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크리트에서 사람으로

입력
2024.01.08 17: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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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예산 증액 최소화 속 SOC는 크게 증가
선거 앞두고, 공사 벌이는 구태 못 버리면
日 ‘잃어버린 30년’ 한국도 피할 수 없어

지난 2009년 일본 민주당 정권탄생을 보도하는 일본 TV 뉴스 화면 밑에 "콘크리트 건설 행정이 아니라, 사람을 중시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하토야마 유키오 신임 총리의 공약을 소개하는 자막이 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 2009년 일본 민주당 정권탄생을 보도하는 일본 TV 뉴스 화면 밑에 "콘크리트 건설 행정이 아니라, 사람을 중시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하토야마 유키오 신임 총리의 공약을 소개하는 자막이 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콘크리트에서 사람으로.”

하토야마 유키오가 이끄는 일본 민주당이 2009년 중의원 총선에서 압승하며 정권교체에 성공했을 때 사용한 선거 슬로건 중 하나다. 선거철만 되면 지방 곳곳에 별 쓸모도 없는 건물 도로 다리 건설을 공약하고 표를 모으는 방식으로 50년 넘게 집권해 온 자민당 정책을 뜯어고치고, 콘크리트 예산을 줄여 사회복지 등 사람 예산으로 활용하겠다는 약속이다. 하토야마 정권은 미숙한 외교가 빌미가 돼 2년도 채우지 못했지만, 당시 그 선거 구호는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공감을 얻었다.

오래전 기억이 되살아난 것은 올해 예산 편성과 정부의 경제정책방향 때문이다. 정부 여당은 올해 예산이 지난해보다 2.8% 늘어나, 역대 최저 증가율을 기록했다고 홍보했다. 그렇게 알뜰하게 짠 예산 속에서도 사회간접자본(SOC) 관련 예산, 즉 콘크리트 예산은 여야의 ‘깜깜이 예산심의’를 거치며 정부안보다 3,000억 원 늘어난 26조4,000억 원이 배정됐다. 올해 본예산보다 5.6% 늘어난 것이다. 반면 과학기술과 교육 등 사람 예산은 각각 7.5%, 6.9% 감소했다.

정부는 이렇게 늘어난 SOC 예산을 상반기에 65% 조기 집행하기로 했다. 역대 최고 수준의 조기 집행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 인허가 등 사전 절차를 조기 완료하고, 민자사업 보상금은 선 투입한다. 국가계약 기간을 단축하고 선금 지급을 확대하는 한시 특례도 6월까지 연장한다. 다른 콘크리트 예산인 공공투자는 올해 60조 원대 집행을 계획하고 있다. 이 역시 상반기 사상 최고 수준인 55% 집행률을 달성하는 게 목표다.

이렇게 콘크리트 예산 집행을 상반기로 몰아놓는 이유가 무엇일까. 정부는 “올해 성장률이 지난해보다 개선된 2.2%로 예상하지만, 국민 체감에 시간이 걸릴 수 있기 때문에 조기 집행에 나선다”고 말한다. 하지만 국민 대부분은 더 중요한 이유를 짐작하고 있다. 올해 4월 총선이다. 사사건건 대립해 온 양대 정당이지만, 총선을 앞두고 각 지역에 돈이 돌아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이견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야는 회의록도 남지 않는 깜깜이 심의를 통해 콘크리트 예산을 늘렸고, 상반기에 서둘러 집행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타당성 검토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각종 건설 토목 공사로 올봄 전국 곳곳이 소란스러워질 모양이다.

일본이든 한국이든 정부와 정치인은 사람 예산보다 콘크리트 예산을 선호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콘크리트 예산 배정과 집행은 생색나기 때문이다. 복지 같은 사람 예산은 법으로 한번 정해지면 요건에 맞춰 계속 집행해야 하므로 정부나 정치인이 생색내기 어렵다. 올해 예산 중 사회복지 분야 예산은 17조9,000억 원으로 전년보다 8.7%나 증가했다. 하지만 그중 12조 원은 공적 연금과 노인 부문 지출로 거의 자동 배정된다. 정부가 올해 예산의 주요 목표로 내세운 ‘약자 복지’와 직결된 기초생활보장 관련 증액은 1조7,000억 원에 그친다.

성장률이 1%대까지 추락한 지금, 저성장에 허덕이던 14년 전 일본 민주당의 총선 구호가 부럽게 느껴질 만큼 우리 정치는 낙후했다. 만성 적자인 지방 공항을 더 건설하는 데 수조 원을 퍼붓는 것 같은 콘크리트 예산은 나랏돈 낭비일 뿐만 아니라, 경기 회복 효과도 크지 않다. 이를 우리나라 전체 고용의 70%를 감당하고 있는 서비스업 생산성 향상에 투입한다면, 성장률 회복이 훨씬 빨라질 것이다. 혁신을 주도할 벤처 기업도 활발하게 생겨나야 한다. 이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도록 돕는 두터운 사회안전망이다. 지금 시급한 것은 콘크리트 예산이 아니라 사람 예산이다.

정영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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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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