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크런'이라는 무적의 방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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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1.2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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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부산저축은행이 금융당국으로부터 6개월 영업정지를 당하자 계열사인 부산 해운대구 우동 부산2저축은행에 예금자 수천 명이 몰려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 사진

2011년 2월 부산저축은행이 금융당국으로부터 6개월 영업정지를 당하자 계열사인 부산 해운대구 우동 부산2저축은행에 예금자 수천 명이 몰려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 사진

짐짓 엄중한 표정을 지은 한창섭 전 행정안전부 차관을 마주한 건 뜻밖의 장소에서였다. 지난 4일 경기 광명 새마을금고 본점 앞. 사람 키만 한 안내문에 한 전 차관의 얼굴과 발언이 담겨 있었다. 그의 메시지는 간결했다. "큰 탈이 나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새마을금고를 이용하라"는 것이다. 지난해 6, 7월 새마을금고의 대출 연체율이 6.2%까지 치솟고, 연쇄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 우려가 증폭되자 감독 책임자인 한 전 차관 등 고위 관료들이 총출동해 고객들을 달랬다. 새마을금고는 이들을 홍보 모델처럼 활용했다. 덕분에 불길은 크게 번지지 않았다. 광명 금고도 톡톡히 혜택을 봤다. 금고 이사장이 청탁을 받고 수백억 원을 부실업체에 대출해준 사실이 들통나 구속됐지만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는 피했다.

정부가 새마을금고를 지원 사격한 건 당연한 일이다. 뱅크런은 실로 무시무시한 현상이다. 은행에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다. 지난해 3월에는 40년 역사의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이 뱅크런으로 망했다. '18억 달러를 손해 봤다'는 공시를 띄우자 고객들이 순식간에 예금을 빼갔고, 단 36시간 만에 파산했다. 우리에게도 2011년 저축은행 사태 당시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

지난 4일 경기 광명 새마을금고 본점 앞에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광명 금고 측은 지난해 일부 금고의 뱅크런(대규모 인출 사태)과 이사장 구속 등으로 고객 불안이 커지자 정부 고위 관계자의 발언을 내세워 우려를 피하려 했다. 광명=원다라 기자

지난 4일 경기 광명 새마을금고 본점 앞에 안내문이 세워져 있다. 광명 금고 측은 지난해 일부 금고의 뱅크런(대규모 인출 사태)과 이사장 구속 등으로 고객 불안이 커지자 정부 고위 관계자의 발언을 내세워 우려를 피하려 했다. 광명=원다라 기자

뱅크런은 은행 하나를 잡아먹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금융권의 연쇄 위기를 낳는다. 복잡하게 얽힌 금융 구조의 특성 탓에 상호금융기관(새마을금고)이 무너지면 증권·캐피털사와 시중은행으로 위기가 전이된다. 금융 시스템 전반이 휘청할 수밖에 없다. 국내 금융정책을 이끄는 'F4'(Finance 4·기획재정부 장관 한국은행 총재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가 일제히 "새마을금고는 안전하다"고 외쳐야 했던 이유다.

하지만, 부실 경영과 비리로 얼룩진 새마을금고가 '뱅크런 공포'를 무적의 방패처럼 펴들어선 곤란하다. 실제 이들은 조직 보호를 위해 공포심을 은근히 자극했다. 본지가 지난 22일부터 4회에 걸쳐 연재한 '서민금융기관의 민낯, 새마을금고의 배신'를 취재할 때 만난 금고 고위층들은 곧잘 '뱅크런'을 언급하며 친절한 톤으로 겁박했다. "비리나 부실이 있다면 쓰는 걸 말리진 않겠다. 그런데 기사 탓에 뱅크런이라도 나면 큰일이지 않느냐"는 식이다.

단언컨대 새마을금고는 위기설 이후 거의 변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취임한 김인 중앙회장은 "회장 단임제 도입 등 개혁 작업에 협조하겠다"는 뜻을 내비쳤지만 부실 대출, 뇌물 수수 등으로 조직을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인물 중 단 한 명도 인사 조치하지 않았다. 여전히 대마불사 논리에 기대는 눈치다. 총선이 코앞인데 정부나 정치권이 금고가 흔들리게 놔두겠냐는 것이다. 국회의원들도 1,288개에 달하는 지역 금고의 영향력을 의식해 쓴소리를 못한다는 점도 새마을금고가 여유를 부리는 이유다.

'둑이 완전히 터질 수 있다'는 경고음은 이미 수차례 울렸다. 새마을금고 수뇌부가 끝내 이를 외면하면 정부도 더는 도와주기 어렵다. 제때 조치하지 않다가 손 쓸 도리조차 없는 실정에 몰리면 대마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1997년 IMF 구제 금융 사태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를 거치며 수없이 보지 않았는가.

유대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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