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입력
2024.02.23 04:30
26면
영화 '경마장 가는 길'. 태흥영화 제공

영화 '경마장 가는 길'. 태흥영화 제공

내가 사는 동네 성북동엔 영화 '똥파리'의 감독이자 현재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는 양익준 감독이 운영하는 카페가 있다. 빠뿅이라는 제목의 이 가게에는 해가 지면 배우나 연출가, 작가들이 모여 맥주나 위스키를 마시고 놀지만 가끔은 옛날 영화를 상영하기도 한다. 설날 연휴 직전엔 여기서 존 카사베츠 감독의 ‘남편들’을 틀어준다고 인스타그램에 공지가 떴길래 아내와 함께 갔다. 나는 몇 년 전에 이 영화를 한 번 봤지만 아내와 다시 보고 싶어서 시간을 낸 것이다. 연휴 직전이라 그런지 가게엔 양 감독과 우리 커플, 그리고 프랑스 남성 관객 한 사람이 전부였다. 양 감독은 영화를 틀기 전 "이 영화는 1970년에 발표된 작품인데 '유레루'를 만든 니시카와 미와 감독은 영화 감각이 떨어지지 않도록 매년 이 영화를 다시 본다고 합니다"라며 영화를 선정한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영화는 단짝이었던 네 명 중 한 명이 죽고 그 친구 장례식장에서 만난 세 명의 남자가 ”집으로 가지 않겠어!"라고 선언하고는 벌이는 일탈의 과정을 보여준다. 마흔 살 정도에 죽은 친구 때문에 인생에 화가 난 남편들은 길거리, 농구장, 수영장, 술집 등을 전전하며 놀다가 급기야 런던행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간다. 그런데 그 과정이 의식의 흐름처럼 자유롭고 때로는 과도하게 흘러가면서 묘한 통쾌함을 선사한다. 중년 남자들의 ‘소년스러움’이라는 면에서는 홍상수의 초기 영화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문제는 영화가 여성을 너무 평면적으로 다루고 또 폭력적이라는 점이다. 술집에서 가게에 있는 손님들과 술을 마시며 각자 노래하는 장면이 길게 이어지는데 거기서 술집 여성들을 다루는 장면이 거의 폭군 수준이다. 런던에 가서 호텔을 잡은 뒤 카지노에 들어가 여성들을 헌팅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남자들이 말도 안 되는 수작을 부리지만 여자들은 관대하게 웃거나 아무런 저항 없이 호텔방까지 따라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아무리 1960년대 말이라지만 여성을 보는 시각이 이토록 ‘단순무식’했구나 하는 자각이 밀려왔다.

문득 몇 달 전 TV에서 방영해 주었던 ‘경마장 가는 길’ 볼 때가 떠올랐다. 1990년대 한국의 영화 신동 중 한 명이었던 장선우 감독의 이 영화는 문성근, 강수연 등 연기파 배우들이 출연했고 명대사도 너무나 많았던(“너의 이러한 행동의 이데올로기는 뭐냐?”) 작품이었는데 다시 보니 여성에 대한 가스라이팅이 도를 넘고 있었다. 아니, 문성근의 대사는 거의 다 가부장적이고 비뚤어진 폭력의 정당화였다. 어안이 벙벙했다.

예전에 그저 재밌게만 느꼈던 표현들이 이토록 다르게 느껴지다니. 이것은 그동안 내가 변하고 사회가 진보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거꾸로 말하면 이 이전까지 얼마나 많은 ‘야만의 시간’이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불과 몇 년 전에 연기자 출신으로 정부 고위직에 올랐던 분이 후배 연기자에게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남자들이 부담스러워한다”라는 얘기를 공개적으로 하길래 ‘저분 저러다 큰일 나겠네’ 생각한 적이 있다. 여자가 똑똑하면 칭찬해 줄 일이지 조심하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때는 맞더라도 지금은 틀리는 게 너무 많다. 나이가 몇이더라도 옳은 방향으로 달라지는 건 받아들이고 또 배우자. 그게 ‘탈 꼰대’의 지름길이다.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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