 연금 개혁 요구를 뭉개다보니 사태를 악화시켰고, 국민연금의 미래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오랜 기간 연금 실무를 담당한 전 고위 관료는 이해당사자 간 합의가 중요하다는 걸 전제로 "월 소득이 100만 원인 사람이 40년간 꼬박 부어 매달 40만 원을 가져가는데, 이걸로 노후 생활이 가능한지 따져봐야 한다"며 "연금의 기초체력을 튼튼히 할 제도가 무엇인지 담론을 형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은선 교수는 "불평등이 심화되는 사회에서 소득 재분배 기능을 가진 국민연금이 불평등 완화 기능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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