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형식과 내용의 '사랑 싸움'이죠, 맨날 다투면서 붙어다니는...

입력
2022.10.18 04:30
16면

편집자주

아무리 유명한 예술작품도 나에게 의미가 없다면 텅 빈 감상에 그칩니다. 한 장의 그림이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맛있게 그림보기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그림 이야기입니다. 미술교육자 송주영이 안내합니다.


<7> 형식과 내용을 나눠서 감상하기

‘형식’이라는 남성과 ‘내용’이라는 여성이 있다. 이들은 서로 사랑에 빠졌고 여느 커플과 마찬가지로 깨소금 쏟으며 좋을 때도 있고 폭풍우 치는 밤처럼 싸우기도 한다. 그러나 둘은 서로 함께 있을 때에만 서로의 존재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싸우다가도 화해하고 평생을 붙어 다니며 그렇게 해로한다. 흔한 말로 둘은 천생연분인 셈이다. 형식군과 내용양은 헤어질 것도 아니면서 맨날 서로 투덜거리지만 결국 함께 붙어 다니는 커플이다. 예술로서의 작품 안에는 이러한 형식군과 내용양의 러브 스토리가 있다.

그림을 감상하는 또 하나의 좋은 방법은 형식과 내용을 구분해서 보는 것이다. 모든 예술작품에는 반드시 형식과 내용이 있다. 형식은 작품을 이루는 외형, 윤곽, 형태나 구조를 뜻하며, 내용은 그 형태 사이로 배어 나오는 생각, 정신, 이념이나 이야기를 이룬다. 작품 안에 담긴 형식과 내용은 철학적인 사고에 뿌리를 두고 있다.

라파엘로가 바티칸 사도 궁전에 그린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당', 1509~1511년작.

라파엘로가 바티칸 사도 궁전에 그린 프레스코화 '아테네 학당', 1509~1511년작.


아테네 학당의 중앙을 확대한 모습.

아테네 학당의 중앙을 확대한 모습.


美(형식) = 善(내용) vs 美 ≠ 善

16세기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은 서양 고대 철학사의 족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작품 한가운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다. 플라톤은 오른손을 높이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진리는 저 높은 곳에 있다”는 형이상학을 상징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손으로 땅, 즉 자연세계를 가리키며 “진리는 현실과 경험에 있다”는 형이하학을 대변하는 모습이다. 서양철학의 가장 큰 두 흐름은 모두 여기서 출발하고 정리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끊임없이 생성 소멸하는 세계에서 진리를 찾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지금도 이 두 개의 흐름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권 안에 있는 서유럽 학자들은 ‘아름다움(美)’이란 곧 ‘선(善)’이라고 여겼다. 르네상스 이후, 근대에 접어드는 18세기 무렵 독일 철학자 칸트가 이러한 미학을 야무지게 정리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칸트는 인간의 경험을 ‘내용’으로 보았고, 경험과 상관없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인식능력이 있는데, 이것이 예술의 경우 ‘형식’을 통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았다. 절대신과 상관없이 인간은 스스로 내용을 형식으로 창조하여 아름다움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판단력이 있고, 쾌락으로서 ‘미(美)’를 판단(감상)한다는 뜻이다. 이런 이유로 칸트는 ‘미’는 학문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예술이란 관조의 대상일 뿐, 과학을 통해 그 아름다움을 분석할 수 없다는 것이 칸트 미학의 입장이다. 예쁜 아이 얼굴은 누구에게도 예쁜 아이로 보이기 때문에 이걸 따져 묻지 말라는 말과 비슷하다. 이때까지 작품을 이루는 형식과 내용은 서로 반목하지 않고 그 자체로 하나였다.

이러한 칸트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것이 19세기 후반부터다. 당시 과학 발전의 영향 아래, 일부 학자들은 예술작품을 관조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연구 대상으로 삼고 예술심리학, 형태이론, 예술사회학, 실험미학, 정보이론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해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까 예쁜 아이 얼굴이 왜 예쁘게 보이는지, 누가 어떻게 왜 예쁘다고 여기는지 과학적으로 따져 묻자는 말이다. 본격적으로 작품의 형식과 내용을 따져 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때부터 작품 안에 담긴 형식과 내용은 금슬이 좋았다가 싸우기도 하는 커플처럼 소란스러워졌다. 형식 또는 형태가 예술작품 안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다룬 연구가 바로 형태심리학이다. 이에 반해, 예술작품이 어떻게 맥락적 ‘의미’를 갖게 되는지는 예술사회학과 예술심리학에서 다루어졌다. 이러한 연구들은 결과적으로 예술을 ‘탈신비화’하고 인간과 예술 사이의 의미를 과학적으로 찾아보려는 시도였다. 저 높은 곳에 있는 예술이 아니라 실제의 삶 속에서 의미가 있는 예술을 만나려는 노력이었다. 예쁘거나 아름답지 않아도 예술이 되고 작품이 되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더니즘 vs 포스트모더니즘

“현실은 이상의 모방”이라는 고전 미학의 흐름은 회화에서는 점·선·면의 형태로 재현되는 현대추상미술이 이어받았고, 건축에서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유명한 명제를 남긴 루이스 설리반이 철골 고층 빌딩을 세우면서 이어갔다. 질서와 규범이 있는 자연 세계가 내용이라면 그 내용으로 회화로, 선율로, 건축으로 ‘재현’했다고 주장하는 사상이 바로 모더니즘이다. 또 다른 모더니스트 건축가,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적을수록 많다"면서 가장 기초적인 자연의 원리를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러한 디자인 철학을 훗날 스티브 잡스가 취하면서 지금의 간결한 디자인으로 대표되는 아이폰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모더니즘 건축을 대표하는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시그램 빌딩

모더니즘 건축을 대표하는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시그램 빌딩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을 대표하는 프랭크 게리의 월트디즈니 콘서트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을 대표하는 프랭크 게리의 월트디즈니 콘서트홀

자연의 이상을 ‘내용’으로 담고 절제된 ‘형식’을 드러내는 것이 모더니즘 계열의 예술관이라면, 이와는 반대로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내용’으로 삼고 ‘형식’을 변형, 파괴 또는 해체하고자 했던 예술관이 포스트모더니즘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몇 마디 말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모더니즘을 탈신비화하려는 노력임에는 분명하다. 일반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저항과 모더니즘 이후라는 두 방향으로 구분해 보는 편이다.

저항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이 신봉하던 절대신, 이성, 이상적 세계(이데아), 자연의 법칙 등 모든 질서와 권위에 대한 도전 의식이다. 쉬운 비유를 들자면, “이봐! 신사라면 모자를 이런 식으로 써야 하네! 그게 매너라네!”라며 원칙과 형식을 강조하는 사람이 모더니스트다. 반면, “웃기는군! 내가 모자를 어떤 식으로 쓰든 자네가 무슨 상관인가! 심지어 나는 모자 따위는 쓰지 않겠네! 쓰더라도 거꾸로 쓸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볼 수 있겠다.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현실 세계의 질서가 혼란해진 것도 포스트모더니즘과 관련이 있다. 모더니즘이 끝난 이후의 혼란이다. 이와 관련하여 프랑스의 기호학자 장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이론이 가장 많이 거론된다. 더 이상 모방할 이데아가 없어지고 무수한 복제품과 대체물이라 불리는 시뮬라크라가 오히려 실재 같은 과잉현실을 생산한다는 이론이다. 쉬운 비유를 들자면, 물건을 담는 기능을 가진 가방에 ‘고급스러움’을 상징하는 샤넬 마크를 붙이면 (설사 그것이 진품이 아닐지라도) 그것은 더 이상 단순한 가방이 아니게 되는 이치다. 복제기술을 활용한 미국의 팝아트 유행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아티스트가 흔한 광고물의 일부를 가공하여 미술관에 걸면 더 이상 싸구려 전단지가 아니라 고급스러운 예술로 바뀐다는 것이다. 대중적인 저급함으로 고급 상류문화를 공격했던 ‘키치 예술’은 오히려 더 어렵고, 더 비싸게 팔리는 아이러니를 남겼다.

모더니즘 예술에서 평화롭고 화목했던 형식군과 내용양은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에서 끊임없이 충돌하고 다툰다. '아테네 학당'의 두 주인공,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서로 다른 손 방향처럼 예술로서의 그림들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그 지점이 어느 방향인지 가늠하는 데 형식과 내용을 구분하여 감상하는 방법은 매우 유효하다.

피에트 몬드리안의 '사과 꽃', 1912년작, 헤이그 미술관 소장

피에트 몬드리안의 '사과 꽃', 1912년작, 헤이그 미술관 소장


피에트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2', 1930년작. 취리히 미술관 소장

피에트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랑의 구성 2', 1930년작. 취리히 미술관 소장


의미 찾기: 현대 추상미술 vs 팝아트

여기 ‘차가운 추상’으로 대표되는 몬드리안의 작품이 있다. 밑도 끝도 없이 네모 몇 개 있는 그림에 무슨 내용이 있으며, 이것이 어떻게 예술이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예술작품이다. 예술작품은 형식과 내용이 상관관계를 가지며 어떤 ‘의미’를 만든다. 이 몬드리안의 그림에서 보이는 선, 면, 색으로 구성된 모든 요소가 형식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내용은 무엇일까? 형태심리학에서 말하는 단순성의 법칙에 따라 실재하는 복잡한 사물을 끊임없이 단순화하면서 쪼개어 나가다 보면 선, 면, 색이라는 본질을 드러난다는 생각, 이러한 모더니즘 정신 자체가 그 내용이 된다. 몬드리안은 "추상이야말로 전 인류가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기초적인 회화 언어"라고 믿었다. 이것이 몬드리안 작품 안에서 형식과 내용이 좋은 짝을 짓고 만들어낸 의미다. 이런 이유로 몬드리안의 작품은 미술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희소성 높은 예술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더니즘적 복제, 저항의 의미를 작품으로 만든 앤디 워홀의 '샷 세이지 블루 매릴린'은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읽을 수 있을까?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이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한 여배우의 초상화는 복제 기법 그 자체가 형식이 된다. 그러나 이 작품의 내용은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대중적이면서도 저급하지만 모두가 가지고 싶어하는 어떤 시뮬라크라가 내용이 된다. 거기에 덧붙여, 행위예술가 도로시 포드버가 이 그림에 총을 쏘았던 사건으로 더욱 화제가 되었는데, 이러한 이벤트나 행위라는 화제성도 내용이 된다. 누구나 복사하여 색칠하면 만들 수 있는 그림과는 달리, 이 작품은 예술가의 의도와 대중스타를 향한 총격이라는 화제성으로 그 형식과 내용이 충돌하면서 ‘의미’를 만들고 예술이 된다. 이 작품은 지난 5월 미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2500억 원에 낙찰되어 최고 경매가를 경신했다.

앤디 워홀의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 1964년작. 크리스티 제공

앤디 워홀의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 1964년작. 크리스티 제공

그림을 형식과 내용으로 갈라 보는 훈련, 이것이 곧 '비평 훈련'이다. 형식과 내용을 구분하며 의미를 찾는 것이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이다. 그림뿐 아니라 디자인, 영상, 영화 등의 모든 시각 콘텐츠는 형식과 내용으로 구분하여 맛볼 수 있다. 모든 남녀의 애정사가 그러하듯 '형식군'에게도 사정은 있고 '내용양'에게도 사연은 있다. 이 둘의 조화와 반목의 서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파악하는 것이 그림을 잘 보는 방법이다. 이러한 훈련을 반복하면서 자주 그림을 본다면, 어느 순간 당신의 마음을 울리는 그림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이 단 하나의 선으로 그려진 추상화일 수도 있고, 인터넷이나 SNS에서 우연히 보게 된 한 장의 풍경 사진일 수도 있다. 혹은 매일 무심히 봤던 달력 그림일 수도 있다. 우연히 들른 식당에 그림 하나가 걸려 있다면,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면서 형식과 내용으로 한번 뜯어보기 바란다. 의외로 식당의 음식보다 맛있는 그림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송주영 미술 교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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