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도 놓치고" 송해·김신영과 눈물 젖은 '중꺾마' 32년

입력
2023.01.16 04:30
수정
2023.01.16 08:42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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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노래자랑' 지킨 정한욱 작가·신재동 악단장·고세준 PD
"딩동댕" 실로폰 2,000번, 원고지에 쓴 6만여 장의 대본
2017년 송해 1년간 링거 투혼도...'출근 1등'은 김신영
"과거에만 머물 수 없어, 유산 지키며 천천히 변화"

'전국노래자랑'을 32년 동안 지킨 정한욱(왼쪽 첫 번째) 작가는 스스로를 "잡가"라고 부른다. MC인 김신영(두 번째)의 대본은 물론 방송에 나오지 않는 예심부터 본선 출연자 음악 연습까지 돕는다. 신재동(세 번째) 악단장은 '전국노래자랑'에 30대 초반에 단원으로 시작해 이곳에서 환갑을 지났다. 고세준 PD는 "김신영에게 앞으로 30년 동안 해야 하니 천천히 (재능을) 꺼내라고 했다"며 웃었다. 14일 서울 여의도 KBS 별관에서 진행된 설 특집 무대에 함께 올라 본보 인터뷰를 위해 사진 촬영을 하는 모습. KBS 제공

'전국노래자랑'을 32년 동안 지킨 정한욱(왼쪽 첫 번째) 작가는 스스로를 "잡가"라고 부른다. MC인 김신영(두 번째)의 대본은 물론 방송에 나오지 않는 예심부터 본선 출연자 음악 연습까지 돕는다. 신재동(세 번째) 악단장은 '전국노래자랑'에 30대 초반에 단원으로 시작해 이곳에서 환갑을 지났다. 고세준 PD는 "김신영에게 앞으로 30년 동안 해야 하니 천천히 (재능을) 꺼내라고 했다"며 웃었다. 14일 서울 여의도 KBS 별관에서 진행된 설 특집 무대에 함께 올라 본보 인터뷰를 위해 사진 촬영을 하는 모습. KBS 제공

"아버지, 어머니가 모두 9월에 돌아가셨는데 제가 제사를 거의 못 드렸어요."

신재동 KBS1 '전국노래자랑' 악단장은 9월만 되면 가슴 한쪽이 저리다. 그가 '전국노래자랑'에서 연주를 시작한 건 1992년. 차에 악기를 싣고 전국을 누빌 때 신 단장의 부모는 눈을 감았다. 그 이후 제사는 그의 아들이 대부분 챙겼다. 바람이 매서운 겨울엔 야외에서 '전국노래자랑' 녹화를 할 수 없어 9, 10월에 촬영이 몰려 제사를 못 챙기기 일쑤였다. 그보다 1년 앞서 1991년부터 '전국노래자랑'에 합류한 정한욱 작가는 "추석이나 설 연휴에 생방송을 한 적도 있었는데 지방을 내려가면 3, 4일을 머물러 명절을 집에서 못 지냈다"고 했다.

최근 2,000회를 맞은 '전국노래자랑'은 42년여 동안 서민의 놀이터였다. 프로그램 녹화장은 늘 빈자리가 없었다. 사진은 송해 선생이 생전에 야외에서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KBS 제공

최근 2,000회를 맞은 '전국노래자랑'은 42년여 동안 서민의 놀이터였다. 프로그램 녹화장은 늘 빈자리가 없었다. 사진은 송해 선생이 생전에 야외에서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KBS 제공

'전국노래자랑'를 향한 박수 소리가 늘수록 두 사람의 일상엔 금이 갔다. 어떻게 버텼을까. 새해 첫날인 1월 1일 방송된 제주도 편 촬영장에서 정 작가는 방청객에게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절절하게 감사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더라고요." 이런 마음들을 받아 정 작가는 32년 동안 '전국노래자랑' 대본을 쓰고, 신 단장은 31년째 악보를 채웠다. 두 사람의 '꺾이지 않는 마음'이 쌓은 역사가 '전국노래자랑'이었다.

그 '전국노래자랑'이 최근 2,000회를 맞았다. 1980년 11월 9일 "딩동댕" 실로폰 소리가 처음 울려 퍼진 뒤 42년. "송해 선생님과 지방 촬영 때 목욕탕 가서 씻고 나와 엄청 맛있게 먹었던 팥빙수가 생각나네요." KBS에서 20여 년 동안 직장 생활을 했지만 '전국노래자랑' 제작진 중에선 막내라는 고세준 PD의 말이었다.

다음은 서울 여의도 KBS에서 만난 세 사람이 들려준 '전국노래자랑' 32년의 얘기들이다. 지난해 세상을 떠난 송해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일요일의 막내딸' 김신영과 함께 한 '중꺾마'의 시간들이다.

송해(왼쪽 두 번째) 선생이 생전에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환하게 웃고 있다. 송 선생이 가는 길엔 늘 '전국노래자랑' 정한욱(맨 오른쪽) 작가가 함께했다. 정 작가 제공

송해(왼쪽 두 번째) 선생이 생전에 백두산 천지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환하게 웃고 있다. 송 선생이 가는 길엔 늘 '전국노래자랑' 정한욱(맨 오른쪽) 작가가 함께했다. 정 작가 제공

-시민에게서 받은 어떤 편지가 가장 기억에 남나.

"미국 촬영 때 받은 두 장의 편지다. 열어보니 10달러 열 장이 들어 있었다. 편지엔 '마음에 드는 옷 사 입으시라'고 적혀 있었고. 어린아이가 나오면 송해 선생님이 종종 만 원씩 용돈을 줬다. 주머니에 현금이 없으면 나를 불러 대신 용돈을 줬는데 그거 보고 그분이 내게 용돈을 준 거다. 안쓰러웠나 보다, 하하하."(신 단장)

-집 밖에서 쌓인 역사가 많겠다.

"녹화 끝나고 이동할 때 절경을 만나면 송 선생님이 '잠깐 차 세우자'고 하신다. 문경 산골짜기를 지날 때 노을이 좋은데 그때 도랑에 자리 잡고 소주 한잔하면서 악기 연주하고 그랬다. 버스에 양념통, 프라이팬 다 갖고 다녔으니까. 그런 낭만들이 마음속에 덩어리째 남아 있다."(신 단장)

"출장을 길게는 59박 60일 갔다. 집에서 반소매 입고 나왔다가 긴팔 입고 들어갔다. 예심도 준비해야 하니 본녹화 사흘 전엔 지방에 내려가야 하니까. 두 달 동안 밖에서 일하다 얼굴 새까맣게 타서 집에 가면 애들이 '이상한 아저씨 왔다'며 울고불고 난리였고, 하하하. 보람 없으면 이 일 못 했다."(정 작가)

1980년대 중동으로 건너가 외화벌이를 했던 건설노동자들이 모래벌판에 앉아 손뼉을 치며 노래를 듣고 있다. '전국노래자랑' 리비아 편 모습. KBS 방송 캡처

1980년대 중동으로 건너가 외화벌이를 했던 건설노동자들이 모래벌판에 앉아 손뼉을 치며 노래를 듣고 있다. '전국노래자랑' 리비아 편 모습. KBS 방송 캡처

-'금기의 땅'도 밟았다.

"2016년 송 선생님이 다큐멘터리 촬영차 두만강에 갔다. 배를 타고 한 바퀴를 도는데 송 선생님이 갑자기 주저앉아 '어머니!' 하고 통곡하더라.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전국노래자랑' 평양 공연(2003) 때도 일주일 동안 북한에 머물렀는데 고향 땅(황해도 재령) 한 번 못 밟아 안타까워하셨고."(정 작가)

"'전국노래자랑 세계대회'(2016) 때 러시아 사할린 망향의 언덕을 갔다. 일제강점기에 이곳에서 강제 노역하던 동포들이 광복 후 귀국하지 못하고 버려져 그 한이 서린 곳이다. 언덕에서 내가 기타를 치고 선생님이 몇 곡을 부르는데 펑펑 우시더라. 그 슬픈 역사에서 자란 사할린 동포 2, 3세들을 만나보니 여러 생각이 들었고."(신 단장)

송해가 2003년 평양에서 열렸던 '평양노래자랑'을 진행하고 있다. KBS 유튜브 캡처

송해가 2003년 평양에서 열렸던 '평양노래자랑'을 진행하고 있다. KBS 유튜브 캡처

-대본을 원고지에 쓴다고 들었다.

"송 선생님 보기 편하라고 쓰기 시작했다. 편당 200자 원고지 50매씩 1년에 52주, 송 선생님과 25년여 했으니까 쓴 게 몇 장(약 6만 장)이나 되려나... 그 원고지도 인쇄소에서 직접 제작했다. 옛날엔 문방구 가면 쉽게 구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살 데가 없더라. 선생님 돌아가신 뒤엔 원고지 안 쓴다. 컴퓨터로 타이핑해 김신영한테 준다."(정 작가)

-위기도 많았을 텐데.

"2017년쯤인가 송 선생님 건강이 안 좋으셨다. 녹화 전 병원 가서 먼저 링거 맞고 무대에 올랐다. 근 1년을 그랬다. 말 그대로 링거 투혼이었다."(신 단장)

-그렇게 함께 버틴 송해가 이제 없다.

"코로나 19로 2년여 동안 야외 녹화를 못 하다 재개한 지 얼마 안 돼 송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선생님 발인 날 녹화였는데 눈물이 나더라. 그 감정 누르고 현장 지키는 게 정말 힘들었다. 사실 송 선생님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음악 프로그램 최고령 진행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었다. '이제 다시 현장 나가셔야죠?' 했더니 나를 불러 '한욱아, 나 이제 방송 더 못 해' 하셨다.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정 작가)

"송 선생님이랑 했던 첫 녹화가 기억난다. 송 선생님께 '출연자랑 이런저런 말씀하셨는데 이런 부분은 좋았고 이런 부분은 좀 개선해주면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처음 온, 그것도 막내 연출이 겁도 없이. 나중에 술자리에서 송 선생님이 'PD가 나한테 와서 그런 얘기해줘 정말 좋았다'고 하신 게 생각난다."(고 PD)

김신영이 지난해 가을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한 초등학교 4학년 학생에게 용돈을 쥐어주고 있다. KBS 방송 캡처

김신영이 지난해 가을 '전국노래자랑'에 출연한 초등학교 4학년 학생에게 용돈을 쥐어주고 있다. KBS 방송 캡처

-김신영이 들어온 지 석 달이 지났다.

-"인간적이다. 엄마 출연자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서너 살 된 딸이 무대 옆에 앉아 있었는데 그때 김신영이 손바닥을 아이 머리 위에 올려 뜨거운 볕을 가려줬다. 악단과 진행자 자리에 차양막(파라솔)도 치려 했는데 거절했고. 시민들 다 볕 아래 구경하는데 혼자 파라솔 펴고 있을 수 없다고. 송 선생님도 KBS에서 따로 차를 내준다고 했는데 '버스로 스태프들이랑 같이 가겠다'고 한사코 고사했다. 그 생각이 나더라."(신 단장)

"'전국노래자랑'에 전념하는 게 보인다. 녹화장에 제작진들이 오전 8시 30분에서 9시에 도착하는데 가보면 김신영이 미리 와 있다. 녹화 전에 대본이랑 큐시트(진행표) 주면 노래 제목 한 글자만 틀려도 '이거 이 제목 아닌가요?라고 꼭 물어본다. 연말결산 녹화에 앞서 20년치 방송을 다 찾아봤다더라."(정 작가)

14일 서울 여의도 KBS 별관에서 진행된 설 특집 '1020 전국 노래자랑' 모습. KBS 제공

14일 서울 여의도 KBS 별관에서 진행된 설 특집 '1020 전국 노래자랑' 모습. KBS 제공

-20·30대가 찾는다. 변화가 어색한 시청자도 있고.

"예선 현장이 바뀌었다. 옛날에는 지방 가면 60·70대나 아예 어린 친구들만 왔는데 이제 20·30대가 많이 온다. 물론 송 선생님과의 추억을 잊지 못하신 분도 있고, 아직은 김신영이 마음에 쏙 들지 않는 분도 있다는 걸 안다. 그렇다고 과거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변화는 필요하다. 다만, 천천히 전통을 지키면서 가려 한다."(정 작가)

"김신영 첫 방송 때 양희은 선배님을 모신 것도 그런 이유다. 큰 어른이 김신영의 '전국노래자랑' 시작을 함께하면 시청자께서도 마음의 문을 열어 김신영에게도 큰 힘이 될 것 같았다. '전국노래자랑'은 유산을 지키고 이어갈 거다. 네 명의 PD 중 막내인 나만 변화를 고민하면서, 하하하."(고 PD)



양승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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