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몰사고' 하수관공사 중단 5개월...천안시는 "빨리재개" 압박만

입력
2024.01.16 04:30
수정
2024.01.16 20:01

시공사 "안전대책 반영된 설계변경 먼저"
감리사는 '시공사가 현장서 융통성 발휘를...'
"안전 최종책임은 천안시... 보다 적극 중재를"
설계사 "시·감리·시공사 회의 참석요청 없음"

지난해 8월 천안시가 발주한 하수관로 정비공사 중 흙더미가 무너져 작업자 2명이 매몰된 사고가 발생했다. 이 현장은 하수관을 묻기 위해 2m 이상 흙을 파내야 하는데, 지장물이 많아 흙막이 가시설을 설치할 수가 없다. H사 제공

지난해 8월 천안시가 발주한 하수관로 정비공사 중 흙더미가 무너져 작업자 2명이 매몰된 사고가 발생했다. 이 현장은 하수관을 묻기 위해 2m 이상 흙을 파내야 하는데, 지장물이 많아 흙막이 가시설을 설치할 수가 없다. H사 제공

충남 천안시에서 안전사고로 중단됐던 하수관로 정비공사가 새해 들어서도 재개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작업자 안전대책과 그에 따른 설계 변경’을 요구하는 시공사와 ‘설계 변경은 시공사가 해야할 사안’이라는 감리사의 의견이 충돌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전하게 공사를 진행해야 할 발주처인 천안시도 이렇다 할 중재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공사 지연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15일 천안시에 따르면 시 산하 맑은물사업본부(맑은물본부)는 최근 천안시 원성동 하수관로 정비공사 시공업체 H사에 ‘19일까지 부진공정 만회대책 수립(2차) 재촉구 지시’라는 내용의 공문을 발송했다.

천안시 관계자는 “H사가 맡은 공사 진척률이 계획 대비 13.05%에 그쳐 신속한 공사 재개와 함께 부진공정을 만회할 대책을 요구하는 공문을 H사에 보냈다”며 시공사를 압박하고 있다.

이 정비공사는 천안시 원성동(2단계) 하수관로 3,388m, 차집관로 6,100m를 교체·설치하는 사업이다. 맑은물본부는 지난해 2월 H사와 사업비 110억 원에 계약을 체결했다. 공사 기간은 2026년 1월까지 36개월이다.

착착 진행되던 사업이 중단된 것은 지난해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H사가 정비공사 15구역 터파기 작업을 진행하던 16일과 21일, 두 차례 흙더미가 무너지면서 작업자 2명이 일시적으로 매몰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H사 관계자는 “신속한 구조로 인명피해는 막았지만, 추가로 토사가 붕괴될 우려가 있어 공사를 중단했다”며 “감리사(D사)에도 해당 사실을 알리고, 안전한 공사를 위해 ‘설계 변경이 필요하다’고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안전대책을 요구하며 공사를 중단한 H사의 주장은 △설계사가 설계를 하기 전에 현장에 대한 시험 터파기로 안전성 검토와 '지장물' 여부를 확인하고, △작업자 안전을 위해 '흙막이 가시설' 설치가 가능한 공법으로 설계했어야 한다는 것으로 압축된다.

그러나 감리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존 설계대로 공사를 해도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감리사 관계자는 “시공사가 설계 변경을 요구한 현장 상황은 설계사가 설계를 변경해야 할 만큼 설계에 하자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시공사가 현장에서 융통성을 발휘해 처리하면 될 일”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시공사 관계자는 “우리 요구에 감리사가 설계사를 불러 대책 회의를 하면 될텐데 그러지 않았다"며 “감리사나 발주처도 ‘설계대로 하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고 "발주처와 감리사가 공사 지연 책임을 시공사에게만 떠넘기는 게 억울하다"고 볼멘 소리를 했다. 이 사업의 설계업체인 D사의 관계자 박모씨는 "시공사나 감리사, 발주처가 공사 현장의 문제로 회의 참석을 한 번도 요구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공교롭게도 감리사는 설계사와 같은 회사다.

이처럼 시공사와 감리사가 '안전대책과 설계 변경' 책임을 두고 '티격태격' 다투는 상황에서 천안시가 이렇다 할 노력 없이 ‘공사 재개’ 압박 공문만 발송하자, 발주처인 천안시가 보다 적극적으로 사태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 1군 토목건설사의 기술사 임모(57)씨는 “천안시가 책임감리로 공사를 발주했다 하더라도 공사 도중에 예기치 못한 안전사고가 발생했고, 시공사가 ‘안전한 공사’를 위해 설계 변경을 요구하고 있는 만큼 그 요청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는데도 설계사를 회의에 참석시키는 노력조차 안하고 있는 게 문제”라고 했다. 그는 이어서 “천안시가 시공사를 압박만 할게 아니라 합리적인 대책 마련을 위해 팔을 걷고 나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건설기술진흥법 시행령 제75조에 따르면 터파기 공사에서 굴착 깊이가 2m 이상이면 반드시 작업자의 안전을 위해 흙막이 가시설 설치를 설계에 반영해야 한다. 해당 현장에서 인명 사고가 발생하면 중대재해처벌법 적용을 받으며, 최종 책임은 천안시장과 시공사 대표, 감리사에 책임을 묻게 돼 있다. 지난해 6월 천안시가 발주한 성거일반산업단지 인근 용수 공급시설공사 현장에서 흙더미가 무너져 작업자 한 명이 사망한 사고가 발생했다. 수사당국은 이 사고가 중대재해처벌법을 위반했다고 보고 지난해 10월 천안시청을 압수수색하는 등 공사 현장의 안전사고에 대해 사법처리가 강화돼 공사 현장에서는 인명사고에 대해 경각심이 높은 상황이다.


윤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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