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에게 말을 걸던 시절이 있었지,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입력
2022.11.07 04:30
20면

살구나무와 닮은 아몬드나무, 꽃도 열매도 닮아
지중해 거쳐서 우리나라로

편집자주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이 격주 월요일 풀과 나무 이야기를 씁니다. 이 땅의 사라져 가는 식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허 연구원의 초록(草錄)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지중해에 인접한 나라에서 드넓게 재배하는 아몬드나무와 아몬드열매의 모습. 살구나무와 같은 혈통의 Prunus(프루누스)속 식물로 꽃도 열매도 살구나무를 닮았다. 오른쪽 사진처럼 벌어진 열매에 든 게 우리에게 익숙한 살구씨 형태의 내과피(안쪽껍질)다. 이걸 깨면 우리가 먹는 부위인 진짜 씨앗, 아몬드가 나온다. 사진은 세계생물다양성기구(GBIF)에서 담아 왔다.

지중해에 인접한 나라에서 드넓게 재배하는 아몬드나무와 아몬드열매의 모습. 살구나무와 같은 혈통의 Prunus(프루누스)속 식물로 꽃도 열매도 살구나무를 닮았다. 오른쪽 사진처럼 벌어진 열매에 든 게 우리에게 익숙한 살구씨 형태의 내과피(안쪽껍질)다. 이걸 깨면 우리가 먹는 부위인 진짜 씨앗, 아몬드가 나온다. 사진은 세계생물다양성기구(GBIF)에서 담아 왔다.

“이모, 이것 봐. 아기 모과가 땅에 열렸어!” 여덟 살 조카가 자기 키보다 작은 관목에 달린 열매를 가리키며 신기한 걸 발견했다는 듯이 말한다. 나는 조카의 손을 잡고 아파트 화단의 식물 살피는 일을 참 좋아한다. 다행히 그 아이도 재미있어 해서 우리의 산책은 늘 오래 걸린다. 지난봄에 꽃이 하도 예쁘게 피었길래 이름을 알려주었더니 마침내 열매가 익기까지 조카는 나무를 유심히 지켜본 모양이다. “그런데 모과나무는 키가 커서 열매가 하늘에 달려야 하는데 왜 이 나무는 열매가 땅에 붙어 있지?”

나는 조카를 부를 때 이름 대신 비단아, 하고 애칭을 쓴다. 아이의 한자 이름에 실제로 비단이라는 뜻이 있는 데다가 마음과 피부와 머릿결과 그 밖의 전부가 내 눈에는 비단처럼 고와 보여서다. 식물을 부르는 우리 이름도 딱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을 때가 있다.

“이 키 작은 나무는 모과나무가 아니고 모과나무의 사촌쯤 되는, 진짜 이름은 ‘명자꽃’이야. 오랑우탄이랑 고릴라가 서로 닮은 것처럼 이 명자꽃도 모과나무랑 사촌쯤 되지. 그럼 꽃도 모과나무만큼 예쁘겠지? 우리 지난번에 포항 바닷가에서 장미꽃 닮은 해당화 봤잖아. 그 해당화처럼 꽃이 예쁜데 바다가 아닌 산에서 자란다고 이 명자꽃을 ‘산당화’라고도 불러.”

명자꽃 옆에서 잎을 거의 다 떨군 채 서 있는 살구나무를 가리키며 비단이가 말했다. “얘는 추워 보여.” 나는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답했다. “봄에 일찍 꽃을 피우려고 서둘러 겨울잠을 잘 준비를 하는 거야.” 아이는 내심 마음을 놓는 표정이다. “이모가 퀴즈 하나 낼까? 오랑우탄이랑 고릴라를 닮은 동물이 또 누가 있지? 힌트는 ‘ㅊ’이야.” 조카는 신이 난 표정으로 침팬지, 하고 재빨리 외친다. “그 세 동물의 관계가 이 살구나무와 살구나무 옆의 명자꽃과 명자꽃을 닮은 모과나무의 관계와 비슷해.”

조카는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살구나무 아래 떨어진 살구씨 찾기 놀이 한번 해볼까?” 아이는 두리번거리더니 금세 찾는다. “나무껍질처럼 딱딱한 이 껍질은 진짜 씨앗이 아니고 씨앗을 보호하기 위한 갑옷 같은 거야.”

아몬드나무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세계생물다양성기구(GBIF)

아몬드나무의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세계생물다양성기구(GBIF)


아몬드나무 세밀화. 독일 의사이자 화학자 프란츠 유진 쾰러의 작품.

아몬드나무 세밀화. 독일 의사이자 화학자 프란츠 유진 쾰러의 작품.

조카는 아몬드를 좋아한다. 아몬드 한 봉지를 사서 집으로 가다가 넌지시 물어본다. “아몬드가 혹시 누구의 씨앗인 줄 알아?” 아이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나는 아까 주머니에 슬쩍 넣어둔 살구씨를 꺼내 보여준다. “아몬드는 아몬드나무에서 나오는데 그 나무는 살구나무와 형제야. 침팬지와 사람의 관계쯤 되지. 그래서 아몬드나무는 살구나무랑 꽃도 열매도 아주 닮았어. 아몬드나무에 열린 열매 하나를 따서 과육을 벗기면 단단한 살구씨 같은 게 나오고, 그걸 쪼개면 우리가 먹는 한 알의 아몬드가 나오지.”

아이는 아파트 화단에 아몬드나무는 없느냐고 묻는다. “아몬드는 우리나라에는 자라지 않아. ‘지중해’ 바다 근처에 있는 나라에서 아주 많이 키우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걸 사 먹을 수 있게 된 거야.” 내 말을 듣더니 갑자기 아이가 소리쳤다. “고마워, 아몬드나무야!”

집에 도착하니 현관 구석에 세워둔 우산 하나가 내 눈에 들어온다. 고흐의 명작 ‘아몬드나무’를 패턴으로 만든 그 우산을 펼치며 조카를 부른다. “비단아, 이모가 말한 아몬드나무 꽃이 여기 피었네.” 언니가 이건 또 무슨 놀이냐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짓자 조카는 손에 든 아몬드 봉지를 식탁 위에 탁 내려놓으며 자기 엄마에게 쫑알쫑알 설명을 시작한다. 엄마보다 똑똑해지는 순간이다!

조카는 꽃병에 든 장미꽃 앞으로 쪼르륵 달려간다. 장미꽃 앞에서 턱을 괴고 너 참 예쁘다, 어디서 왔니, 하면서 속삭인다. 아이를 바라보면서 언니는 그리운 무언가를 꺼내듯이 말한다. “우리도 저랬던 때가 있었지.”

식물에게 말을 걸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있었을 거다. 그들이 소중한 친구처럼 여겨져서 추워 보인다고, 걱정된다고, 고맙고 예쁘다고 먼저 인사를 건네던 때가.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허태임의 초록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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