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스 재팬' 아니예요"···일본 문화 즐기는 보더리스 세대

"'예스 재팬' 아니예요"···일본 문화 즐기는 보더리스 세대

입력
2023.06.09 11:00
수정
2023.06.09 19:55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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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컬처 2.0 시대 열렸다 <상> 교류 주역된 한일 보더리스 세대]
SNS로 국적 상관없이 콘텐츠 그 자체 즐겨
그래도 "일본 과거사 사과 부족해" 의견이 대다수
"역사는 알아야" 무비판적 수용 경계 목소리도

편집자주

한일 문화 교류의 새 장이 열리고 있다. '역사는 역사, 문화는 문화'로 분별하며 국경을 넘나드는 '보더리스 세대'가 주역이다. 당당하게 서로의 문화를 향유하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양국의 문화 교류 현상을 짚는다.

프리랜서 정지인(24)씨가 지난달 22일 한국일보사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본 배우인 아라가키 유이가 나온 잡지를 펼치며 인터뷰하고 있다. 정씨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일본 애니메이션과 드라마 등을 접하며 일본 문화를 좋아하게 됐다. 그는 "다양한 모험을 하는 한국 드라마에 비해 일본 드라마는 단조로운 구성이 많지만, 오히려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을 때 보기 좋아 일본 드라마를 자주 본다"고 말했다. 안다은 인턴기자

한국의 Z세대는 일본 문화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맘껏 즐기면서도 눈치 보지 않는다. Z세대가 일본 문화에 마음을 뺏긴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의 문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한일 과거사 문제는 어떤 의미인 것일까. 한국일보는 일본 문화를 즐기고 있는 Z세대(1996~2010년생) 6명을 만나 이들의 생각을 들어 봤다.


‘보더리스 세대’인 우리에게 'J 컬처'는 취향일 뿐

일본 문화를 접하고 좋아하게 된 계기는 각양각색이었지만 공통된 답은 하나였다. "일본 것이라서가 아니라 콘텐츠 자체가 마음에 든다"는 것이었다. 최근 숏폼 플랫폼인 '틱톡' 등을 통해 J팝이 유행처럼 퍼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 대중문화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문영서(21)씨도 우연히 인스타그램 릴스에서 일본 가수 이마세의 노래 '나이트 댄서'를 접한 뒤 팬이 됐다. 이후 댄스 챌린지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마세가 내한 공연을 왔을 때 찾아가 함께 춤도 췄다. 국경이 없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누구보다 익숙한 Z세대는 문화의 국적을 따지지 않는다. 콘텐츠 그 자체의 매력을 우선시한다. 이른바 보더리스(Borderless·국경 없는)세대다.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문영서(21)씨는 "문화를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일본어 자격증을 목표로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은 문씨가 작성한 일본어 공부 노트. 문영서씨 제공

"이마세 때문에 일본어 공부도 시작했다"는 문씨는 "일본에 대한 호감도가 올라간 건 맞지만 일본인이 아닌 다른 나라 가수였어도 좋아했을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간 비주류로 여겨졌던 J팝은 SNS를 타고, 한국에서 자연스럽게 퍼져 나갔다. '나이트 댄서'는 지난 3월 국내 음원 플랫폼 멜론 톱 100에서 최고 순위 17위를 찍기도 했다. J팝 사상 최고 성적이다.

Z세대가 J콘텐츠에서 매력을 느낀 가장 주된 요인은 아날로그 정서였다. 모든 Z세대들은 글로벌감각에선 K콘텐츠가 J콘텐츠에 앞선다고 입을 모았지만, 오히려 트렌디하지 않은 것이 J콘텐츠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대학생 정제나(21)씨는 "제이팝은 케이팝의 2010년대 초반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라면서도 "하지만 오히려 그런 부분이 매력 포인트"라고 말했다. 이런 정서의 밑바탕엔 K콘텐츠에 대한 자신감도 엿보였다. "한국은 콘텐츠에서 모험적인 시험을 많이 하고 있잖아요. 오히려 일본의 드라마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전개되고 편집하는 게 많은데, 그 포인트가 편하게 느껴져요." 프리랜서 정지인(24)씨의 말이다.

대학생 정제나(21)씨가 22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본사에서 제이팝을 듣고 있다. 제이팝을 즐겨 듣는다는 정씨는 "주변 친구들도 SNS 알고리즘으로 제이팝을 알게 돼 즐겨 듣는다"면서 "케이팝이 글로벌적으로 제이팝에 앞선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아날로그적인 매력에 제이팝을 자주 찾는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그러다 보니 일본 문화는 이들에게 취향에 따라 고를 수 있는 하나의 선택지가 됐다. 1998년 일본 문화 개방 전까지 음지에서 일본 문화를 즐겨왔던 X세대(1960대 후반~1970년대 출생 세대) 등 기성세대와는 다른 양상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 문화를 즐겼다는 대학생 이지은(21)씨는 "예전엔 일본 문화를 즐긴다고 하면 '오타쿠' 소리를 듣는 등 서브 컬처 취급을 받으며 몰래 소비했다면 요즘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즐기고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문화는 문화, 역사는 역사…"일본 과거사 사과, 부족해"

하지만 과거사 문제에 관해서는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Z세대의 답은 단호했다. 응답자 중 절반이 '노재팬 운동' 당시 소극적으로라도 참여했다고 답했다. 지금까지도 유니클로를 불매한다는 문영서씨는 "'노재팬' 때 유니클로가 친일 논란에 휩싸인 것을 알고 인식이 나빠져 지금까지도 사지 않는다"고 말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재일 한국인 차별 문제를 꺼낸 이지은씨는 "일본 정부나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사회 분위기에 반감이 있다"고 털어 놓았다. 일본에 앞서 우리 정부의 명확한 태도를 요구한 정지인씨는 "일본은 정치적 이익에 따라 (그렇게) 발언할 수 있다 치더라도 우리나라 정부는 좀 더 명확하게 사과를 요구해야 하는 거 아니냐"라고 되물었다.

이들은 문화와 역사를 분리하지 않는 기성세대의 시각을 의아해했다. 이마세를 좋아하다가 일본어까지 배우는 자신을 향해 '일본어를 왜 배우냐'는 친척들의 핀잔을 들은 적이 있다는 중학생 이유나(15)씨는 "겉으로는 웃어넘겼지만 황당했다"고 했다. 그는 "비판할 부분은 과거사인데 제이팝을 듣거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것을 이와 같은 일로 여길 순 없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문화를 즐기다가 일본의 정치와 역사도 공부했다는 대학생 정휘선(19)씨는 "현실적으로 (정치적 이유로) 기대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지만, 일본의 기시다 총리가 직접적으로 과거사에 대해 사죄한다는 표현을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화는 문화, 과거사는 과거사라는 얘기다.

Z세대에게 일본에 대해 물었더니 그래픽=송정근 기자


"일본에 무조건적인 '예스' 아니야…무비판 수용 경계"

문화를 좋아하다 보니 오히려 '잘 알고 좋아해야 실수하지 않겠다'고 느끼고 과거사 공부를 더 했다는 Z세대도 적지 않았다. 정지인씨는 "일본의 역사적 과오를 따지지 않고서는 '덕질'은 힘들다"면서 "일본 우익이거나 반한 감정을 가진 배우들도 있기 때문에 꼼꼼히 골라서 좋아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 역시 2019년 '노재팬' 운동에 참여했다. 그때도 일본 문화를 좋아했지만 이후 자신만의 기준을 세웠다. "명확하게 잘못을 한, 전범 기업을 위주로 불매하는 게 더 영향력이 있다고 믿어요."

일본 문화를 좋아한다는 프리랜서 정지인(24)씨가 '덕질'의 일환으로 그동안 모아 온 관련 물품들. 안다은 인턴기자

문영서씨 역시 비슷한 답변을 했다. 그는 '일본 문화를 좋아하는 Z세대를 '예스 재팬' 세대로 부르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예스 재팬'은 전범기업까지 소비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이마세가 역사적으로 문제가 될 발언을 한 연예인도 아니고, (내가) '노재팬'을 했던 맥락은 역사적 문제에 대한 것인데, 이와 관련 없는 이마세를 좋아하는 나를 '예스 재팬'으로 돌아선 1020이라고 부른다면 황당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Z세대는 일본 문화의 무비판적인 수용을 우려하기도 했다. 역사적인 배경 지식 없이 일본 문화만 받아들이는 것을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지은씨는 인터뷰 말미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서 최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한국 내에서 일본 분위기를 재현한 장소들을 언급했다. 그는 "한국에서 일본 전통 의복인 기모노를 대여해 입는 여행지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역사적 배경에 대한 고려 없이 무조건 '예쁘다'고 생각할 10대들이 걱정된다"고 우려했다. 이어 "안 그래도 위안부나 강제징용 등 피해자 분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고 계시는 상황인데, 무지성으로 일본 문화를 수용하다가 큰일 날 것 같다"면서 "비판적인 수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근아 기자
최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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