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를 든 금주-절주 운동가

입력
2022.12.27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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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캐리 네이션

손도끼를 들고 술집에 들어가 집기를 부수는 '금주 캠페인'으로 1920년대 미국 금주법 시대를 여는 데 일조한 금주운동가 캐리 네이션. kansasmemory.org

손도끼를 들고 술집에 들어가 집기를 부수는 '금주 캠페인'으로 1920년대 미국 금주법 시대를 여는 데 일조한 금주운동가 캐리 네이션. kansasmemory.org

1900년 12월 27일 밤, 검은 드레스 차림의 한 여성이 손도끼를 들고 미국 캔자스주 위치타의 한 호텔 바에 들어섰다. 그는 다짜고짜 진열된 술병과 집기들을 깨부수기 시작했고, 손님들은 혼비백산 피신했다. 여성이 혼자 술집에 가는 것조차 험담거리가 되던 시절이었다. 그는 수천 달러어치의 피해를 입힌 혐의로 투옥됐다가 벌금을 내고 풀려났고, 그의 ‘손도끼 캠페인’은 이후로도 이어졌다. 미국 금주- 절주 운동의 상징적 존재 캐리 네이션(Carry Nation, 1846~1911)의 전설이 그렇게 시작됐다.

금주 캠페인은 남북전쟁 이전인 1830년대 노예제 폐지운동과 더불어, 개신교단 사회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됐다. 아일랜드와 독일 이민자들이 주도한 양조업이 번성하면서 알코올 중독자가 급격히 늘어났고, 술로 인한 가정 폭력 등이 사회문제로 확산되던 무렵이었다. 청교도적 가치로 무장한 백인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술은 노예제 못지않게 끔찍한 죄악이었고, 최대 피해자는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여성기독교절제연맹(WCTU)’이 1870년 출범했고, 그들은 여성 참정권 운동단체들과 연대했다.
그 덕에 1880년 캔자스주를 시작으로 몇몇 주들이 술 양조 및 판매를 규제하는 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공권력의 단속 및 처벌은 미미했고, WCTU의 대응도 시종 평화적이었다.
의사였던 첫 남편을 술로 잃고 아이를 혼자 키우며 WCTU 회원으로 활동하던 네이션으로서는 그 방식이 못마땅했다. 그게 그가 도끼를 든 이유였고, 스스로는 자신의 방식을 ‘신의 계시’라 정당화했다. 재혼한 목사 남편마저 네이션의 열정에 질려 저 사건 이듬해 이혼했다.
하지만 ‘손도끼 캠페인’을 응원하는 여성들은 점차 늘어갔고 그도 활동 영역을 넓혀갔다. 그는 대중 집회장 등에서 강연하며, 지지자들에게 손도끼 액세서리를 팔아 활동 자금과 벌금을 충당했다. 그(의 손도끼)는 미국 역사상 가장 이질적인 ‘금주법 시대(1920~39)’를 여는 데 일조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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