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의 '산업안전보건법' 고지 방송, 더 단호하게

열차의 '산업안전보건법' 고지 방송, 더 단호하게

입력
2023.06.21 19:00
수정
2023.06.21 19:07
25면

편집자주

17년 차 베테랑 검사이자 ‘친애하는 나의 민원인’ 저자인 정명원 검사가 전하는 다양한 사람과 사건, 우리가 사는 세상이야기.

삽화=신동준기자

삽화=신동준기자


폭행, 성폭행 말아 달라는 방송
지나치게 어색한 부탁의 내용
일터 폭력, 단호하게 대응해야


어린 시절 한때 장래희망은 열차 승무원이었다. 세상의 축소판 같은 다양한 사람들을 싣고 덤덤하게 국토를 관통하는 기차는 그 자체로 너무 멋있었지만, 그 기차 안의 질서 수호자 승무원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특히 열차 내 안내방송을 하는 승무원이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그런 이유로 요즘도 기차를 타면 안내방송을 유심히 듣는다. 그중에 이런 방송이 있다.

'부탁 말씀드립니다. 산업안전보건법의 고객 응대 근로자 보호 조치가 시행되었습니다. 접객 직원에 대한 폭언, 폭행, 성희롱 등을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뭔가 어색하다. 승무원에 대한 폭행 등 범죄행위를 하지 말라는 내용인데, 그걸 지나치게 부탁의 형식으로 말하는 것도 어색하지만, 그 와중에 산업안전보건법의 시행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설명해 주지 않아 궁금하다. 법문을 찾아보자.

산업안전보건법 제41조는 사업주에게 고객 응대를 주로 하는 근로자들이 고객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폭언, 폭행 등의 위험으로부터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사업주의 의무 중 하나로 '근로자에게 폭언 등을 하지 말 것을 고객들에게 말과 글로 알려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위와 같은 방송을 한 것이겠다. 그렇다면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해 새롭게 시행되는 것은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조치를 취해야 하는 사업주의 의무다. 근로자들에게 폭언 폭행 등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산업안전보건법의 시행과 상관없이 원래 금지된 행위다. 법에 따라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방송을 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굳이 산업안전보건법의 시행에 기대어서야 겨우 부탁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이 한편 짠하게 느껴진다.

고객이 왕이라는 말이 통용되던 시대가 있었다. 얼마간의 돈이라도 지불하는 자라면 서비스를 제공하는 자에 비해 당연히 우월한 존재가 될 수 있으며, 행여 그의 요구가 과하거나 터무니없어 진상의 영역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참아 넘기는 것이 서비스 정신으로 통용되던 시대였다. 사업주들 역시 보수를 준다는 이유로 고용인들에게 온갖 진상을 참아 낼 것을 요구했다. 그런 논리로 '왕님'들의 폭력과 성희롱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욕설을 받아 내다가 아프게 병들기도 하는 이들이 있었다.

고객이 왕인 시대를 지나 남몰래 삼켜야 했던 접객 근로자들의 아픔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결과로 진일보한 것이 산업안전보건법의 접객 근로자 보호조치 의무 규정이다. 산업안전보건법은 고객응대 근로자가 일상적으로 노출되는 폭언과 폭행의 환경을 산업안전상의 위해 요소로 규정하고 사업주에게 마땅히 그것을 방지할 책임을 지우고 있다는 것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폭언 등을 하지 말아 달라는 방송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진상들을 향한 것뿐만이 아니라 사업주와 우리 사회 전체를 향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사업주에게는 그가 고용하고 있는 근로자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이 다름 아닌 그의 의무임을 일깨우고, 방송을 함께 듣는 우리 사회 역시 모두가 안전하고 정당한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라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노동자들의 안전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공감대를 공유하는 것이다. 고객이든 누구든 왕인 시대를 넘어 우리는 각자 정당하고 합리적인 서비스를 주고받는 시대로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일터의 폭력으로부터 누구라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원칙에 대해 다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왕 하는 방송이라면 더 당당하고 단호했으면 좋겠다. 고객들에게 제공되어야 할 편안하고 안전한 철도 서비스를 위해서라도 우리 근로자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말해 주길 바란다. 우리 사회는 그런 방식으로 함께 덜컹이며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정명원 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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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원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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